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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릿하고 따뜻하게
이시은 지음 / 달 / 2011년 4월
평점 :

TV를 틀어 보고 싶은 방송을 기다릴 때면, 광고가 끊임없이 재생됩니다. '나 좀 봐줘요!
사주세요' 하는 광고에 시선이 가기란 쉽지 않지만 귓가에 들려오는 광고 카피는 뇌리에 깊게 새겨집니다. 그만큼 광고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 주는
건 카피 한 줄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광고 카피들은 저절로 그때의 유행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 책은 10년 차 카피라이터가
들려주는 일본 감성 카피 에세이입니다. 카피에 감성이라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지만 그녀가 소개하는 광고를 읽다 보면 글이라는 힘이,
구성이란 짜임새가 들려주는 위로가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습니다.
일본 명카 피로 불리는 몇 줄의 글은
서정성의 대표인 일본이라서 그런지 한 편의 문학작품 같습니다. 제품을 전면에 내세울 만도 한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토리 끝에 다다라야
이들이 소개하는 제품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마음에 들었던 카피를 말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나갑니다. 가족과의 에피소드부터
직장에서 겪었던 슬픔, 청춘이 가진 불안함 등 삶의 희로애락을 카피의 힘을 빌려 얘기합니다.
그중 가장 눈에 띈 카피는 " √a=18 여행의 길(root) 위에선 누구나 18세(age)다.
" 란 문구는 여행이란 길에서는 누구나 18세의 아이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여기에 서툼을 보탭니다. 여러 번 방문해도 낯선 곳에서 백지가 돼버리는 그녀의 모습은 청춘의 본모습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일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무렵의 저였는데 일본 여행길에 오른 저는
서툼, 그 자체였거든요. 그 뒤로 여러 번 일본 여행을 하면서 점점 능숙해져 갔지만 거기에도 늘 '서툼'은 존재했습니다. 아무리 가도 서툰
자신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살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런 것들이 저를 청춘으로 만들고, 18세로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은 꼭 일본이 아니어도, 해외가 아니어도, 내가 생활하지 않는 곳이면 어디든 우리는 서툰 존재가 되더군요. (p.
42)
다음은 한 제과점의 광고 카피입니다.
어렸을 때 좋아한 음식이 지금도 역시 좋고
젊었을 때 열중했던 음악이 지금도 역시 좋고 예전에 소중했던 친구들이 지금도 역시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조금씩, 조금씩밖에 변할 수 없는 인간에게 왠지, 안심합니다. 어제와 같아서 맛있다. 어제와 달라서 맛있다. 메이지 가게의
선물
우연히 얻은 콘서트 티켓으로 회사 동료와 함께 간 공연장에선 요즘 유명한 아이돌 가수가
노래합니다. 그녀와 직장동료는 어린 학생들이 그들에게 열광하는 모습을 보며 예전 같지 않은 자신을 탓합니다. 하지만 막바지에 그녀가 고등학생 때
열광했던 가수가 등장하자 그녀와 동료들은 어린 학생이 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뛰고 부르며 열광하기 시작합니다.
서른 이전에 경험한 것은 앞으로의 취향을 결정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노래, 음식,
패션들은 어느 순간 익숙한 것을 찾게 된다는 뜻은 이런 경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녀의 취향도 제과점의 카피처럼 예전의 것이 소중하기에 시간이
흘러도 기억하지 않았을까요? 마냥 그리운 것들은 나이가 들면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아서 더욱 애착이 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제의 것, 과거의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좋은 감정. 이것은 집착도 아니고 미련도 아닙니다. 그
시절을 함께 보낸 동료애라고 할까요. 추억이란 이름 아래 모이면 모두가 그냥 그리운 것이 된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보낸 타임머신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학은 이렇듯 사랑의 마음보다 늘 뒤처집니다. (p.
84)
일본의 술 광고는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음 위스키 광고처럼요. " 그렇군, 인간의 시계는, 너무 빠르지.
산토리 올드"
이 문구는 그녀가 드라마 <자상한
시간>의 촬영지였던 '숲의 시계'를 찾아간 여정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아무 생각 없이 공간에 가득 번진 원두 향을 느끼고, 커피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으며 눈이 내린 숲을 바라보던 시간은 천천히 가 아로새겨진 흐름입니다. 이곳의 시간은 아깝지 않은 낭비입니다. 인간의 시계는 빠르지만
숲의 시계는 천천히 시간을 새긴다는 그녀의 문장처럼 말이죠.
그렇다면 일상의 시계와 달리 숲의
시계는 조금이라도 넓은 마음을 지닌 걸까요. <자상한 시간>이란 드라마의 제목은 그래서 탄생한 것은 아닐까요. 지금 시간은 나에게
자상함을 베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으니. 이렇게 커피향만 맡고 아무
생각 없이 있는 순간이, 낭비라고 느껴지지 않으니. 나는 분명 이 시간을 회사에서 아무 생각 없이 보내는 순간보다, 후회하지 않을
것이니.
사람에게 여행이 필요하다는 말이
단순히 바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함이 아니라 시간을 갖게 하기 위해서란 걸 슬쩍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JR의 예전 광고 카피처럼, 사람에겐
미아가 될 시간이 필요한 거니까요. (p. 267)
그녀는 말머리에서 말합니다. 이 책에는
내가 많이 담겨 있다고. 그녀는 광고 속에서 자신을 바라봤습니다. 카피들은 삶의 순간포착처럼 명징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이렇게 책으로 나오지
않았으면 그저 스쳐 지나갔을 문장들은 단 몇 줄로 표현해야 하는 이야기 속엔 나를 계속 드러내야 하는 사회생활과 닮아 있습니다. 제가 글에 공감하며 읽어내려갔던 건, 이를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