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리고 사랑하고
현요아 지음 / 허밍버드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폐허가 된 현실에 질식할 것 같을 때, 브런치에서 '불행 울타리 두르지 않는 법'을 만났다. 당시 나는 심한 불안 및 우울장애와 불면증으로 매일 악몽에 시달리는 상태였다. 이 글은 살얼음을 걷듯 조심스럽게, 매만져야 하는 마음을 그려내며 내게 큰 위로를 건넸다.


이 책은 동생을 떠나보낸 사별자가 자신의 아픔을 면밀히 해석하고 해독하는 대항해의 여정을 담았다. 자책감과 죄책감으로 얼룩진 나를 어루만지며, 자기연민으로 가득 찬 '불행 울타리'를 벗어나는 과정을 말한다. '1장 일상 사별자의 품'에선 동생의 죽음을 애도하고, '2장 불행 울타리 두르지 않는 법'에선 우울과 불안 속에서 흐트러진 일상을 정리하며, '3장 우리는 지금 살고 있군요'에선 나의 상처에서 타인의 아픔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래도 글로 마음을 풀어낼 수 있다는 건 무기력에서 빠져나오셨다는 걸까요?" 질문을 받을 수 있겠지만, 아직 그 굴레에서 완전히 도망치지 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당최 감이 잡히지 않고, 기껏 목표를 잡았다 해도 얼마나 갈지 모르겠다. 모르는 순간에는 억지로 답을 찾겠다며 자신을 괴롭히기보다 허심탄회하게 모르겠다고 소리를 지르는 쪽이 홀가분하다. 몰라, 몰라, 모르겠다고.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은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못난 사람의 눈치를 보며 본인을 갉아먹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 나를 괴롭히던 직장에 사직서를 쓰고 나왔다.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 가끔 이성을 찾을 때면, 일상을 깨뜨린 주범을 꼬집기보다 깨진 일상 위에서 발이 다치지 않게끔 걸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작업을 고민한다. p. 64~65


저자의 생활은 완벽히 복구되진 못했지만, 상실로 인한 절망을 담담하게 풀어내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기록을 남긴다. 저마다의 고통을 존중하고 살아있는 존재들의 가치를 조명하는 문장들은 삶의 어둠을 희미한 빛으로 물들인다. 


아픈 날이 훨씬 많은 인생이지만 그럼에도 웃을 만한 순간은 반드시 있었다. p. 113


고통을 벗어난 저자는 웃기도 하고 희망도 품으며 자잘한 행복을 느낀다. 때론 좌절과 회한이 밀려와도 잠시 절망할 뿐, 내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아팠던 마음도 시간의 힘에 옅어지는 걸 경험한다. 정신을 차리니 나 자신을 잃어가면서까지 지켜야 할 것은 없단 걸 깨닫는다. 조금이라도 상황이 나아지면 회복은 더디게라도 찾아왔다.


가끔은 애도하며 슬퍼하다가 일상에서는 작은 것을 보며 행복해하는 이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자살 유족이 아닌 일상 사별자의 품으로 오니 세상이 한 뼘 더 넓어졌다. (p. 83)


어쩌면 당신이 가장 먼저 당신의 몫을 덜고 타인을 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버티는 날이 모이면 언젠가는 버티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겠지. 적당한 낙관을 잃지 않은 채 이성을 차리고 지금을 직시한다. (p. 205)


세상은 마냥 냉혹하지 않다고, 어둠이 존재하는 만큼 빛 역시 공존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세상이라는 유리에 부딪혀 기절했을 때는 어둠만 있는 줄 알았는데, 눈을 감은 채라 내 앞에 누군가 따뜻한 물을 준비해 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p. 224)


나도 그녀에게서 용기를 얻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두웠던 과거의 나를 회상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지만, 활자로 적힌 감정들이 그때만큼 아프지 않다는 걸 느끼고 있다. 우린 혼자가 아니다. 곁이 필요한 사람에게 먼저 다정한 손길을 내밀자. 살리고 사랑하는 일은 언제라도 가능하니까.


