제주는 잘 있습니다 - 엄지사진관이 기록한 일상의 순간들
엄지사진관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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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기 이전에 낯선 곳이었으므로 나는 자주 힘들었다. 

그래도 결국 내가 스스로 선택한 이곳에서

조금 더 낯설게 행복해지기로 했다.

(p. 7)


나는 제주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서울에 살던 기억을 꺼내 페이지를 넘겼다. 아무 연고도 없어 막연했던 타지 생활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타지인 제주에서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엄지사진관은 제주를 안식처로만 그리지 않는다. 꿈을 지키지 못했다는 절망감에서 비롯된 제주행은 전환점이 됐다. 도피처로 택한 제주에서 조각난 마음을 다잡고 사진가로서 인생 2막을 연다.


낯가림을 낯설음으로 돌파했던 부담감은 아름다운 필름 감성으로 덧칠되었다. 오늘을 잘 살고 내일도 잘 살아내길 바라는 마음들이 사진과 함께 수록됐다. 이젠 여행자가 아닌 생활자이자 이방인의 시선으로 제주의 모습을 담아낸다.


사진과 나 사이의 지구력을 기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아마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나의 시선으로 찍어내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화려하고 경이로운 순간을 기록하고, 내내 곱씹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사실 나는 필름 카메라 하나만 들고 골목길을 걸을 수 있다면 충분히 행복해진다. 매번 같은 지붕, 같은 골목길이라도 그 순간이 좋다. 온전한 순간을 누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반복되는 일상이 나에겐 어느 무엇보다 가치 있고 소중하다. 누군가는 지루하게 바라볼 수 있는 느린 리듬의 고요함이 값지다. 카메라에 일상을 담겠다는 생각이 쌓이고 쌓여 나의 지구력이 되었다. 좋아하는 것을 기록하며 아주 오래 걷고 싶다. (p. 131)


제주에서 엄지사진관에게 위로가 된 장소는 여행자의 낭만이 깃든 곳보다는 일상감이 묻어나는 장소다. 출퇴근을 반복하는 골목, 이름 모를 시골길, 비포장도로같이 이목을 잡아끌지 않아도 살아있다고 느끼게 되는 곳 말이다. 그 틈에서 활기를 느끼고 활력을 되찾는다. 공간을 향한 사람들의 애정이 그 공간으로 들어선 이방인에게 따스함이 되었다. (p.110)


그 모습을 보며 나의 제주를 떠올렸다. 나야말로 '여행지로서 제주'보다 '일상으로서 제주'가 더 익숙한 사람이니까. 별생각 없이 찾는 단골 카페, 힘들 때마다 찾아가는 함덕의 바다, 마음속 고향인 구좌와 어릴 적 기억이 선연한 남원의 풍경. 기억 속의 제주는 피드 속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사진조차 찍지 않는 일상적인 곳들이다.


거창하게 무언가를 바라기보다 

하루하루 끼니를 챙기고,

평온하게 지낸 오늘이 잘 쌓이길 바랄 뿐.

그걸로 충분하다.

욕심내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그저 내게 주어진 오늘을 마주한다. 

무슨 일이 생길까?

어떤 사람과 만나게 될까?

아무것도 단정짓지 않기로 해. 

(p. 236)


그는 제주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잘 지낸다. 어쩌다 이런 삶을 살 뿐인 사람들에게 추억을 선물하려고 사진을 찍는다. 엄지사진관의 제주에는 사랑한다고 모든 걸 껴안을 수 없는 마음이 진솔하게 드러난다. 추억이 빛을 발할만한 장소를 찾아다니는 일, 상상 속 공간을 발견했을 때의 기분 좋은 파동이 다시 카메라를 들게 한다. 카메라 속에 담긴 일상이 조금은 미화되어 문득 꺼내 봤을 때 뭉클해지도록.


이 섬에서 오늘도 빈틈없이 행복하길,

모든 시절이 호시절이길.(p.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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