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을유사상고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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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철학 지식이 전무하다. 읽어본 건, 철학을 바탕으로 쓰인 인문서 몇 권과 니체가 전부인데 그마저도 가볍게 넘기고 말았지 깊이 있게 통달하진 못했다. 그래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도전이다. 서문을 겨우 읽어내려가 첫 주에 읽은 쪽수는 고작 79페이지. 읽다가 의지, 표상, 감각, 지각 등의 단어가 낯설어져 사전까지 찾아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던 건, 쇼펜하우어가 계속 '나'라는 주체의 힘에 대해 야기했기 때문이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항상 현존하는 것은 오직 주관에 대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와 같은 말에서 어렴풋이 짐작해볼 뿐이지만.

 

과거와 미래는 - 그 내용의 연속은 차치하고서라도 - 마치 꿈처럼 공허한 것이지만, 현재는 이 둘 사이의 넓이도 없고 존속하지도 않는 경계일 뿐이다. 바로 그런 사실에서 우리는 근거율의 다른 모든 형태에서도 이와 똑같은 공허함을 다시 인식할 것이다. (p. 45)

 

인식을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전체 세계는 주관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객관에 지나지 않으며, 직관하는 자의 직관, 한마디로 말해 표상인 것이다. 물론 이 말은 현재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도, 아주 먼 것과 가까운 것에도 적용 된다. (p. 40)

 

다만, 쇼펜하우어가 말하고자 하는 게 의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계속 의심한다. 지식을 의심하고 이성을 의심하고 직관을 의심한다. 현대에서 객관적이라 여기는 덕망 또는 소양을 '과연 그게 객관인가, 그게 좋은 건가'하고 묻는다. 읽고 있으면 감정에 기반한 활동들이 결코 나쁘지 않고 확인받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그러한 객관을 표상과 도저히 구별할 수 없으며, 모든 객관은 언제나 영원히 하나의 주관을 전제하고 있어서 그 때문에 변함없이 표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므로, 객관과 표상 둘 다 똑같을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 154)

 

호기롭게 시작했던 '한 달 읽기 프로젝트'는 철학은 절대 만만하게 봐서도, 실제 만만하지도 않다고 말해준 듯 싶다. 일반적인 고전과 다른 깊고 어려운 사유의 과정을 눈으로 좇았지만 완독에는 실패했다. 쇼펜하우어가 서문에서 언급한 세 가지 조건을 내가 충족시키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대다수 사람들의 삶은 이 생존 자체를 위한 끊임없는 투쟁에 불과하며, 결국 그 투쟁에서 패배하는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대다수 사람들이 이 힘겨운 투쟁을 견디는 것은 삶에 대해 사랑이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이 죽음은 배후에 버티고 있어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고, 어느 때라도 다가올 수 있다. 삶 자체는 암초와 소용돌이로 가득 찬 바다이며, 인간은 최대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이를 피하려 하지만, 안간힘을 쓰고 재주를 부려 뚫고 나가는데 성공한다 해도, 사실 그럼으로써 한 발짝씩 전면적이고 피할 수 없으며 재기 불가능한 최악의 난파에 보다 가까이 다가간다. 아니 바로 난파를 향해, 즉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죽음이야말로 힘겨운 항해의 최종 목표이며, 인간에게는 그가 피해 온 어떤 암초보다도 나쁜 것이다. (p. 427)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 허무주의적인 면이 있다고 한다. 그런 면이 그의 철학을 돋보이게 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지 않았나 싶다. 위 문장처럼 죽음에 이르는 게 삶의 최종 목표이듯 그가 강조하는 의지와 표상 역시 붙잡고 있다가 놓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책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이해에 가닿지 못해 할 수 없다. 다만, 내가 그의 사상을 이해하여 그에게서 위로를 얻은 수많은 학자들의 마음을 느껴보고 싶어졌다. 언젠가 꼭 완독을 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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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로 일 년간 휴직합니다 - 나다움을 찾기 위한 속도 조절 에세이
몽돌 지음 / 빌리버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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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멈추지 않으면 이대로만 살 것 같아서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기로 했습니다."

