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존재
이석원 지음 / 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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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을 쓰라고 하면 자기 연민이 되기 쉽다. 내가 보기엔(때론 타인이 보기에도) 유독 힘든 일이 많았던 것 같고, 과정 안에서 상처는 곪아 터지기 일보 직전이고, 세상에 멋지고 잘난 사람은 많으니까 저절로 움츠러든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르다. 이석원 작가는 자기 연민보단 담담함을 택했다. 내용이 슬프고 아파도 그 이상 이하로 내몰리지 않는다. 그는 생각보다 이럴 수 있나 싶어도 그 나름대로 잘 살아갈 수 있다말한다. 

 

현실은 고통스럽고 꿈속의 사막은 달콤하다. 그렇기에 나는 사막을 꿈꾸는 노래를 짓고 부른다. 고통이 아니었던들 내게 평화로운 삶 같은 것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까. 생의 중요한 것들이 이처럼 고통 속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이 내겐 아직도 낯설게 느껴진다. (p. 93) 

 

 그에게 삶은 낯섦의 연속이다. 일기장에만 써놓고 절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사건들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럼에도 좋았다고 느꼈던 시간이 있는데 야속하게도 그리 길지 않았다. 마치 이렇게 계속 삶이 이어질 거란 티저 영상을 보여준 것 같다. 절망과 슬픔, 우울과 추억 속에는 지난날에 대한 후회나 그리움으로 점철되진 않는다. 어느 정도 삶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은 사람만이 보여주는 곁이 있다. 

 

누구나 자신에 대한 기대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실제로 오르기 어려운 산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세월이 필요하다. 그 깨달음을 스물다섯에 얻는다면 그건 바보 같은 일일 것이고, 서른이라 한들 속단이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마흔 언저리쯤 되면 반드시 포기하고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다. 그때가 되면 마지막 몸부림도 쳐보고 온몸으로 거부도 해보지만 결국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확인이다. 자신을 안다는 것. 그 잔인한 일 말이다. (p. 189)

 

 

생각의 여력이 없으면 지금 내가 쥐고 있는 것이 모두 끄나풀처럼 여겨진다. 얼마 전, 치러진 수능시험처럼. 그것이 내 인생의 전부이고 중대한 반환점으로 다가온다. 사실, 지나고 보면 그게 아닌데 말이다. '지나고 보면'이란 괴로운 전제가 깔려야만 별거 아닌 것이 된다. 보통이란 단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는 아직 보통을 겪어보지도 못했는데 보통이라고 보이는 사람들이 자꾸만 부러워지고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옹졸한 마음이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로망이란 어쩌면 단지 꿈꾸는 단계에서만 아름답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토록 바라던 많은 것들이 실제로 내 것이 되었을 때, 상상하던 만큼의 감흥을 얻었던 적은 많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중요한 건 이루어낸 로망보다는 아직 이루지 못한 로망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꿈을 품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p. 268) 

 

 풋내가 나던 20살에 읽은 이 책을 5년이 지나서 읽으니 그때 느끼지 못했던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알듯 말듯 해서 좋았던 문장이 알아서 공감되는 부분이 있달까. 각자 가진 보통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모두 그곳에 도달에 얻고 싶은 위안과 평화를 얻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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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날이야, 네가 옆에 있잖아 - 내 편을 기다리는 당신께
이규영 지음 / 넥서스BOOKS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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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한 러브스토리를 그림으로 그려 90만 인스타 팔로워를 가진 이규영 작가님의 신간 <좋은 날이야, 네가 옆에 있잖아>. 누군가를 사랑하며 갖게 되는 눈빛과 손길, 귀엽다 여기게 되는 사소한 습관과 축 처진 어깨를 다시 올려주고 싶은 마음. 사랑이란 감정이 주는 다정함과 따뜻함은 그림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삶 속에서 설렘과 이별은 공존한다. 그건 언제든 행복해지다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의 그림과 글이 많은 이들의 응원을 받은 건, 순간순간의 '좋아해'가 표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읽는 내내 '나도 저렇게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으니까. 곁을 내주는 사람에게 끌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어차피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어났으니

이것저것 쓸데없는 걱정, 고민하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마음껏 사랑하는 거다.

