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로니아공화국
김대현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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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영화 『변호인』에 나오는 대사이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이 헌법 조항이 과연 잘 지켜지고 있을까? 매일 뉴스에 등장하는 건 각종 갑질로 인한 부당한 피해다. 국가는 이런 파렴치한 이들에게 통쾌한 한방을 주지 못한다. 우스갯소리로 한국은 돈이 많으면 살기 좋은 나라”란 말까지 나온다.
    
국가는 국민이라는데 왜 국민은 행복하지 못할까? 여기 한 남자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 한국 주입식 교육의 수혜자이며 서울대학교를 나와 검사가 된 김강현’. 그는 단순히 한국이 싫어서 새 나라를 건국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헌법에 명시된 것처럼 국민이 국가 그 자체인 나라를 직접 만들고 싶어서, 그런 나라라면 국민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책은 김강현이 자라온 사회 환경을 빠르게 다룬다. 군부정권 시대부터 각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있었던 큰 사건들, 동네 친구들 삥을 뜯던 그가 어떻게 공부에 눈을 떠 검사까지 되었는지가 순식간에 지나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검사 조직 안에 있던 그가 검사를 때려치운 이유는 검사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재판의 방향을 조정했기 때문이다. 검사들은 검찰이 국가였다. 무고한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 법의 길을 갔던 그와는 달랐다

 

우리라고 규정된 검사들은 우리를 위하여 수사했고 우리를 위하여 담합했고 우리를 위하여 무마했다. 국민을 위하여 꼬리치고 국민을 위하여 용감하고 국민을 위하여 투철해야 할 검찰은 우리를 위하여 오로지 우리만을 위하여 복무했다. 한마디로 검찰은 쓰레기였고 검찰청은 쓰레기장이었다. (p. 137)

 

 

이후 JDZ(한일 공동 개발구역)에 새로운 국가 아로니아를 건설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과 치밀하게 준비한다. 시진핑을 만나 도움을 청하고 한국과 일본이 이 대륙붕 때문에 싸워 분쟁지역이 되며 점차 자신들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영세하지만 이 작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선거를 치르고 대통령을 뽑는다. 1대 대통령이 된 김강현은 아로니아 국민들을 위해 힘을 쏟는다. 미국 잠수함이 영해를 침범하면 국민들을 최우선적으로 대피시킨 후, 그들을 격파한다. 자신들이 독립 국가임을 인정받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다. 자신은 주입식 교육의 수혜자지만 이런 교육 제도로 인해 사람들이 고통받지 않길 원한다. 모든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낸다.
 
국가란 이런 것임을,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권력은 이런 것임을 똑똑히 보여준다. 하지만 아로니아 공화국의 3대 대통령 선거에서 그의 부인인 수영이 당선되며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수영의 공약은 아로니아를 없애겠다이다. 행복함을 강요하는 것도 또 다른 억압이란 사실을, 국가란 국민을 종속시켜야만 존재하기에 종속되기 싫은 사람의 권리는 부정된단 사실을 수영이 일깨워준다.

 

그리고 10년 후, 어처구니없게도 진정으로 인간을 위하는 국가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밌고 신나는 국가든, 강하고 새로운 국가든, 국가는 스스로 존재하고자 국가 구성원에게 의무를 강제하고 책임을 부여하고 희생을 요구한다. 만약 국가 구성원의 의무와 책임과 희생이 없다면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국가는 인간이 없으면 살 수 없지만 인간은 국가가 없어도 산다. 인간은 살았고, 또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 있다. ( p.415)

 

 

스스로 국가를 만든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국 사람들은 국가가 있는 이상 종속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제한받는 권리들이 존재한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국가는 존재할 수 없는 유토피아였다.
 
