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노보노, 오늘 하루는 어땠어?
이가라시 미키오 지음, 고주영 옮김 / 놀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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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보노보노>가 숲속 친구들과 함께한 이야기들로 재구성되었다. 어릴 적, 티브이에서 방영할 때는 귀여운 숲속 친구들의 일상 이야기로 만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깊은 통찰이 느껴지는 대사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보노보노의 아빠가 잠시 자리를 비워 혼자 잠에 들어야 하는 보노보노는 외로움은 무엇인지, 진짜 혼자가 되는 것이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포로리는 며칠 뒤에 방문해야 하는 삼촌 집에 가기 싫어 일찍 걱정을 한다. 이런 고민들은 평소에도 내가 하는 고민과 같아서 보노보노를 만든 작가는 자신의 물음을 그림으로 만들어 낸 게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혼자서 자는 거랑 혼자라고 생각하며 자는 건 다르구나.

 

 

 

너부리: 너, 삼촌네 집에 언제가?

포로리: 내일모레.

너부리: 자, 내일모레 일이 지금 여기에 있어? 모레 일 따위 네 머릿속에만 있다고.


 

실제로 '이가라시 미키오'는 한국 독자들, 그중 한국 청년들에게 '바르게 사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일본 청년들과 다를 바 없는 미래를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앞이 안 보이는 길을 달려가는 우리에게 '별거 아니지만 이만하면 괜찮은 삶인 것 같아'라고 생각되는 평범한 삶을 잘 살았으면 한다고 말이다. 그가 말하는 바름은 괜찮음이다. 좋고 나쁘고를 가르지 않는 이만하면 만족스러운 삶, 아직 체감하기 힘들지만 너부리가 포로리에게 했던 말처럼 머릿속으로만 잔뜩 생각하는 버릇은 버리는 게 답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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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내 곁에 있어줘 카카오프렌즈 시리즈
전승환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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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노소 사랑받는 카카오 프렌즈가 말랑한 에세이로 나타났다. 최근에 미키마우스, 앨리스, 보노보노 등 여타 캐릭터 에세이와 비슷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책 읽어주는 남자' 전승환이 집필에 참여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라이언은 그의 글에 걸맞은 이모티콘처럼 적재적소에 귀엽게 배치되어있다. 그가 쓴 전작들처럼 이번에도 삶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 위로와 공감을 전달한다. 예전보다 깊어진 시선으로 일상 곳곳을 어루만지다 보니 나도 같이 성장해 나가는 기분이 든다.

 

그중 '무표정'에 관한 글이 와닿았다. 기쁨, 슬픔, 환희, 괴로움 감정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알게 모르게 남들이 보기 좋아하는 감정으로만 나를 포장한다. 그것이 사회생활임을 잘 알지만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나를 지우고 가면을 쓰는 행위이기 때문에 벗어버리고 싶은 답답한 심경이 치고 올라올 때가 있다. 무표정은 보편적인 나의 얼굴이다.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차분함을 잃지 않게 해주기도 하고, 억지로 웃지 않는 나를 대변해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화났냐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일희일비하며 오르락 내리락을 감당하는 것보다 무심하게 적정선을 맞추는 건 표현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이런 면을 잘 이해해준 것 같아 기뻤다.

 

진짜 감정을 감추어야 하는 사이, 그런 사람들과는 점점 멀어지는 일만 남는다.

자기만족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표정까지 참견하는 마음은 뭘까.

무표정한 사람을 왜 냉소적이고, 영혼 없는 사람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걸까.

 

모두가 늘 생글생글 웃으며 사는 건 아니다.

일상에서 가장 많이 짓는 표정은 무표정인데

내가 아닌 누군가가 아무 표정 없다 해서 기분까지 지레짐작해 어설픈 조언을 할 필요도 없다.

 

너와 내가 서로에게 일방적인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면,

무표정 속에 감춰진 다양한 감정선을 존중할 수만 있다면

조금 더 가까운 존재로 남을 수 있을 테니. (p. 25)

 

그는 별거 없던 하루, 그저 흘려보냈던 하루에는 자신을 스스로 토닥여 달라고 말한다. 참 많은 일들이 오고 갔지만 지친 하루 속에서도 나를 지키는 힘, 일상을 포기하지 말라고 응원한다. 나를 지킬 수 있는 별 같은 존재를 절대 잊어버리지 말라고, 마음을 채우고 공허를 덜어내라고 말한다. 받는 응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응원하는 1호 팬은 '나'라는 걸 절대 잊지 말라고 여러 번에 걸려 이야기하는데 최근에 낮아졌던 자존감이 올라가는 느낌이 든다.