                   

어느 날 내 곁에 그 사람이 왔다.

좋은 걸 보면 먼저 생각나고 

힘겨움에 떠밀려 허우적댈 때 기대고 싶은 사람.

 

그 사람 때문에 사랑을 믿게 되었다.

 

 

 

우리에게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너와 내가 만나고부터 일어나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기는 좋은 일이나 좋지 않은 일도

너에게 혹은 나 개인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난 거야.

                   

그러니 앞으로 좋은 일들은 같이 좋아하고

안 좋은 일들은 같이 이겨 나가자.

 

아침 일찍 나가는 남편의 빈자리를 잠결에도 느끼는 아내의 마음과 그런 아내의 단잠을 방해할까 봐 조용히 나가는 남편의 마음. 갑자기 비가 내리는 날에 우산을 들고 마중하는 마음. 각자 개인의 인생에 중대한 결정을 하고 허탈해진 심정을 달래는 마음.

 

나란히 누워 팩을 하고 무서운 꿈을 꾸면 꼭 안아주고 뒤돌았을 때 항상 누가 있다는 든든한 사실은 지금을 버티게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좋은 것을 보려 애쓰게 되고 나를 위해 준 것이 고마워 나 역시 보답하고 싶게 하는 다정함은 사랑을 지속하게 만드는 마법 같다.

연인 사이에 '누가 더 힘들고 누가 더 희생하고 있지?'라는 의미도 답도 없는 생각을 해 봐야 고민만 깊어진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일이다. 나는 다시 귀찮음을 이겨 내고 아내가 씻으러 들어간 화장실 문고리에 수간을 걸어 둔다. '괜히 복잡하게 생각했구나.'

 

투병 중인 사람은 몸이 아프니 당연히 힘들 테고, 그로 인해 옆에서 자신을 걱정하며 고생하는 가족들을 보며 미안한 마음에 더 힘들고 아플 거다. 그리고 옆에서 지켜보는 사랑하는 사람들도 마음이 아프고 힘들 거다. 다만 그런 상황에서 더 힘든 사람이 누구인지를 논하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사랑하는 마음일 텐데. 힘들고 아픈 일을 겪을 때일수록 정말 중요한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엇이든 내가 가지려고 하면 힘들어지는 것 같다. 관계에 있어서는 더더욱.

서로가 좋다면, 사랑한다면, 곁에 있어주고 안아주고 싶다면 그러면 된다. 기대면 된다.

"옆에 있을게, 오늘은 그래야 할 것 같다." 마음 하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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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살아온 나에게 고맙다
김나래 지음 / 부크럼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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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삶을 오해하면서도 끝내는 이해하고 싶어 그 문들을 열고 닫은 흔적들을 여기에 옮겨 적습니다. 마지막 문을 닫고 나오며 그동안 살아온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작가의 말 中)

 

내가 가장 부러운 사람은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사람 그리고 많은 시간을 지나온 사람이다. 전자는 적당한 무심함을 삶에 적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서 후자는 겪은 일이 많아 적절히 체념할 줄 알아서 부럽다. 난 결국 내려놓는 법을 알고 싶은 복잡한 사람이라 힘들다.

 

인생을 함께 걸어온 나는 차근차근 돌아보는 이 책은 저자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했던 다짐과 약속들, 깨달음과 이해들을 엮고 있다. 지나갔으니 얘기할 수 있는 건, 지나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녀의 자서전을 읽은 느낌이다. 지난날은 이 글에 묶고 새로운 자서전을 써내려가기 위한 호흡이 느껴졌다.

