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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ㅣ 앨리 스미스 계절 4부작 1
앨리 스미스 지음, 김재성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악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다. 다시. 세상이란 그런 것. 모든 것이 무너진다.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p.
13)
어느 날, 해안가에 노인이 떠밀려 올라온다. 그 노인은 몇 년 전, 난민 아이와 겹쳐지며 소설이 앞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최악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인 영국을 살아가는 엘리자베스는 브렉시트 이후에 벌어진 사회의 문제가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경제뿐만이 아니라 거리에는 타국에서 온 사람들을 멸시하는 고성이 오가고 이웃을 경계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자주 묘사된다. 찬성과 반대 어느 쪽도 확실히 우세하지 않았던 영국의 선언은 속았다는 떨떠름한 기분을 국민들에게
얹어줬다.
매일 아침 그녀는 어쩐지 속아 넘어간 것 같은 기분으로 잠에서
깬다. 그러면 어느 쪽에 투표했든 속았다는 기분으로 일어나는 사람이 온
나라에 몇 명이나 될까 하는 것으로 생각이 이어진다. (p.
256)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교차해 지나며 엘리자베스와 대니얼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웃을 인터뷰하라는 숙제를 받고 엘리자베스는 근처에 사는 노인 대니얼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는 늙은 호모라는 소문이 있다면서 그녀의 엄마 웬디는 둘의 만남을
가로막는다.
그에 굴하지 않고 엘리자베스는 대니얼을 만나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점차
예술과 삶,
가치관을 형성해 나간다. 장차 그녀가 미술강사로 자라게 된 건 대니얼의 영향이다. 그는 어린 소녀에게 다채로운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정신적 교감을 나누어서일까. 엘리자베스는 그가 요양원에서 잠만 자도 매번 찾아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상을 만들어 내는 건 아무 의미 없어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실제 세상이 이미
있으니까요. 그냥 세상이 있고, 세상에 대한 진실이 있어요.
네 말은 그러니까 진실이 있고 그것의 가짜 버전이 따로 있는데
우리는 그 가짜를 듣고 산다는 거로구나. 대니얼이 말했다.
그게 아니라 세상은 실재해요.
이야기들은 만들어지고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덜 진실인 건 아니지.
대니얼이 말했다.
그건 초강도 헛소리에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만들어
낸단다. 대니얼이 말했다. 그러니까 늘 네 이야기의 집에 사람들을 반겨 맞으려고 해
보렴. 그게 내 제안이다. (p.
158)
어린 엘리자베스가 타인과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할 때, 그는 사람을 반기라는 말을 해준다. 엘리자베스가 누군가를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품게 해준 건, 대니얼의 힘이었다. 오히려 혐오와 분노가 주가 돼버린 차가운 세상 속에서 그래도 엘리자베스가 버티며 살아간
건,
그와의 우정 때문이다. 대니얼의 하루가 행복한 꿈만 꾸는 수면기였을 때도 그를 찾아가 매일 책을 읽어주고 병원 직원과 꽉
막힌 대화를 반복한 건, 이런 사회이기에 사랑이 필요하고 사람이 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이야.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조금 아는 이들이 우리를 제대로 보았기를
바라야 해. 다른 건 결국 별로 중요치 않아.
대니얼이 말했다. (p.
210)
엘리자베스 주변은 답답하다. 우체국에선 여권 사진이 규격에 맞지 않다고 계속 반려하고, 이웃들은 늘 분노에 가득 차 있다. 성소수자와 여성을 혐오하고 난민 문제로 자국민이 아니면 "꺼져!"라고 길거리에서 냉혹하게 소리친다. 나도 어디까지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너도 나도 모두 인간이기에 고정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녀의 엄마가 대니얼을 호모라고 기피했지만 자신의 동성 연인이 생겨 사랑을 나눈
것처럼.
또, 영국으로 망명을 신청해 건너온 청년들의 재정 지원을 삭감한다는 발표가 나자 기압계를 울타리에 던진
것처럼.
전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변했으니까.
영국만이 이러한 혼란을 겪고 있을까? 난민 문제는 제주도에서 이미 현실이다. 여성 혐오는 강력한 목소리가 시작됐다. 성소수자들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람들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관료주의를 답답하게 여기기 시작하면서 조직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다.
최악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불안한 현실에서 봇물 터지듯 공동체는 변모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친애하는 대니 오빠, 문제는 결국 우리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보고,
할 수 있다면 또렷하게 볼 수 있을 때
절망하지 않고 가장 적절하게 대처하기로 어떻게 선택하느냐야. 바로 그거야.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타인에게 하는 부정적인 행위들을 우리가 어떻게
선택하느냐야. 희망은 바로 그거야.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타인에게 하는 부정적인 행위들을 우리가 어떻게
다루느냐. 그것뿐이야. 그들도 우리처럼 모두 인간이라는 것을,
사악한 것이든 정당한 것이든 인간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이질적이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세상에 눈 깜짝할 순간만 머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런데 그 눈 깜짝할 순간은 다정한 윙크일 수도 있고 자발적인
무지일 수도 있는데 자신이 두 가지다 가능한 존재임을 우리는 알아야 해. 그리고 악이 턱까지 차 있다 해도 그 너머를 볼 준비를 해야
해.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아주 잘 아는 친애하는 오빠의 따뜻하고 매혹적이고 쓸쓸한
영혼을 향해 직접 말하려고 해.) 시간, 우리의 시간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 그것을 허비하지 않는
거야." (p.
247)
속는 기분이 든다면 이 때문이 아닐까. 잊지 말아야 할 자명한 사실, 그건 우리가 혐오하는 대상도 인간이란 것이니까. <가을>이란 제목이 붙은 건, 마치 대니얼의 모습처럼 우리도 곧 시들해져 겨울이 될 것이란 생각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기에 남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옳고 그름의 선을 잘 구축해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