과연 우리는 국가가 필요한지 생각해보게 한다. 국가란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어떤 희생과 자유가 버려지고 있는지, 인간은 국가 없이도 살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이들처럼 필요해 만들었으면 필요에 의해 없앨 수도 있는 것이 국가가 아닐까? 상상도 못할 상상을 한 번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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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이름은
조남주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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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 어린아이부터 예순아홉 할머니까지 육십여 명의 여성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28편의 소설로 재탄생되었다. 소설이라 말하지만 현실과 구분이 없을 정도로 우린 소설 같은 상황을 매번 마주하고 있다. 얼마 전, 흔한 일이 더 이상 흔해지면 안 된다며 여성들은 거리에 나섰다. 미투 운동은 확산되며 이젠 참지 않겠다는 목소리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여자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가장 가까운 여자의 모습은 엄마다. 누군가의 딸로, 결혼해서는 누군가의 아내와 며느리로, 아이가 태어나서는 엄마로, 손자 손녀가 태어나면 할머니로 살아가는 우리의 엄마들. '누군가'란 타이틀이 앞에 붙어야만 그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엄마도 여자'란 말을 자주 말하면서도 사실 우린 엄마를 엄마로만 인식하고 받아들이려 한다. 사소한 집안일부터 나를 태어나게 했단 이유만으로 이미 불평불만의 대상이 돼버린 그녀가 '82년생 김지영'이다.

그래서 소설 속 주인공들은 결혼해, 좋은 일이 더 많아. 그런데 결혼해도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엄마가 되려고 하지 말고 너로 살아 (p. 90)라고. 엄마는 늘 저주처럼 말하지. 나중에 꼭 너 같은 딸 낳아서 키워보라고. 근데 엄마 그거 알아? 나는 나 같은 딸로 태어난 게 아니라 나 같은 딸로 키워진 거야. 엄마에 의해서. (p. 51) 라고. 근데 진명 아빠, 나 사실 좀 억울하고 답답하고 힘들고 그래. 울 아버지 딸, 당신 아내, 애들 엄마, 그리고 다시 수빈이 할머니가 됐어. 내 인생은 어디에 있을까. (p. 201) 라고 말한다.

엄마란 그녀가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면 사회 초년생의 그녀들은 생존을 위협받는다. 여자 혼자 자취하면, 어두운 밤거리를 지나면 위험하다는 말은 사실이다. 고성능의 방범장치나 쾌적한 주거환경을 갖추려면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요즘 청춘들은 취업난에 시달리며 비정규직, 인턴 등의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누울 방 한 칸 구하는 것도 힘들다. 그런 여자의 집에 낯선 남자가 들어오려다 들킨다. 회사에서 성추행을 당하자 고발한다. 하지만 법원의 판결까지 온갖 비난과 협박을 들으며 몇 년의 긴 싸움을 해야 한다. 처벌은 솜방망이다. 늘 조심해야 하고 경계해야 내가 살 수 있는 현실은 소설과 같다.

여자가 여자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여자가 여자를 사랑한다고 별난 사람 취급을 받는다. 부당하게 해고당한 비정규직들이 시위를 한다.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선 학생이 있다. 사드를 막기 위해 시위를 하는 할머니가 있다. 이는 불과 얼마 전, TV에서 뉴스에서 SNS에서 보던 일이다.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지만 여전히 부당함은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참는 게 능사란 말은 옛말이 된지 오래다. 이제 정의는 나를 위해 투쟁해서 쟁취해야 하는 것으로, 그렇게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변화하고 있다. 분명 과거와 현재는 달라졌지만 나아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안주해서는 안된다.

이 책에는 쓰러져가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담겨있다. 다수결의 원칙이 중요시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수의 의견은 무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소수이기 때문에 목소리를 낸다. 더욱 크고, 활발하게, 적극적으로 해야 다수가 듣고 눈길이라도 주기
때문이다. 『82년생 김지영』 이 여성 인권에 대해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처럼 어떤 책이, 음악이, 댓글이, 사람이 관심을 촉구할 수 있을지 지금은 모른다.


모르면서 당하는 것과 알면서 당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우린 모르면서 당하는 쪽이어서는 안된다. 육십여 명의 그녀들처럼 이름은 모를지라도 그들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은 알려야만 흔한 일이 별일이 될 수 있다. 지금 우린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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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좋은 일 - 책에서 배우는 삶의 기술
정혜윤 지음 / 창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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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마디 말보다 책 한 권이 주는 위로가 더 클 때가 있다. 나 자신이 평범하다 생각하다가도 세상과 동떨어진 사람이라 느껴질 때 책은 질문을 던진다. 물음표가 가득할 때 또 던져진 물음표는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도록 유도한다. 정혜윤 작가님은 책에서 얻은 수많은 질문으로 끊임없는 자아 찾기를 한다. 그 결과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발견한다.