 

지금의 나는 내가 되고자 했던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정확히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내가 되어야만 하는 그 사람이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 무엇을 꿈꾸었든지 간에 결국 나는 지금의 내가 되었음에 감사한다. (p. 122)

 

미국으로 훌쩍 떠나 몇 년간 흘러가는 대로 살면서 환경의 변화는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걸 몸소 깨닫는다. 학창시절 무심히 대했던 친구의 부고는 뒤늦은 후회를 하게 만든다. 부모님이 자신에게 해주셨던 관심과 사랑에 지금의 주체적인 내가 될 수 있어 감사한다. 어떻게 흘러왔든 지금은 결국 좋아하는 것들로 채운 하루하루를 살고 있음에 만족한다.

 

그녀는 자신의 발자취를 담담히 되짚는다. 부정한 생각들에 굴복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충실하기 위해 매듭짓는다. 나는 여전히 못하고 있는 것들이라 부러웠다.

 

매일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왜 이 일을 선택했고 왜 이 길을 가고 있는지. 인생은 무엇이고 나는 왜 살고 있는지. 또 인생은 내게 어떤 의미인지. 답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내가 이 질문들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나는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 답을 영원히 알 수 없을지라도 그런 시도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순간이 내게는 소중하다. (p. 132)

 

아직 난 만족하지 못해서 내가 나라서 감사하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여전히 이루지 못했고 그게 내 탓이든, 세상 탓이든 화의 대상이 불분명해서 불만도 많다. 그럼에도 결론은 나도 저렇게 되길 바란다. 나도 살아줘서 고맙다고, 스스로가 불안에 떨지 않고 확신에 차있길 바란다. 복잡한 일을 제쳐두고 읽어내려간 글은 조금이나마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나를 앞으로 잡아당긴다. 종종 오해하면서 끝내는 이해하고 싶은 인생이 던지는 질문에 목청껏 답할 수 있는 배짱이 생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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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 - 소설가 박완서 대담집
김승희 외 지음, 호원숙 엮음 / 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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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님이 별세하신지 어느덧 9년이 다 되어 간다. 다작으로 많은 글들이 있기에 다행이라고 생각될 만큼 아직 못 읽은 책이 더 많아서 다행이라고 여겨질 만큼 그녀의 빈자리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녀를 아끼는 10명의 사람들이 생전 그녀와의 대화를 다듬어 책으로 엮었다. 일제 치하, 6.25 전쟁, 격동의 시기를 버텨낸 그녀의 삶은 자화상처럼 글에 녹아들었고, 여자로서, 여성작가로서의 삶을 주체적으로 보여주었다.


대화를 읽다보면 소설 속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묻어 나온다. 특히 <그 남자네 집>의 '춘희'는 작가님 자신의 삶이 조금이라도 어긋났더라면 꼼짝없이 휩쓸려갈 수밖엔 없었을 길이라고 표현하면서 동시대의 약간의 엇갈림이 가져오는 삶의 높낮이를 섬세하게 그려내려 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여성 인물에 대해, 여성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여성이라서 한계를 느껴본 적은 없다고 말한다. 그 모습이 멋있었다. 스스로에게 성차별적인 한계를 지정해두지 않았다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저더러 '페미니즘 작가'라고 하는 데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여성문제를 다루어야겠다고 의식하고 쓴 건 <살아있는 날의 시작>뿐이었습니다. 여성이 자주적으로 생각할 힘을 가진 존재라는 시각으로 여자를 그린 것은 아마도 제가 최초가 아닐까요. 그전에 남성 작가들이 그려놓은 여성상들과는 다르게 말이죠. 정말 좋은 소설이라면 남자가 썼더라도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도 똑같은 인간으로 그린다면 말이죠. 그런데, 많은 남성 작가들이 여성은 창녀가 아니면 성녀라는 식으로 그리더군요. (p. 86)