당신이 유리에 부딪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 당신을 찾지 못했던 것이지, 상처를 조금만 열어젖혀도 사람들은 당신의 곁에 머물며 기꺼이 우물을 내보일 테니. 우리에게는 모두 우물이 있음을 잊지 말아 주기를. 물론 당신에게도 말이다. p. 225~2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도 디지털 노마드로 삽니다 - 우리의 배낭처럼 가뿐하고 자유롭게
김미나 지음, 박문규 사진 / 상상출판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안정이 고정값인 사회다. 평생직장은 사라지고 당장 내일의 내 모습조차 예측되지 않는다. 김미나, 박문규 부부도 비슷했다. 어려운 형편에 일찍이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울음을 삼키며 월급을 기다리는 팍팍한 직장인이 되어갔다. 유일한 즐거움은 주말마다 떠나는 여행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전국을 쏘다니며 블로그에 추억을 기록한다. 이 기록이 부부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도 모른 채.




여행자의 삶이 시작되다



퇴사 후 떠난 해외여행은 고생한 자신들을 위한 선물이었다. 풍족한 형편은 아니어도 자유가 눈앞에 있어 즐겁기만 하다. 때론 의욕에 앞서 몸이 상하기도 하고, 귀국 후 거취에 막막해졌지만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으려 더욱 여행에 집중한다.


그렇게 여행은 8년째 이어진다. 취미로 운영한 메밀꽃부부 블로그로 여행 콘텐츠 의뢰가 들어오며, 좋아하는 여행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된 것이다. 꿈꾸던 삶의 초석은 기록으로 다져졌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는 비단 먹고사는 문제는 아니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방식으로 삶을 대하며 살아가면 좋을까. 여행하며 느꼈던 이 가뿐한 기분을 잃지 않고, 여행하듯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우리만의 행복을 찾아 재밌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무엇보다 컸다. p. 53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었어도 힘든 점은 있다. 여행 특성상, 항상 움직여야 하니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빠듯한 마감을 처리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터무니없는 금액을 제안 받거나 덤터기를 쓰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10kg 남짓 배낭에 살림살이를 이고 져야 하니 비움을 생활화해야 한다. 그런데도 여행을 계속하는 이유는 즐겁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일을 그냥 좋아하는 것으로 남겨둘 것인지, 덕업일치를 끝내 이루어낼 것인지는 결국 내 선택에 달려있다. 그러니 내 마음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며 하고 싶은 일을 손에 꼬옥 쥐고 있다가,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가고자 하는 방향을 정하면 되지 않을까? 혹시 가다가 이 길이 아닌 것 같다 싶으면 그때 가서 다른 길을 찾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 p. 122




삶은 수많은 선택의 여행



어떤 선택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삶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해서, 무모하게만 보이던 선택 덕에 여행하는 삶이 조금씩 만들어졌다. p. 35


인생은 '내 생각대로 될 거'라는 오만함에서 벗어나는 여행 같다. 철저하게 세운 계획일지라도 한순간에 무너지기 일쑤니까. 코로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하늘길이 막히자 부부는 제주로 내려가 '일상 여행'을 시작한다. 고요한 시골에 집을 빌려 창밖의 변화를 관찰하고 산책하고 일한다.


​평범한 일상이 그리워지자 여행 강연과 사진 전시회를 통해 추억을 공유한다. 여행은 길 위의 순간만이 아니라 지나온 모든 선택이 만든 길 속에 있었다. 방향을 잃지만 않는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결국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그 길을 통해 배웠다. 목적지보다 더 중요한 건 길 위에서의 시간이라는 것도(p. 58). 우리는 무수한 삶의 선택지 중 몇 가지를 택해 살아가는 여행자였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는 없더라도 애쓰고 버티기만 해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하는 이유, 돈 버는 이유, 열심히 사는 이유로 결국은 즐거운 내 인생을 위해서니까. 재미가 있어야 한다. 사는 재미, 먹는 재미, 노는 재미, 일하는 재미 같은 여러 가지 재미들이. p. 177




메밀꽃부부가 생각하는 '진짜 여행'



“여긴 상업적으로 변해 별로다”, “여긴 굳이 갈 필요가 없다”, “거길 도대체 왜 가는지 모르겠다” 같은 말에 부부는 직장인 시절 4박 5일 휴가를 떠올린다. 1년에 한 번뿐인 휴가를 망치기 싫어서 계획된 여행을 했어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여행은 다녀온 뒤 그 힘을 발휘한다. 힘들 때마다 꺼내 먹는 초콜릿처럼, 당분이 되어준다.