 

나와 세상 사이의 연결고리는 늘 책이었다. 나는 세상에서 늘 책으로 돌아갔다. 밤과 책의 위안으로 돌아갔다. 응답 없는 세상과 삶에 대한 고통스러운 사랑을 갖가지 아름다움으로 바꿔놓은 것이 책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나는 책이 날개를 펄럭일 때 떨어져 나오는 황금빛 가루에 의지하면서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고, 스스로를 달래고, 은밀히 격려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더 버티고, 집요하게 미래를 위한 소원을 품고, 슬픔을 잠으로 바꾸고, 꿈을 꿨다. 그리고 세상으로 돌아갔다. (p. 13)

 

책은 위안이었다. 고단한 삶 속에서 잠시 비켜나간 안식처였다. 부정이 많은 세상 속에서 긍정을 말할 수 있도록 독려한다. 내가 무심코 했던 말들이 타인과 별반 다르지 않을 때, 나를 바꾸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만든다. 책은 그렇게 자기계발을 유도하면서 심적 위안을 얻을 수 있도록 한다. 그녀가 말한 책이 주는 방향성이란 마음을 내려놓는 법, 즉 내가 당연하지 않다고 여기면서도 당연하게 하고 있는 것들을 직시할 수 있게끔 하는 표식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내게 더 중요하게 다가온 것은 다른 것이었다. , 누군가 책의 문장을 되뇌면서 인생의 방향성을 정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다. 너무나 놀라웠다. 그렇게 되면 미래는 더 이상 알 수 없는 미래가 아니라 예측 가능한 미래일 수 있다. (p. 51)

 

그녀는 훌륭한 독서가이다. 그녀가 읽은 책들은 너무 방대해서 나열하는 일상 속에서 자연스레 등장한다. 오랜 고전부터 철학까지 그녀가 말한 책들의 이야기는 마치 자신의 삶과 연결되어 있단 느낌을 받았다. 책이 의식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있기까지 얼마나 치열한 독서와 고뇌를 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편하게 쓰는 말들을 하나하나 나열하며 고정된 개념이었단 사실을 일깨우고, 자신의 감정을 명확히 사실과 구분 짓는 모습을 보면 그녀는 자신만의 영역을 이미 구축한 것 같아 보인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우리를 닮고 우리의 삶은 우리 내면을 따라 흘러간다. 특히, 흔히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은 우리 마음의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우리가 편안하게 쓰는 많은 말들이 우리를 현실에 묶어두고 말하는 사람 자신조차 외롭게 한다. 다양성을 말하지만 우리가 하는 많은 말들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p. 73)

 

영역을 구축하기까지 그녀는 수많은 질문을 만들었을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보단 질문을 통해 지난날을 돌아보며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의 내가 변화했는지를 되돌아보면서 답이란 명제보단 미래에 대한 질문을 던졌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질문을 구하고 대답에 따라 살려 하지만 릴케는 인내심을 가지고 대답을 기다리되 질문에 따라 살라고 (p. 290) 했으니까.

 

보르헤스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책을 읽는 꿈을 꾸지만 사실은 책에 있는 각 단어를 만들어내고 있다. (p. 317) 독서는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우리가 글을 창조하진 않았지만 창조된 글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각자 저마다의 가치관으로 해석해낸다. 사회에서 부여한 가치를 끊어내고 단어를 내 세계로 끌어온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몇 개의 단어를 갖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포기한 단어는 없는지, 여전히 사회와 연결된 단어는 없는지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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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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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다들 파괴된 마음을 하나씩은 안고 산다. 그게 이별이 될 수도, 사랑이 될 수도,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다. 마음은 쉽게 으스러지는 반면 회복은 더디게 이루어진다. 「경애의 마음」은 회복이 더딘 사람들의 이야기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하고 결국 자신을 지키기 위한 차선책으로 별종이 된다.