 

 

 

항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달려간다. 대개 목표는 추상적이기보단 구체적이고 진학, 취업, 승진, 성적 등의 자랑할 거리로 나타난다. 결승선에 다다르면 허무함을 느낀다. "난 무엇을 위해 달려왔을까?"

 

 

저자 몽돌님은 무난하게 삶을 살았다고 하지만 그마저도 직장생활이 가져다주는 내면의 불편함을 해소시켜주지 않는다. 불편함의 원인은 '나라는 자아'. 우리는 좋아하고 싫어하고 해보고 싶고 하지 않을 것들에 대해 사실 잘 알지 못한다.

 

 

이 책을 읽은 건, 그걸 찾는 중이고 지난한 과정이 길어질 것임을 내가 어렴풋이 깨닫는 중이기 때문이다. 퇴사를 감행했던 지난 선택에 후회는 없지만 다음의 선택에서도 무력하게 결정 내리고 싶지는 않다는 현재의 나는 그녀를 통해 균형과 차선책이라는 방법을 배운다.

 

 

돈을 벌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불안해지기 쉽습니다.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님께 물려받을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차피 평생 돈을 벌어야 하는 인생들입니다. 그러니 돈을 못 번다고 걱정하지 맙시다. (p. 278)

 

 

공백기를 겪는 사람들에게 건네주고 싶은 한 마디이면서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이 문장은 '쉰다'에 어색한 나를 안심시켰다. 졸업 후의 공백기, 취업난 속에 자꾸 길어지는 불안한 취준생활,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회 초년생 등 불안을 등껍질로 지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많다. 도장 깨기 하듯 계속 윗 단계의 퀘스트를 깨며 이 자리까지 왔는데 더 이상 올라갈 곳도 돌아갈 곳도 없는 혼돈 앞에서 불안은 깜빡이도 켜지 않고 훅 들어온다.

 

 

그녀는 문제가 없어도 드리워진 불안감 앞에서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다. 일정한 수입 없이 일 년을 그냥 쉰다는 건, 앞으로의 커리어나 기타 이익적인 면에서는 좋은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일과 삶 속에서 적절하게 자신의 위치를 바로잡기 위해 긴 시간을 쏟는다. 그 속에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찾진 못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가 계속하지 않았던 일은 끝까지 하지 않을 거라는 습관을 인지한다. 좋고 싫음보다 중요한 건, 내가 무의식적으로 무엇을 선택하고 사는지를 깨닫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기 휴직은 삶이란 장기 레이스에서 값는 거름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이리저리 휘둘렸던 것은 내 중심이 얕았기 때문이다. 할 말을 할 수 있어야 했다. 원한다면 화도 낼 수 있어야 했다. 화를 내지 않더라도 남을 의식해 참는 게 아니라 내 선택으로 결정했어야 했다. (p. 43)

 

 

그녀가 말하는 용기는 적절한 때에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 마음이 원하는 쪽으로 직진하는 선택이다. 아프면 참지 말고 쉬고, 누가 뭐라고 하지 않으면 가만히 있고, 알차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여유를 적절히 분배하는 것은 일상의 관습을 새로 정립해 나가는 일이다. 균형과 이를 유지할 힘. 그것이야말로 직장에 에너지를 뺏기지 않는 법이다.

 

 

 

이제는 구체적인 직장, 직업과 직무보다 사는 방식과 가치관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남들의 도장을 받는 게 아니라 내가 나에게 잘했다고 도장 찍어주는 삶, 남들이 좋아해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삶으로 한 발짝 걸음을 옮기고 싶다. (p. 259)

 

 

이 책은 여타 다른 퇴사 그 이후의 삶을 다룬 에세이와 달랐다. 안정을 바탕으로 살아온 사람이 흔들림을 경험하면서 퇴사보다 덜 위험한 휴직을 택하며 균현, 선택, 용기,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다움을 거창하게 바라보기보다는 지금의 흔들림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보는 시각이 좋았다.

