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 우리는 일요일마다 그림을 그리는 것뿐인데
아방(신혜원)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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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말아요. 

이렇든, 저렇든 우리는 멋질 거예요.

p. 155



내게 미술은 잘하고 싶지만 두려운 과목이었다. 꼭 반마다 그림 잘 그리는 애들이 있었고, 그 애들은 몇 번의 스케치만으로 그림을 완성했다. 나는 옆에서 잘 그린 그림을 힐끔 보다가 애꿎은 연필만 만지작거리며 수업을 마쳤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던 나는 소규모 그림 수업을 들었다. 평가하는 선생님은 없었지만 칭찬하는 선생님은 있었다. 여전히 칭찬은 '잘 그린 수강생'에게만 돌아갔다. 내겐 그저 미소만 짓던 선생님의 표정이 기억난다. 그 뒤로 미술을 잊고 살았다.



왜 빈 종이 앞에선 한없이 작아질까. 저자 아방은 미술 학원에 다니던 때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노란색 돌멩이를 그리던 이상한 애는 연필만 사용해 그림 그리고 싶은 고3으로 자랐고, 획일적인 학원의 교육방식이 싫어 '그림을 배우지 않은'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다. 그림 수업에서 아방은 뭘 가르쳐주지 않는다. 기술보단 보람을 느끼도록, 비판보단 칭찬을 쏟아내며 수강생을 다독인다. 좋아하는 감정만큼은 쉽게 망가지지 않도록.





"네 그림이니까 나한테 물어보지 마세요"의 숨은 뜻

뭐라고 할 사람 없으니 눈치 보지 마세요!


아방을 찾아온 사람들은 오랜 시간 꾸준하게 그림을 그려 나간다. 취미생활답게 긴장을 풀고 이 시간만큼은 마냥 즐겁게 지낸다. 그림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해내는 창작 활동이다. 사회에서는 온전한 내 몫이 없어도 그림은 하면 하는 대로, 되면 되는대로 나만의 것이 생긴다. 오랜 시간 꾸준하게 작업을 이어온 수강생들이 스케치북을 가득 채워 돌아갈 때면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도 뿌듯해진다.


​“하라고 해서 했어요. 그런데 하다 보니까 재밌었어요. 느는 게 보였어요. 느는 게 아니라, 하여튼 뭐가 보였어요. 사람 그리는 걸 두려워했는데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가장 중요한 건 그거예요.”


“내가 변하는 게 보여서 좋았어요. 처음보다 자신 있게, 또 빨리 그리게 되더라고요. 이제는 조금 더 단순하게 그려보고 싶어요.”


“별생각 없이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다 그리고 나니까 한 권이 전부 내가 좋아하는 맥주로 채워져 기분 좋아요. 이제 맥주는 다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p. 90


너는 재능이 없으니 그림 그리지 말라는 말로 상처받은 아기 새들에게 아방은 말한다. 재능이 없는 게 아니라 그림의 장점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수강생들은 보란 듯이 '반복이 주는 멋진 대가(p. 89)'를 실감한다. 빈 종이를 앞에 두고 고민하던 나는 사라지고 조금씩 자신감을 장착해간다. 그리는 재미를 알아버린 학생들이 실력도 쑥쑥 늘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긍정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았다.



약한 불씨로 살피는 것이 취미생활입니다

작고 소중한 나의 능력치



빈 종이 앞에 두고 고민하기보다, 무턱대고 그리다 보면 손이 자연스레 답을 찾아줄 때가 있다. 매일 어떤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제자리에 있는 것 같아도 꽤 큰 변화가 생긴다. 그 재미를 알았으면 한다. 게다가 노트와 펜만 있으면 되니 돈도 얼마 안 든다. p. 91


우리에겐 작지만 소중한 능력치가 있다. 취미생활은 귀여운 능력치를 눈치 안 보고 재미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취미도 '본격적으로' 하려는 사람들이 생겼다. 즐거워지려 하는 것인데 내 능력이 초라해서 발도 못 붙이는 이들이 '그냥 마음대로 하세요'란 말에 눈물을 흘린다.


바깥세상은 야수와 같다. 조그만 실수를 저질러도 나비효과처럼 뒤통수를 후려 갈기는 사건이 왕왕 생겨 좀처럼 마음대로 살게 내버려 두질 않는다. 게다가 삶에는 지우개도 없어서 그냥 고쳐 쓰고 덧칠하며 사는 거다. 작은 지우개로 박박 때를 밀어봤자 어차피 뚜렷하게 지워지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하지만 그림 세상은 다르다. 실수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에 안 들면 새 종이 펼치고 다시 그리면 된다. 인생에서 새 종이 꺼내려면 시간도 배로 들고 돈도 들 텐데 그에 비하면 종이 한 장은 얼마나 가벼운지. 처음에 당황하고 불안해하던 멤버들은 어느새 자기 지우개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채 집으로 돌아간다. p. 172


그림 세상에선 터무니없는 실수나 농담, 마음마저 내보여도 괜찮다. 그냥 우리는 일요일마다 그림을 그리는 것뿐인데 꼭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잖아' 같은 기대감(p. 60)만 가지면 된다. '다음엔 어느 방향으로 연필이 움직일까?' 호기심을 붙잡고 한 번 믿어보는 거다.





어떻게 그리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은 한 번도 빠짐없이 어떻게 살고 싶은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고로 작품을 하려면 내 삶을 잘 알아야 한다. 삶의 방향이 작품의 방향이 되고 삶의 색깔이 작품의 색깔이 된다. p. 252



일단 그리고 보면 내 생각과 방향을 읽을 수 있다. 모든 수강생이 잊고 있던 삶의 즐거움을 깨닫고 돌아갔다. 삶을 채색하는 작가도 마찬가지다. 나의 작품과 색을 잃지 않기 위해서, 나의 능력치를 그 누구보다 크게 인식하고 가꿔나간다.


다 읽고 나니 책장에 처박힌 새 스케치북이 생각났다. 더는 그림을 안 그리겠다고 마음먹은 뒤, 존재를 잊고 살았는데 이젠 무엇이든 그려볼 용기가 났다. 글도 무엇이든 쓰면 되는 것처럼 그림도 무엇이든 그리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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