 

이제 스스로에게 잘하고 있다고 말해줄 사람은 나 자신이다. 지금까지 잘해왔다는 걸 알아줄 사람도 나 자신이다. 어른이 되었어도 세상은 여전히 불안하고 어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우리는 자신을 그렇게 응원해주어야 한다. 난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내가 이렇게 지켜봐 줄게, 하고. (p. 161)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지만 좋아하는 것만 생각할 수는 있다. 나침반을 잃어버려 이리저리 표류하더라도 밤하늘에 떠있는 북극성을 바라보며 찾아갈 수 있다. 먼 곳의 행복이 아니라 현재의 기쁨, 오늘의 무사함을 기원하며 따라가다 보면 버겁던 하루는 이미 벗겨진 채로 목적지에 다다르지 않을까?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하면서도 뒤돌아서면 '시간이 흐르는데 왜 나만 제자리일까' 생각한다. 앞으로도 계속 그러겠지만 좋아하는 것, 나를 지켜주는 것을 생각하면 버틸 힘이 생긴다. 꽉 막힌 도로에서 현기증이 든다면 그처럼 벨을 눌러 일단 내려보자. 일단 걷다 보면 찬 공기에 정신이 깨고, 어디든 정류장이 있다. 그곳에서 내 버스를 타면 된다.

 

한 시간 남짓 낯선 곳을 걷고 나니 마음속에 꽉 막혀 있던 무언가가 풀리는 듯했다.

동시에 이대로 휩쓸려 흘러만 가다가는 내 인생에서 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밀려왔다.그날부터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부터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한 번은 숨을 고른 후에 나 자신에게 묻기로 했다.

너 지금 어디로 가고 있냐고.

 

하루가 저물기 전, 그 질문이 떠오르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보겠다고 마음을 다잡게 된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p. 255)

 

'늦어도 괜찮아'라고 자주 되뇐다. 나는 그렇게 말해주지 않으면 혼자 나자빠져 아파하고 있을게 분명하니까. 각자의 걱정이 잘 풀기를 바라는, 내 모습이 이대로도 괜찮다는 위로를 이 책에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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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너는 노땡큐 - 세상에 대들 용기 없는 사람이 뒤돌아 날리는 메롱
이윤용 지음 / 수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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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건 '인간관계' 다. 일을 같이 하는 동료부터 앞뒤가 다른 사람, 친척들의 오지랖, 친구라서 더 깊게 받았던 상처들은 나이를 먹어도 관계란 참 힘든 거라며 한숨 쉬게 만든다. 오랜 시간 라디오 작가를 해온 저자는 그간 자신이 받았던 무례함 앞에 소심하게 굴었던 지난날을 삭제하겠다 말한다. 여리고 소심한 이들은 알 거다. 속으로 큰 소리를 치지만 현실에선 입도 뻥긋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울 때가 여러 번이란 것을. 나 역시 욕을 따발총으로 쏴대고 싶지만 결국 집에 돌아오는 길에 친구에게 하소연하며 푸는 게 전부라 저자에 모습에 공감이 갔다.


나는 이제 "네가 걱정이 돼서"라는 핑계로 나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을 거부하려 한다.

정말 걱정이 된다면 그저 조용히 교회에 나가 새벽 기도 나 해주면 좋겠다.

아니, 절에서의 백일기도도 환영합니다. 정말 그것으로 족합니다. (p. 20)


은근히 나를 뒤처졌다 여기며 사서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 "졸업이 늦네", "취업은 언제 하니", "다들 힘든데 참고 다니는 거야", "결혼은 해야지", "꼭 안 간다는 애들이 일찍 결혼하더라", "애는 언제 갖니?", "그러지 말고 내가 좋은 사람 소개해줄까?" 이런 말들을 건네는 인간이면 상종을 안 하는 게 답이지만 어쩔 수 없이 봐야 한다면 저자처럼 참견은 말고 기도나 해주시라 말하고 싶다. 무례함은 다른 게 아니다. 내가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A부터 Z까지 참견하면 그게 무례한 거다. 이런 기분은 삭제해도 좋다.


우리가 언제 잘했다는 칭찬을 원했던가.