 

 

나는 직진 중이다. 처음의 용기에선 풋내가 났지만 다음의 용기는 그윽한 향을 내고 싶다. 그렇게 쓸 것이라고 오늘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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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
김미향 지음 / 넥서스BOOKS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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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가족은 평안하신가요?"

 

가족 내에 문제가 많은데 별 탈 없이 유지되고 있다면 필시 누군가의 희생이 존재한다. 대개 그 희생은 부모님인 경우가 많고, 엄마인 경우는 더더욱 많다. '엄마~'하고 마음을 담아서 불렀던 적이 까마득해진 나는 이 책을 읽고 다시 엄마란 여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의 엄마도 저자의 엄마처럼 희생만 하였기에, 좋은 시절 못 누리고 자식들을 반듯하게 키우기 위해 따뜻한 손길보다는 차가운 생계로 내몰렸던 사람이기 때문일까. 책을 읽는 내내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책장을 쉬이 넘기기 어려웠고 몇 번이고 읽기를 포기했다. 그만큼 저자의 엄마, 그리고 이 시대의 엄마 그리고 가족이란 공동체가 가진 상처의 흔적을 되짚는 건 타인의 삶을 내 삶으로 가져와 경험하는 것과 같다.

 

저자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 그녀를 추억하며 뒤늦은 후회와 그리움을 글로 풀어낸다. 엄마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어서야 깨닫는 잔혹한 진실들, 살아계실 때 살뜰히 대하지 못한 지난날의 냉소와 차가움, 단 한 번이라도 엄마의 말에 지지와 격려를 보내지 못한 회한은 파도처럼 밀려와 살을 에는 고통을 느끼게 한다. "엄마는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나를 환영해준 손길이었다."라는 말에 울컥한 건, 새 생명을 지키고자 했던 그녀의 처음은 또 다른 처음을 포기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말로는 늘 엄마 편이었다. 그러나 막상 엄마 편을 들어야 할 상황이 오면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다. 그것은 엄마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고, 중립적인 척하는 나 자신의 위선 때문이기도 했다. 엄마를 떠나보내고 나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엄마가 원하던 바로 그 순간에 엄마 편을 들지 못한 거였다. 그래서 나는 이제 작정하고 엄마 편이 되기로 했다. (p. 6)

 

책은 총 3부로 나누어져 1부는 돌아가신 엄마가 꿈에 그녀를 찾아오는 이야기, 2부는 죽음 이후에 가족이 겪는 상실과 이를 이겨내는 이야기, 3부는 엄마라는 칭호가 아닌 여자 정숙 씨의 이야기를 한다. 그중, 꿈에 나타난 엄마 이야기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읽어야 할 정도로 슬펐다. 꿈을 꾸면 엄마를 볼 수 있어서 좋지만 꿈을 깨면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실감을 온몸으로 경험해야 했던 저자의 모습이 계속 등장하기 때문이다.

 

나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 내가 고통에서 헤어났으리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아직도 깊은 터널 속에 있다. 그 터널의 어두움은 터널에 있어 본 이들만이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쉽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상실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무섭다. 나는 이제 다시는 누구의 고통도 섣불리 재단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p. 71)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결코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동안은 삶을 동력으로 살아왔지만 이젠 죽음을 옆에 끼고 살아간다. 죽음은 삶과 함께 불시착할 수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게 된다. 나도 외할아버지 부고가 그랬다. 내가 슬픈 건지 아닌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나를 둘러싼 공기는 이전에 느꼈던 것과 매우 달랐다.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한 엄마를 바라보는 딸인 나, 남편을 보낸 외할머니으 눈물, 그가 남기고 간 삼촌, 이모들 그리고 화장터에서의 마지막 인사. 검은 상복을 입은 어색한 내가 아직은 해맑은 동생들을 케어하고, 상실과 무력감으로 뒤덮은 나의 엄마와 가족을 바라보는 일은 지금 떠올려도 숨이 턱 막힌다. 그래서 섣불리 그녀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죽음은 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생의 우울과 폭력, 나이듦과 병듦, 장애와 학대, 냉대와 모멸, 지척에 있는 죽음과 그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는 남겨진 이들의 삶, 그리고 누군가의 딸이자 누이이자 아내이자 엄마이자 여성이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 존재 그 자체인, 우리 곁의 가장 소중한 누군가를... 그래서 나를 비롯해 엄마 곁의 사람들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퇴근 후 조용한 내 방에서 남겨진 사람들에 대해 쓰는 일은 쉽지 않았으나 그 글을 쓸 때만큼은 엄마가 곁에 있는 듯했다. (p. 195~196)