패키지 여행이든 SNS용 사진을 건지기 위한 여행이든 호캉스이든 이러나 저러나 모두 각자의 여행이고 각자의 소중한 추억이다. 진짜 여행을 하기 위한 가이드라인 같은 것은 당연히 없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여행하고, 즐거웠다면 그 자체로 좋은 여행이다. 여행에는 정답이 없으니까. (p. 90)


여행엔 권리가 없다. 여행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으니 그곳으로 떠날 뿐이다. 지쳐서 떠나온 여행이니까, 쉬러 온 곳에서까지 눈치 주진 말자고 부부는 말한다.


뭘 좀 엉망으로 했다고 해서 나까지 망한 건 아니니까, 다음에 조금 더 잘 해보면 될 일이다. ‘좀 못할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 뭐. 하지만, 딱 한 번만 다시 해볼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p. 244





코로나 변이바이러스가 다시 퍼지며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다. 겨우 되찾은 일상이 다시 멈추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평범한 일상은 당연하지 않다. 저자의 삶처럼 무수한 변수와 선택으로 나라는 여행을 여러 해째 하는 중일 테다. 지금의 변수가 악수(惡手)가 되지 않길. 새로운 여정은 평온하길 간절히 빈다.



​어떤 결정을 할 때 필요한 용기는 그 결정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후에 만일 내가 생각했던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지 않더라도 

삶을 책임지겠다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게 마음먹은 대로, 내가 생각한 대로 쉽게 되지만은 않으니까. 

맨땅에 헤딩할 수 있다는 마음과 어떤 결과가 오든 

일단 하루를 잘 살아보자는 마음가짐, 


어쩌면 그게 용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p. 26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토리만이 살길 - 콘텐츠 전쟁에서 승리하는 27가지 스토리 법칙
리사 크론 지음, 홍한결 옮김 / 부키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매일 들여다보는 핸드폰 화면에는 이야기가 넘쳐난다. 해시태그를 꼬리표처럼 달고, 세계 곳곳으로 퍼져가는 개인의 일상에는 그날의 감정, 장소, 맛집, 문화, 사람들이 녹아있다. 하지만 이들을 콘텐츠라 말하진 않는다. 나를 포함한 우리를 아우르는 추억이 되면 그제야 콘텐츠라 불린다. 단순 게시물이 콘텐츠가 되는 데 필요한 마법, 스토리텔링은 여기서 등장한다.

스토리텔링은 대중의 편에서 서사를 구현해 콘텐츠의 차별화를 꾀한다. 이 책은 스토리를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저자 '리사 크론'은 분야를 총망라한 전문가답게 그의 노하우를 잘 알려진 성공사례에 적용, 독자가 실전 감각을 체득하도록 도움을 준다. 특히, 책의 절반을 '왜 인간은 스토리에 끌리는지'에 할애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1️⃣ 심리학의 관점에서 스토리를 바라보다

뉴욕 라과디아 공항의 대대적인 공사 안내방송으로 책은 시작된다. 당시 안내방송엔 이용객의 불편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공항 측 생각만이 담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자는 위 경험을 바탕으로 '올바른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스토리텔링은 단순한 사실 나열이 아니다. 사실에 스토리란 해석을 덧붙이는 작업을 뜻한다. 그 속에는 공항이 간과했던 '듣는 이'의 서사가 반영돼야 한다.

왜 인간은 스토리에 반응할까. 저자는 스토리가 인간의 본능과 관련이 있다며, 심리학의 관점에서 스토리를 설명한다. 그중 인지적 무의식에서 이유를 찾는다. '인지적 무의식'은 인간이 위험할 때, 레이더를 발동시킨다. 지루한 설명은 아무리 중요해도 흘려듣지만, 이를 짧은 드라마로 만들면 집중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즉, 생존에 필요한 자극은 '맥락 있는 자극'이고, 스토리는 지금까지 '생존 수단'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우리가 스토리에 귀 기울이는 목적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p.53)다. 어려움이 닥치거나 고민이 생겼을 때 또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마다 스토리는 원활한 결정을 돕는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스토리가 눈을 뜨도록 콘텐츠 제작자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스토리 심리학에서 발견한 접근법은 크게 4가지다.

1) 인간은 사실을 스토리로 '인격화'하면 주목한다.

2) 본능적으로 변화를 싫어하는 인간은 가르치려는 의도가 담기면 무시한다.

3) 취약점을 드러낸 주인공에게 인간은 공감하며 마음을 움직인다.