경애는 호프집 화재사건으로 인해 소중했던 친구들을 한꺼번에 잃는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장소에서 혼자 살아남았단 죄책감은 꼬리처럼 붙어 다닌다. 상수 역시 그 화재사건으로 자신을 이해해주었던 친구를 잃었다. 더불어 그의 상처는 폭력을 행사해 감옥에 간 형, 아빠에게 버림받은 엄마, 체면만 중시하는 아빠로 인해 깊어진다. 이별을 통해 성숙해지기보단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방어적이 된 두 사람은 같은 회사에서 상사와 부하직원으로 만나게 된다.

경애는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파업에 동참한 이력이 있다. 하지만 성희롱 사건으로 파업이 무너지고 경애는 다시 회사로 돌아간다. 하지만 파업에 가담했던 그녀를 직원들이 곱게 봐줄 리 없었다. 온갖 핍박에도 그녀가 회사를 계속 다닌 이유는 "살기 위해서"였다. 파업을 함께했던 동료들이 그녀를 배신자로 보더라도 생계를 이어나갈 밥줄은 이 회사 밖에 없었으니까. 반면, 상수는 아버지의 인맥으로 간신히 연명 중인 낙하산 직원이다. 상수가 그 사실을 부인해도 실적이 형편없는 그를 자르지 못한다.

그들이 속한 조직에서 실패자로 낙인찍힌 둘은 한 팀이 되지만 동상이몽이다. 팀이어도 경애는 '일'이외로 상수에게 관심을 보이지도, 상사라고 잘 보이려 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다른 둘이지만 '호프집 화재사건'으로 둘의 교집합이 형성된다. 그들의 친구인 '은총'은 그들이 이별해 슬퍼하던 폐기되지 못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경애는 비행과 불량, 노는 애들이라는 말을 곱씹어 보다가 맥주를 마셨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57명의 아이들이 왜 추모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하는가 생각했다. 그런 이유가 어떤 존재들의 죽음을 완전히 덮어버릴 정도로 대단한가. 그런 이유가 어떻게 죽음을 덮고 그것이 지니는 슬픔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 (p. 68)

단지 학생이 술을 마셨단 이유만으로 학생들의 죽음이 정당화되지 못했다. 이 황당한 사건으로 여전히 고통받는 생존자(경애)와 부모, 친구(상수)는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탈출할 방법조차 없는 닫힌 곳에서 울부짖던 학생들의 목소리가 있는데도. 대중이 세운 황당한 기준으로 2차 피해가 발생했다. 경애와 함께 파업을 했던 사람들도 함께 연대를 외치며 끈끈했던 그 시간은 순식간에 잊은 채 그녀를 비난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시선이 어디인지에 따라 결과의 방향이 극명히 달라졌다.

상수는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함을 '언니는 죄가 없다'란 SNS 페이지에서 풀고 있었다. 자신을 여자로 위장하여 이뤄지는 일이었지만 그는 사연자들에게 진심으로 각종 조언과 충고를 건넨다. 하지만 그의 세계는 해킹으로 인해 사연자들의 정보가 새어나가면서 문을 닫게 된다. 그가 아무리 진심이었다 해도 사람들은 그를 옹호해주지 않는다.

둘이 은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도, 경애가 다시 자신의 권리를 위해 1인 시위를 해도, 상수가 페이지 주인 자리를 내려놓아도 그들 주변의 세상은 별다를 것 없이 흘러간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이 떠안아야 하는 각종 이야기들, 그것은 계속 반복되지만 서로가 인식하고 있기에 둘은 매일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서로가 서로를 채 인식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니 어디엔가 분명히 있었던 어떤 마음에 관한 이야기였다. (p. 345)

산다는 건 무엇일지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는 어떻게든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지만 결코 지워낼 수 없다. 폐기할 수 없는 그 마음은 스스로 위로와 위안을 주어야 한다고,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라고 묵묵히 건네는 메시지일 거다. 이 책을 읽으며 마음 한구석이 시리다면 경애와 상수처럼 우린 아직 파괴되지 않은 사람들일테니까.