그저 딱 한 번의 헤아림. 너의 고생을, 속상함을, 잘 해내고 싶은 부담감을, 간절함을

내가 알고 있다는 그 말 한마디면 되는 것을…….

그저 그날 내 고생을 알아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되는 것을…….


그러다가 또 생각해본다.

그래, 그렇게 쉬운 위로, 남에게 바라지 말고 내가 나에게 하면 되지.

내 고생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니까. (p. 68)


그러다가도 남이 주는 위로에 목매다는 슬픈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마음 좀 알아주지 하는 여린 마음이 불쑥 튀어나올 때, 절실하게 사람이 주는 온기가 필요하다. 그녀는 힘든 하루 끝에 탄 기차 안에서 기장님의 '수고하셨어요' 안내방송에 마음을 녹인다. 그러면서 '그래, 그까짓 위로 나에게 하면 되지'하며 힘을 낸다. 이런 마음은 저장해도 된다.


그래도 떠나보는 건 좋은 것 같아. 뉴질랜드나 호주로 어학연수를 가보는 건 어때?

구글 지도가 있으면 못 갈 데가 없어. 도착 시간이 늘어나면 반대로 걸으면 되거든. (p. 160)


일을 그만둔 동료 언니가 캐나다로 여행 가서 보내준 카톡은 그녀 마음속에 저장한다. 여행에선 조급할 게 없다. 도착시간이 늦을 뿐이니 몸이 조금 고생하는 정도다. 길치인 언니가 보낸 답장은 저자의 마음에도 와닿았나 보다. 좀 멀어진다 싶으면 반대로 걸으면 된다. 마음도 이렇게 단순하게 바라보면 된다.


마음을 '저장'과 '삭제', '보류'로 구성한 것이 재미있다. 불필요한 파일을 휴지통에 버리는 것처럼 감정도 청소가 필요하다. 앞에서는 고구마를 먹은 듯 답답하다면 뒤돌아 '메롱'하고 나 혼자 사이다 한 모금 마셔도 좋다. 다친 상처에 소금 뿌리지 말고 연고를 발라 밴드를 붙이자. 책의 페이지가 배터리 방전 상태에서 완충 상태로 늘어나는 것처럼 우리의 충전도 좋은 말을 곁에 두어 그렇게 소소하게 웃고 지나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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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릿하고 따뜻하게
이시은 지음 / 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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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틀어 보고 싶은 방송을 기다릴 때면, 광고가 끊임없이 재생됩니다. '나 좀 봐줘요! 사주세요' 하는 광고에 시선이 가기란 쉽지 않지만 귓가에 들려오는 광고 카피는 뇌리에 깊게 새겨집니다. 그만큼 광고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 주는 건 카피 한 줄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광고 카피들은 저절로 그때의 유행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 책은 10년 차 카피라이터가 들려주는 일본 감성 카피 에세이입니다. 카피에 감성이라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지만 그녀가 소개하는 광고를 읽다 보면 글이라는 힘이, 구성이란 짜임새가 들려주는 위로가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습니다.

 

일본 명카 피로 불리는 몇 줄의 글은 서정성의 대표인 일본이라서 그런지 한 편의 문학작품 같습니다. 제품을 전면에 내세울 만도 한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토리 끝에 다다라야 이들이 소개하는 제품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마음에 들었던 카피를 말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나갑니다. 가족과의 에피소드부터 직장에서 겪었던 슬픔, 청춘이 가진 불안함 등 삶의 희로애락을 카피의 힘을 빌려 얘기합니다.

 

그중 가장 눈에 띈 카피는 " √a=18 여행의 길(root) 위에선 누구나 18세(age)다. " 란 문구는 여행이란 길에서는 누구나 18세의 아이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여기에 서툼을 보탭니다. 여러 번 방문해도 낯선 곳에서 백지가 돼버리는 그녀의 모습은 청춘의 본모습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일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무렵의 저였는데 일본 여행길에 오른 저는 서툼, 그 자체였거든요. 그 뒤로 여러 번 일본 여행을 하면서 점점 능숙해져 갔지만 거기에도 늘 '서툼'은 존재했습니다. 아무리 가도 서툰 자신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살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런 것들이 저를 청춘으로 만들고, 18세로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은 꼭 일본이 아니어도, 해외가 아니어도, 내가 생활하지 않는 곳이면 어디든 우리는 서툰 존재가 되더군요. (p. 42)

 

다음은 한 제과점의 광고 카피입니다.