4) 인간의 선택에는 '타인의 시선'이 투영된다.


생전 처음 보는 방법은 없었다. 스토리에 현실을 반영한 요소들을 집어넣어 우회적으로 보여주면서 감정을 끌어내면 되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하되 눈앞에 대상이 없을 뿐이다. 그럼 막연한 대상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2️⃣ 스토리 구성 전략 A to z


화제된 콘텐츠에는 공통점이 있다. 특정 대상을 고려해 뻔하지 않은 방식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책에서 소개한 콘텐츠 사례들도 기존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서 거창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확실한 목표가 있었고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녹아 있었다.


저자는 어떤 내적인 깨달음이 외적인 변화로 이어지는 과정을 다룬 것이 스토리라고 정의하며, 궁극적 목표와 스토리가 요청하는 행동이 서로 다를 수 있다고 말한다. 예로 생리대 브랜드 '올웨이즈'의 <여자애처럼> 광고를 보여준다. 해당 광고는 고객을 확보하는 게 목표였지만, 취한 행동은 '여자애처럼'이란 말에 담긴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브랜드 언급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광고였지만,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표현뿐만 아니라 브랜드의 인식 개선에도 성공한다.


청중을 설득하려면 스토리를 통해 그 진실을 경험하고 확실히 느낄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p. 300). 이 광고는 대중이 잘못된 믿음을 경험하게 했고, 스스로 깨달을 기회를 주었다. 리사 크론은 스토리를 통한 '내적 변화'를 강조하는데, 이 역시도 확실하게 성공했다. 또한, 잘못된 믿음 → 진실 → 깨달음 → 변화'라는 스토리 구성 방식도 살펴볼 수 있었다. 그가 정의한 스토리 개념이 정확히 녹아들어 있는 문법이다.


저자는 끊임없이 '청중'을 강조한다. 확실한 대상 설정과 시선 처리, 그들이 처한 상황이 납득 가능한 흐름으로 이어지는 법까지. 방법 안에는 타인을 향한 관심과 애정이 드러난다. 심리학 관점에서 강조했던 스토리의 '인간화'는 여기서 연결된다. 목표 청중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들 특유의 논리로 생각할 때, 스토리는 개연성을 획득한다(p. 351).




스토리의 힘을 활용할 줄 모르는 사람은 스토리에 희생될 수밖에 없다. (스토리 생존 법칙 27)


오늘날의 이야기는 발견되어야 한다. 셀프 브랜딩을 한다면 '나를 어떤 이미지로 홍보할 것인지', 마케터라면 '우리 브랜드 히스토리는 어떻게 짤 것인지', 취업 준비생이라면 '내 경험과 경력을 어떤 스토리로 연결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비록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은 아니지만, 내가 기획한 스토리 안에서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아니, 되어야 한다.

한국 콘텐츠가 세계적인 인기를 끈 이유 중 하나는 스토리의 힘 덕분이다. 그만큼 스토리는 힘이 세다. 매일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선택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서사가 쌓여 층이 두터워지면 하나의 역사가 되고, 팬이 생기고 그들은 두툼한 더미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며 즐거워한다. 어쩌면 콘텐츠는 나를 응원하는 사람과 연결되기 위한 매개체가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스토리는 매력적인 세계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이틀이 필요할까 - 장재인 시선 집
장재인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흠잡을 때 없이 완벽한 글이 주는 쾌감도 있지만, 글쓴이의 투박한 솔직함이 매력적인 글이 있다. 『타이틀이 필요할까』는 후자다. 어딘가 두서없어 보이기도, 일기 같다가도 가사의 한 줄 같던 조각들은 하나둘씩 쌓여 지면을 가득 채웠다.


이미지를 좋은 쪽으로 이끌고 가는 일이 자신의 직업이라 밝힌 장재인은 글을 쓰며 자신과 제대로 마주한다. 자신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자기 연민은 없었다. 오히려 지하 끝까지 추락했던 감정부터 인사도 못 하고 떠나보낸 사람에 대한 그리움, 가족을 향한 미움과 기억에 대한 혈흔을 씻어내며 과거와 이별하고 미련을 거둔다.