 

그녀의 어머니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태어나자마자 차별이란 세상의 시선을 견뎌야 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딸이란 이유로 각종 권리를 박탈당했고 삶을 옥죄는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혼을 했지만 폭력을 감내해야 했다. 어린 생명을 희망으로 여기며 살아내고자 했지만 세월이 가져다준 우울과 늙고 병들어 가는 육체 앞에서 결국 해방되지 못했다.

 

독자인 나도 감히 행복을 입에 올릴 수 없었던 이야기를 딸인 저자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했을까. 자신처럼 딸은 살지 않길 바라며 필사적으로 저항해왔을 보이지 않는 노력은 누가 알아주어야 할까.

 

누군가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계다. 하지만 경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도저히 다신 겪고 싶지 않은 과정이며 삶의 덧없음을 마주함과 동시에 또 소중한 사람을 잃을까 불안해하는 지옥이다. 어렵사리 마지막 장을 넘기며 내 생명을 빚진 엄마에게 거창한 효도가 아닌 사소한 효도를 자주 해야겠다고 느꼈다. 엄마가 같이 가자고 하면 가고, 때론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웃고 있다면 같이 웃고, 힘들어 보이면 돌림노래 같은 사연이라도 처음인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일. 미래에 하는 후회는 이런 것들을 제대로 못해드렸다는 것일테니까.

 

"엄마는 행복하지 않았어"라는 말보단 "엄마는 네가 있어서 그나마 행복했어"라고 말해주었으면 하니까. 그게 나에게도 행복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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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이다 임마 - 오늘을 버텨내는 우리들에게
장성규 지음, 이유미 그림 / 넥서스BOOKS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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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기운이 축축 처졌다. 오늘을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서 버티는 것만이 답인 걸까 물음표가 주위를 뒤덮어 다짐을 하기 어려웠다. 그럴 때, 눈에 들어왔던 <내 인생이다 임마>. 이 때다 싶어 책을 들고 멀리 바람 쐬러 나간 웅성거림이 가득 쌓인 카페에서 순식간에 읽어나갔다. 마음 한구석이 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꾸임 없이 솔직한 장성규 아나운서의 글은 TV에서 보는 이미지와 확연히 달랐다.

 

내가 장성규 아나운서를 알게 된 건, JTBC <아는 형님>이다. 장티쳐란 별명으로 패널들을 쥐락펴락하고, 뜻밖의 분장으로 망가지는 모습을 보며 엄청 웃긴 아나운서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뉴스도 진행했고, MBC 신인 아나운서 발굴 프로그램이었던 <신입사원>에서 최종까지 갔었다니. 과거의 스펙에 여러 번 놀랐다. 그뿐이 아니라 대범하고 용기 있는 인싸 기질의 사람인 줄 알았는데 소심하고 팔랑귀에 방송 울렁증까지 있다고 한다. 학창 시절에는 따돌림도 당하며 자존감도 많이 낮았다는 이야기를 읽는데 그는 순수한 노력파 인싸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절망에 갇혀 있지만은 않았다. 자신을 괴롭혔던 친구만큼 아끼고 도와주는 친구도 있었다고 말할 만큼 주위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런 그의 공감능력은 훗날 자신을 크게 위로해주는 친구를 선물해주기도 한다. 삼수 끝에 대학에 들어가고 회계 공부를 하며 이 길이 내 길인가 고민이 많던 이십 대 후반, 그는 자신의 방향을 크게 유턴한다. 차마 입 밖에 꺼내진 못했지만 겉으로는 하고 싶어 안달 난 일, 그건 "넌 그거 되게 잘할 것 같은데?"라고 인정을 받으면 불씨처럼 살아날 숨은 열정이었다. 그건 바로 아나운서! 그의 은사님도, 친구도, 친척도 모두 아나운서 하면 잘 할 것 같다고 한 번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언을 건넨다. 그렇게 시작한 아나운서의 길은 용기를 내보게도 해주고, 나란 사람을 성장시켜 주는 고마운 업이 된다.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지 못해도 당장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자책하면서 후회하지 않았으면 한다. 또, 먼 미래가 아닌 현재를 보며 무엇으로 행복을 채울 수 있을지 고민하고 찾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지도 본능적으로 알기를 바란다. (본문 중)