 

어렸을 때 좋아한 음식이 지금도 역시 좋고 젊었을 때 열중했던 음악이 지금도 역시 좋고 예전에 소중했던 친구들이 지금도 역시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조금씩, 조금씩밖에 변할 수 없는 인간에게 왠지, 안심합니다. 어제와 같아서 맛있다. 어제와 달라서 맛있다. 메이지 가게의 선물

 

우연히 얻은 콘서트 티켓으로 회사 동료와 함께 간 공연장에선 요즘 유명한 아이돌 가수가 노래합니다. 그녀와 직장동료는 어린 학생들이 그들에게 열광하는 모습을 보며 예전 같지 않은 자신을 탓합니다. 하지만 막바지에 그녀가 고등학생 때 열광했던 가수가 등장하자 그녀와 동료들은 어린 학생이 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뛰고 부르며 열광하기 시작합니다.

 

서른 이전에 경험한 것은 앞으로의 취향을 결정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노래, 음식, 패션들은 어느 순간 익숙한 것을 찾게 된다는 뜻은 이런 경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녀의 취향도 제과점의 카피처럼 예전의 것이 소중하기에 시간이 흘러도 기억하지 않았을까요? 마냥 그리운 것들은 나이가 들면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아서 더욱 애착이 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제의 것, 과거의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좋은 감정. 이것은 집착도 아니고 미련도 아닙니다. 그 시절을 함께 보낸 동료애라고 할까요. 추억이란 이름 아래 모이면 모두가 그냥 그리운 것이 된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보낸 타임머신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학은 이렇듯 사랑의 마음보다 늘 뒤처집니다. (p. 84)

 

일본의 술 광고는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음 위스키 광고처럼요. " 그렇군, 인간의 시계는, 너무 빠르지. 산토리 올드"

 

이 문구는 그녀가 드라마 <자상한 시간>의 촬영지였던 '숲의 시계'를 찾아간 여정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아무 생각 없이 공간에 가득 번진 원두 향을 느끼고, 커피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으며 눈이 내린 숲을 바라보던 시간은 천천히 가 아로새겨진 흐름입니다. 이곳의 시간은 아깝지 않은 낭비입니다. 인간의 시계는 빠르지만 숲의 시계는 천천히 시간을 새긴다는 그녀의 문장처럼 말이죠.

 

그렇다면 일상의 시계와 달리 숲의 시계는 조금이라도 넓은 마음을 지닌 걸까요. <자상한 시간>이란 드라마의 제목은 그래서 탄생한 것은 아닐까요. 지금 시간은 나에게 자상함을 베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으니. 이렇게 커피향만 맡고 아무 생각 없이 있는 순간이, 낭비라고 느껴지지 않으니. 나는 분명 이 시간을 회사에서 아무 생각 없이 보내는 순간보다, 후회하지 않을 것이니.

 

사람에게 여행이 필요하다는 말이 단순히 바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함이 아니라 시간을 갖게 하기 위해서란 걸 슬쩍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JR의 예전 광고 카피처럼, 사람에겐 미아가 될 시간이 필요한 거니까요. (p. 267)

 

그녀는 말머리에서 말합니다. 이 책에는 내가 많이 담겨 있다고. 그녀는 광고 속에서 자신을 바라봤습니다. 카피들은 삶의 순간포착처럼 명징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이렇게 책으로 나오지 않았으면 그저 스쳐 지나갔을 문장들은 단 몇 줄로 표현해야 하는 이야기 속엔 나를 계속 드러내야 하는 사회생활과 닮아 있습니다. 제가 글에 공감하며 읽어내려갔던 건, 이를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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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제주 가서 살까요
김현지 지음 / 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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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봤을 때, 제주살이를 담은 이야기인가 생각했다. 알고 보니 물음표가 생략되어 있었다. '제주에서 살고 싶은데 어때요?'라고. 2014년도에 세상에 나온 이 책은 그때의 제주가 담겨있었다. 5년이 지난 제주에 그녀가 타고 다닌 버스 노선도, 카페도, 게스트 하우스도 사라지거나 달라졌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이제 바뀌어야 할 듯싶다. 1년만 지나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것들이 사라져간다.