반복의 반복도 더 나아지기 위한 반복이라면, 오롯이 내가 책임지고 있는 행동이다. 나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그 힘을 과거에게 쥐여주고 싶지 않다. 그것이 나를 힘들게 했던 과거라면 더더욱. (p. 36)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이렇게 쉬웠을 일을. 그런데 이제 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정말 드럽게, 인정하기 싫은 일이 하나씩은 있단 걸. (p. 285)


책에는 주어가 '나'인 글이 많다. 꿈과 현실 사이 간극에 실망하는 나, 업계의 부당함에 치를 떠는 나, 세상과 불화하던 나. 그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했다. 스물세 살의 장재인이 경험한 '생각 뭉텅이의 방'은 나의 스물한 살을 떠올리게 했다. 상황과 감정을 기록하며 흐려진 부분을 찾아내던 모습에선 내 지난 일기들이 생각났다. 마음이 바닥을 치며 자신을 스스로 낭떠러지로 몰아세우던 부분은 2년 전의 내 모습이 겹쳤다.


장재인은 지난한 담금질의 시기를 지나서야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잊고 있던 사실을 발견한다. 나는 나를 아주 아끼며 사랑하고 싶어 괴로웠단 것을. '나'라는 주체성이 장재인이란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가치이자 원동력이었음을.


나를 잃고 싶지 않다. 나를 거두어야 하는 타협 아래, 나의 용기를 절반으로 줄이고 싶지 않다. 이렇게 생각의 생각이, 나를 잃어버리게 만들 때면 피오나 애플의 음악을 듣는다. 내가 받았던 그 용기는 나를 다시 깨어나게 해준다. 


어떤 방향으로 가든, 어떤 장르의 음악을 하게 되든, 단 한 가지만은 잊지 말자, 잃지 말자. 나의 시작은 용기고, 나의 끝도 용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p. 200)



대체로 타협 없이 자신의 색을 밀고 나간 사람들이 그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장재인도 자신만의 방향, 자신만의 음악을 끊임없이 재정의한다. 앨범의 대표곡이자 자신을 대표하는 수식어를 뜻하는 타이틀을 제목에 사용한 것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나와 내 창작물은 타이틀이란 단어로만 표현할 수 없다. 앨범을 듣다 보면 타이틀 곡보다 더 마음에 든 수록곡을 발견하기도 한다. 타이틀이 아니어도 나는 그냥 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다채롭고 우린 그중 몇몇을 내보이며 살고 있으니 개의치 말고 하던 대로 가면 된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이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인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나'는 정말 알고 있으니까. (p. 113)




그들이 말하는 타이틀.

나는 그 모든 타이틀, 그 위에 있고 싶다.

그것들의 위에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건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알아내고 추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p. 330~3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꼭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 우리는 일요일마다 그림을 그리는 것뿐인데
아방(신혜원)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걱정 말아요. 

이렇든, 저렇든 우리는 멋질 거예요.

p. 155



내게 미술은 잘하고 싶지만 두려운 과목이었다. 꼭 반마다 그림 잘 그리는 애들이 있었고, 그 애들은 몇 번의 스케치만으로 그림을 완성했다. 나는 옆에서 잘 그린 그림을 힐끔 보다가 애꿎은 연필만 만지작거리며 수업을 마쳤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던 나는 소규모 그림 수업을 들었다. 평가하는 선생님은 없었지만 칭찬하는 선생님은 있었다. 여전히 칭찬은 '잘 그린 수강생'에게만 돌아갔다. 내겐 그저 미소만 짓던 선생님의 표정이 기억난다. 그 뒤로 미술을 잊고 살았다.



왜 빈 종이 앞에선 한없이 작아질까. 저자 아방은 미술 학원에 다니던 때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노란색 돌멩이를 그리던 이상한 애는 연필만 사용해 그림 그리고 싶은 고3으로 자랐고, 획일적인 학원의 교육방식이 싫어 '그림을 배우지 않은'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다. 그림 수업에서 아방은 뭘 가르쳐주지 않는다. 기술보단 보람을 느끼도록, 비판보단 칭찬을 쏟아내며 수강생을 다독인다. 좋아하는 감정만큼은 쉽게 망가지지 않도록.





"네 그림이니까 나한테 물어보지 마세요"의 숨은 뜻

뭐라고 할 사람 없으니 눈치 보지 마세요!


아방을 찾아온 사람들은 오랜 시간 꾸준하게 그림을 그려 나간다. 취미생활답게 긴장을 풀고 이 시간만큼은 마냥 즐겁게 지낸다. 그림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해내는 창작 활동이다. 사회에서는 온전한 내 몫이 없어도 그림은 하면 하는 대로, 되면 되는대로 나만의 것이 생긴다. 오랜 시간 꾸준하게 작업을 이어온 수강생들이 스케치북을 가득 채워 돌아갈 때면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도 뿌듯해진다.