 

 

꿈에는 늦은 나이가 없다. 그럼에도 우린 나이를 걱정한다. 당연히 암묵적인 제한이 존재한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 생각까지 지배된다. 그도 그랬다. '아나운서를 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인가?', '여기서 실패하면 나는 어쩌지?' 하는 보편적인 고민이 드러난다.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주어진 일에서 최대한의 행복을 찾으려 할 것! 나이란 고민은 절대 해결되지 못한다.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래서 <신입사원>이란 프로그램에 나간다. 매주 자신만의 끼를 뽐낸다. 그간의 무대 경력과 그만의 관종 능력(?)으로 대중을 휘어잡는다. 그렇게 각인된 이미지는 JTBC에서 알아주었고, 자신을 불러주는 프로그램에 최선을 다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해주었다. 노력과 최선, 중요하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이를 표출해내는 사람이 있지만 그 틈에서 "행복함"을 드러낸다면 그건 또 다른 경쟁력이 아닐까?

 

 

 

주제 파악은 나중에 천천히 해도 된다. 출발이 느리다고 전전긍긍하지 말자. 나의 답답함이 책을 읽으며 느슨해진 건, 내가 가진 고민은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민은 고민대로 놔두고, 나는 내가 가야 할 길만 바라보면 된다. 움직이고, 도전하다 보면 그게 꼭 원하는 결과가 아니어도 기회는 뜬금없이 손을 내밀 테다. 결국 한 방송사의 간판 아나운서가 되고 "장성규"란 브랜드를 만들어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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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앨리 스미스 계절 4부작 1
앨리 스미스 지음, 김재성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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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악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다. 다시. 세상이란 그런 것. 모든 것이 무너진다.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p. 13)

 

어느 날, 해안가에 노인이 떠밀려 올라온다. 그 노인은 몇 년 전, 난민 아이와 겹쳐지며 소설이 앞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최악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인 영국을 살아가는 엘리자베스는 브렉시트 이후에 벌어진 사회의 문제가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경제뿐만이 아니라 거리에는 타국에서 온 사람들을 멸시하는 고성이 오가고 이웃을 경계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자주 묘사된다. 찬성과 반대 어느 쪽도 확실히 우세하지 않았던 영국의 선언은 속았다는 떨떠름한 기분을 국민들에게 얹어줬다.

 

매일 아침 그녀는 어쩐지 속아 넘어간 것 같은 기분으로 잠에서 깬다. 그러면 어느 쪽에 투표했든 속았다는 기분으로 일어나는 사람이 온 나라에 몇 명이나 될까 하는 것으로 생각이 이어진다. (p. 256)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교차해 지나며 엘리자베스와 대니얼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웃을 인터뷰하라는 숙제를 받고 엘리자베스는 근처에 사는 노인 대니얼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는 늙은 호모라는 소문이 있다면서 그녀의 엄마 웬디는 둘의 만남을 가로막는다. 그에 굴하지 않고 엘리자베스는 대니얼을 만나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점차 예술과 삶, 가치관을 형성해 나간다. 장차 그녀가 미술강사로 자라게 된 건 대니얼의 영향이다. 그는 어린 소녀에게 다채로운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정신적 교감을 나누어서일까. 엘리자베스는 그가 요양원에서 잠만 자도 매번 찾아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상을 만들어 내는 건 아무 의미 없어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실제 세상이 이미 있으니까요. 그냥 세상이 있고, 세상에 대한 진실이 있어요.