그것은 시월의 어느 깊은 가을 날 우리가 떠안을 수 밖에 없었던 누군가 와의 이별에 관한 회상이었지만 그래도 그밤 내내 여러번 반복된 이야기는 오래전 겨울, 미안해, 내가 좀 늦을 것 같아 눈을 먼저 보낼게, 라는 경애의 목소리를 반복해서 들으며 같이 울었던 자기 자신의 관한 이야기. 서로가 서로를 채 인식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니 어디엔가 분명히 있었던 어떤 마음에 관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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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될까봐
이지상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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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몽환적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진짜가 맞는지 계속 되묻게 만든다. 살고 있는 현실로 되돌아오면 지난날은 '서서히'도 아닌 '순식간'에 휘발되지만 그 휘발성 덕분에 그간의 기억에 매달려 기록을 남긴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꺼내 볼 수 있도록. 그렇게 남겨진 기록들은 일상을 살아가며 지칠 때마다 꺼내 보는 한 페이지로 남게 된다. 『기억하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될까 봐』란 제목도 그런 의미로 만들어진 게 아닐까?


과거의 기억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현재의 내가 불러낸 세계이며 그것은 미래를 열어가는 힘이다. 옛 기억들을 글로 불러내면서 그것을 경험했다. 낡은 외투 같은 옛이야기들의 먼지를 털고, 밝은 햇살 앞에 드러내 다듬는 가운데 새로운 시간이 열렸다. 글을 쓰는 동안, 행복한 기억들이 "나 여기 있어요!" 하며 자꾸 솟구쳐 올라 행복했다. (p. 7)

 

400개의 도시에서의 경험과 인연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기억엔 추억들이 자리해 있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절부터 여행을 다닌 저자의 이야기부터 최근의 여행담까지 먼지 쌓여 한 켠에 자리해 있던 장면과 느낌을 하나둘씩 꺼내 본다. 되짚어 보면 힘들지만 즐겁기도 했고, 황당하고 무섭기도 했던 여러 편의 장면은 부정적인 감정은 걸러진 채 웃음만이 가득하다. 그가 현재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꿈이 만나는 터전이다. (p.54)라고 말했 듯, 현재에 서 있는 그는 다시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힘을 과거로부터 얻고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묘사가 생생하게 재생되는 점이 좋았다. 감탄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 떠오르기도 하고, 정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벅차오름과 간절함이 나에게도 느껴졌다. 일상의 지루함과 고단함을 벗어나기 위한 탈주극이 여행은 마치 초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처음 시작할 때의 설렘과 떨림의 감정을 여행에서 느낀다. 바다, 산, 음식, 잠자리, 거리, 간판 등의 모든 것이 새 포장지로 감싸져있다. 처음으로 돌아갔을 그 순간에 우리는 잠깐 본연의 '나'로 되돌아간다. 순수하게 내뱉는 '와.....'하는 탄성은 꾸며지지 않은 날 것의 내 마음이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삶은 덧없어 보이지만, 산다는 것은 순간순간이 모두 다 붉은 핏방울이었다. 나도 핏방울로 글을 써왔고 세상 사람들 모두 핏방울을 흘리며 살고 있다. (p. 137)

 

 

 

우린 각자만의 방식으로 삶의 기록을 남긴다. 때론 남겨지는 것 자체가 내 눈에 보이는 것만큼 성에 차지 않지만 그래도 남겨두면 과거의 향수병을 그리움으로 치환할 수 있다. 삶과 여행은 그렇게 맞닿아있다. 그 둘의 줄다리기는 팽팽하게 맞선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야. 역시 집이 최고야!"라고 외치다가도 긴 시간이 지나면 그 사실을 망각한 채 다시 지긋지긋한 톱니바퀴를 벗어나고 싶어진다.

우린 모두 핏방울을 흘리며 살고 있다. 피는 살아있기 위해서 필수적인 동력이다. 하지만 그 피가 수혈되지 못한 채 다 흘려버리면 우리는 숨을 쉴 수 없다. 여행은 그런 피를 수혈하기 위한 충천기라 생각한다. 떨어져 가는 내 혈액을 다시 채워 넣어줄 맑고 깨끗한 피. "떠나고 싶다"라 되뇐다면 아마 우린 추억의 피가 필요한 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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