​“하라고 해서 했어요. 그런데 하다 보니까 재밌었어요. 느는 게 보였어요. 느는 게 아니라, 하여튼 뭐가 보였어요. 사람 그리는 걸 두려워했는데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가장 중요한 건 그거예요.”


“내가 변하는 게 보여서 좋았어요. 처음보다 자신 있게, 또 빨리 그리게 되더라고요. 이제는 조금 더 단순하게 그려보고 싶어요.”


“별생각 없이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다 그리고 나니까 한 권이 전부 내가 좋아하는 맥주로 채워져 기분 좋아요. 이제 맥주는 다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p. 90


너는 재능이 없으니 그림 그리지 말라는 말로 상처받은 아기 새들에게 아방은 말한다. 재능이 없는 게 아니라 그림의 장점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수강생들은 보란 듯이 '반복이 주는 멋진 대가(p. 89)'를 실감한다. 빈 종이를 앞에 두고 고민하던 나는 사라지고 조금씩 자신감을 장착해간다. 그리는 재미를 알아버린 학생들이 실력도 쑥쑥 늘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긍정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았다.



약한 불씨로 살피는 것이 취미생활입니다

작고 소중한 나의 능력치



빈 종이 앞에 두고 고민하기보다, 무턱대고 그리다 보면 손이 자연스레 답을 찾아줄 때가 있다. 매일 어떤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제자리에 있는 것 같아도 꽤 큰 변화가 생긴다. 그 재미를 알았으면 한다. 게다가 노트와 펜만 있으면 되니 돈도 얼마 안 든다. p. 91


우리에겐 작지만 소중한 능력치가 있다. 취미생활은 귀여운 능력치를 눈치 안 보고 재미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취미도 '본격적으로' 하려는 사람들이 생겼다. 즐거워지려 하는 것인데 내 능력이 초라해서 발도 못 붙이는 이들이 '그냥 마음대로 하세요'란 말에 눈물을 흘린다.


바깥세상은 야수와 같다. 조그만 실수를 저질러도 나비효과처럼 뒤통수를 후려 갈기는 사건이 왕왕 생겨 좀처럼 마음대로 살게 내버려 두질 않는다. 게다가 삶에는 지우개도 없어서 그냥 고쳐 쓰고 덧칠하며 사는 거다. 작은 지우개로 박박 때를 밀어봤자 어차피 뚜렷하게 지워지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하지만 그림 세상은 다르다. 실수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에 안 들면 새 종이 펼치고 다시 그리면 된다. 인생에서 새 종이 꺼내려면 시간도 배로 들고 돈도 들 텐데 그에 비하면 종이 한 장은 얼마나 가벼운지. 처음에 당황하고 불안해하던 멤버들은 어느새 자기 지우개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채 집으로 돌아간다. p. 172


그림 세상에선 터무니없는 실수나 농담, 마음마저 내보여도 괜찮다. 그냥 우리는 일요일마다 그림을 그리는 것뿐인데 꼭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잖아' 같은 기대감(p. 60)만 가지면 된다. '다음엔 어느 방향으로 연필이 움직일까?' 호기심을 붙잡고 한 번 믿어보는 거다.





어떻게 그리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은 한 번도 빠짐없이 어떻게 살고 싶은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고로 작품을 하려면 내 삶을 잘 알아야 한다. 삶의 방향이 작품의 방향이 되고 삶의 색깔이 작품의 색깔이 된다. p. 252



일단 그리고 보면 내 생각과 방향을 읽을 수 있다. 모든 수강생이 잊고 있던 삶의 즐거움을 깨닫고 돌아갔다. 삶을 채색하는 작가도 마찬가지다. 나의 작품과 색을 잃지 않기 위해서, 나의 능력치를 그 누구보다 크게 인식하고 가꿔나간다.


다 읽고 나니 책장에 처박힌 새 스케치북이 생각났다. 더는 그림을 안 그리겠다고 마음먹은 뒤, 존재를 잊고 살았는데 이젠 무엇이든 그려볼 용기가 났다. 글도 무엇이든 쓰면 되는 것처럼 그림도 무엇이든 그리면 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