네 말은 그러니까 진실이 있고 그것의 가짜 버전이 따로 있는데 우리는 그 가짜를 듣고 산다는 거로구나. 대니얼이 말했다.

그게 아니라 세상은 실재해요. 이야기들은 만들어지고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덜 진실인 건 아니지. 대니얼이 말했다.

그건 초강도 헛소리에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만들어 낸단다. 대니얼이 말했다. 그러니까 늘 네 이야기의 집에 사람들을 반겨 맞으려고 해 보렴. 그게 내 제안이다. (p. 158)

 

어린 엘리자베스가 타인과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할 때, 그는 사람을 반기라는 말을 해준다. 엘리자베스가 누군가를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품게 해준 건, 대니얼의 힘이었다. 오히려 혐오와 분노가 주가 돼버린 차가운 세상 속에서 그래도 엘리자베스가 버티며 살아간 건, 그와의 우정 때문이다. 대니얼의 하루가 행복한 꿈만 꾸는 수면기였을 때도 그를 찾아가 매일 책을 읽어주고 병원 직원과 꽉 막힌 대화를 반복한 건, 이런 사회이기에 사랑이 필요하고 사람이 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이야.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조금 아는 이들이 우리를 제대로 보았기를 바라야 해. 다른 건 결국 별로 중요치 않아. 대니얼이 말했다. (p. 210)

 

엘리자베스 주변은 답답하다. 우체국에선 여권 사진이 규격에 맞지 않다고 계속 반려하고, 이웃들은 늘 분노에 가득 차 있다. 성소수자와 여성을 혐오하고 난민 문제로 자국민이 아니면 "꺼져!"라고 길거리에서 냉혹하게 소리친다. 나도 어디까지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너도 나도 모두 인간이기에 고정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녀의 엄마가 대니얼을 호모라고 기피했지만 자신의 동성 연인이 생겨 사랑을 나눈 것처럼. , 영국으로 망명을 신청해 건너온 청년들의 재정 지원을 삭감한다는 발표가 나자 기압계를 울타리에 던진 것처럼. 전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변했으니까.

 

영국만이 이러한 혼란을 겪고 있을까? 난민 문제는 제주도에서 이미 현실이다. 여성 혐오는 강력한 목소리가 시작됐다. 성소수자들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람들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관료주의를 답답하게 여기기 시작하면서 조직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다. 최악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불안한 현실에서 봇물 터지듯 공동체는 변모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친애하는 대니 오빠, 문제는 결국 우리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보고, 할 수 있다면 또렷하게 볼 수 있을 때 절망하지 않고 가장 적절하게 대처하기로 어떻게 선택하느냐야. 바로 그거야.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타인에게 하는 부정적인 행위들을 우리가 어떻게 선택하느냐야. 희망은 바로 그거야.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타인에게 하는 부정적인 행위들을 우리가 어떻게 다루느냐. 그것뿐이야. 그들도 우리처럼 모두 인간이라는 것을, 사악한 것이든 정당한 것이든 인간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이질적이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세상에 눈 깜짝할 순간만 머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런데 그 눈 깜짝할 순간은 다정한 윙크일 수도 있고 자발적인 무지일 수도 있는데 자신이 두 가지다 가능한 존재임을 우리는 알아야 해. 그리고 악이 턱까지 차 있다 해도 그 너머를 볼 준비를 해야 해.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아주 잘 아는 친애하는 오빠의 따뜻하고 매혹적이고 쓸쓸한 영혼을 향해 직접 말하려고 해.) 시간, 우리의 시간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 그것을 허비하지 않는 거야." (p. 247)

 

속는 기분이 든다면 이 때문이 아닐까. 잊지 말아야 할 자명한 사실, 그건 우리가 혐오하는 대상도 인간이란 것이니까. <가을>이란 제목이 붙은 건, 마치 대니얼의 모습처럼 우리도 곧 시들해져 겨울이 될 것이란 생각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기에 남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옳고 그름의 선을 잘 구축해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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