 

저자는 월화수목금금금을 사는 직장인이다. 해외여행을 가기 위한 신분증이 없어 시작된 제주여행은 제주 앓이를 하게 만들었다. 비행기를 타고 떠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제주는 많은 이들의 로망이 되었다. 서울과 달리 한라산의 절경과 푸른 바다가 감싸고 있다. 맛있는 음식이 입맛을 다시게 만들고 여행지의 여유가 즐비해있다. 단시간에 여행자의 옷을 입을 수 있는 곳, 이 매력 덕분에 그녀는 비행기 표만 보이면 제주로 날아가는 병에 걸렸다. 야근과 회식, 직장 내 스트레스로 얼룩진 그녀의 삶에서 답답함을 내려놓게 만드는 곳은 제주 그리고 여행이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그냥 사는 것 말고, 이게 사는 거구나, 라고 느끼기 위해서.가끔 우리는 삶을 다 내려놓고 바람과 음악만을 느낄 수 있는 곳에 가기 위해 교통비와 숙박비를 지불한다. 잠시나마 일상의 모든 것을 비운 순간에야 비로소 바람과 음악이 온전히 나를 채웠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충만해지는 느낌. 좋은 경치를 보거나 색다른 경험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내 몸을 관통하는 바람과 내 귀에 가득한 음악을 느끼기 위해 떠난다. 여행은 나에게 그런 것이었다. (p. 82)

 

제주로 달려갈 수 있게 시간을 쪼갠다. 없는 휴가를 토, 일 앞뒤로 붙이고, 금요일 저녁에 공항으로 달려간다. 1박 2일, 당일치기 어떤 형태든 상관없다. 일단 제주면 된다. 1시간의 비행 끝에 보이는 야자수와 푸른 바다는 '휴'라는 글자를 이마에 선명히 새긴다. 이름 모를 사람들이 부대끼는 도미토리는 반갑지 않지만 게스트 하우스의 저녁 술자리가 있다. 분위기가 맞는 사람들이 모이면 마치 마법을 걸어 놓은 듯, 다음 여행에도 그들을 혹시 보게 될까 찾아간다. 다시 갔을 때, 그들은 이제 없지만 이렇게 글로나마 남아있는 기억을 추억한다.

 

아마 나도 그럴 것이다. 인생의 길목마다 가끔은 회의에 빠질 것이다. 불평을 늘어놓거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망상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또 볕을 향해 나갈 것이다. 내 뒷마당에 심을 유채꽃에 대해 기쁘게 떠들어댈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삶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곁눈질하며, 그렇지만 묵묵히 볕에서 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힘을 얻는 것이다. (p. 205)

 

그녀가 써 내려간 제주 일기에 대단한 관광지나 유명한 맛 집은 없다. 다만 여행의 본질은 '쉼'에 방점을 찍고 있다. 우리는 여행을 언제 떠나고 싶을까? 삶이 가장 힘들 때가 아닐까? 다 집어치우고 싶은 소용돌이가 심장에서 꿈틀거릴 때, 떠나야 한다. 어디든 내 마음이 가장 편한 곳으로. 그녀의 글을 읽으며 나도 돌아봤다. 나는 그녀가 사랑하는 제주에 살지만 당연하게 여겼던 것을 소중히 누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과거에 발자취를 추억했다. 중학생 때, 멋모르고 갔던 김영갑 갤러리를 떠올렸고, 동아리 행사 차 머물렀던 추자도의 밤을 기억했다. 아직 가보지 못한 우도를 가봐야겠다고 적었고, 좋아하는 세화와 함덕 바다를 틈틈이 찾아가야겠다 생각했다.

 

내가 수건 개는 고요한 시간을 사랑하는 건 아마 내가 주부가 아니여서, 이 숙소의 스태프가 아니어서일 테니까. 그러니까 사람은 같이 있으면 서로를 지겨워하고 따로 있으면 서로를 그리워하게 된다지. 고요하면 분주하고 싶고 분주하면 고요하고 싶다. 아마도 우리는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존재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이방인이기에. 그러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곳으로 여행하려 하는 존재이기에. (p. 34)

 

일상을 여행으로 사는 건 어렵지 않다. 그녀처럼 곳곳에 채우면 된다. 진짜 좋아하면 중요한 건 딱 하나다. 원하는 걸 쟁취하는 것! 반복적인 생활이 지겨울 때마다 그녀의 글을 들춰봐야겠다. 내가 쟁취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나는 무엇무엇을 좋아한다고 생각했고, 나는 무엇무엇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 그것을 하고 있지는 않으니,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그렇다면 정말로 그것을 할 때만 그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 하는 것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 좋아서 하는 일, 원해서 하는 일, 그래서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다고. (p.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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