겉치레보다는 인간의 소박하고 투박한 면을 사랑으로, 예민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작가님을 보면 동시대를 살아가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마흔이 넘어 늦은 등단을 했다는 시선이나 평론가의 논평에 신경 쓰지 않고 그동안 겪어온 것들이 충분한 이야깃거리가 되어 쓸 거리가 없다는 기분을 느껴본 적 없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작가라는 호칭에 어울려 보였다. 쓰지 않는다고, 초고를 쓰지 않는다고 글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소설가가 됐다는 것은 그에게 자기 자신의 이름을 비로소 회복시켜주고 한 사람의 당당한 사회인으로 거듭나게 한 것 말고도 그의 삶의 내용을 천천히 그 질료로서 살아져야 했다. 또 날것 그대로의 삶은 그의 연금술에 의해 문학으로 전환되면서 수없이 되풀이 살아졌다. 다시 말해 객관화시키고 반성하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예전에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없이 그저 무의미한 타자로 존재했던 숱한 사람들이 그리고 이들이 모두 나름대로 각별한 의미망을 구축하면서 자신의 문학적 감수성으리 체계 속으로 편입되어 들어왔다. (p. 38)


초등학생 때 읽었던 <자전거 도둑>이란 동화부터 교복 입고 교과서 문학작품에서 읽던 글까지 모두 다 생각난다. 그 글을 성인이 되어 한 사람의 인생으로 읽으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많이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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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얼굴 사랑의 얼굴
김얀 지음 / 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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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창 너머 바다를 보며 "참 아름답지요?"라고 물어오면, 나는 이내 잊고 기억이 떠올라 울상이 되고 만다. 누군가 내게 사랑에 관해 물어온다 해도 나는 역시 같은 표정일 것이다. (p. 15)

 

같은 대상이어도 각자의 스토리가 묻어 나온다. 나에게 바다는 위로인데 그녀에게 바다는 울상이었다고 하니 말이다. 어릴 적 자랐던 바닷가 마을, 미조리로부터 시작된 기억은 'ㄷ'이라는 남자와 사랑으로 이어지기까지 '기억'과 '환경'이 주는 힘이란 실로 대단함을 느꼈다. 짭조름한 비린내가 가득 찬 동네에서 친구오 친해지는 방법을 몰랐을 때, 혼자였던 아이가 있었고 가족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아버지가 있었다. 이제 커 버린 그녀가 다시 방문한 곳에는 기억 속의 생생한 자리는 없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유년기를 정말 '나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냐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른들이 말하는 아이들의 무한한 가능성은 결국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무능력을 확인하는 시간이 된다. (p. 22)

 

유년기의 삶이란 '나의 삶'이라 부르기 민망할 만큼 외부에 의해 쌓아올려진다. 사랑을 믿지 않는 건 당연한 순서다. 그런데 사랑이 시작된다. 미세한 틈 속에서 기대고 싶은 싹이 핀다. 결국 사랑을 믿지 않았던 여자가 진한 사랑으로 마음앓이를 하기까지는 미조리로부터 이어진 질긴 파편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일로 끝이 난다. 누군가를 잊기 위해, 아니 잊었기에 현재의 웃음을 보인다. 과거는 미약한 힘을 '바뀌지 않는다'에게 불어넣고 있다면 현재와 미래는 '바꿀 수 있다'에 걸고 있다. 그러니 그녀가 보았던 수많은 풍경들은 눈물 머금은 흐릿함이기도, 울고 난 뒤의 맑음이기도 했다.

 

'ㄷ'와의 사랑도 며칠 신다다가 사라질 신기루일 줄 알았지만 그녀와 'ㄷ'은 난생 처음 진한 감정에 어찌할 줄 모르고 보고 싶어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지만 망설인다. 처음 느껴본 '진짜 사랑'이란 감정은 타인의 삶이 나로 인해 망가질까봐 전전긍긍하게 만든다. 옷 위로 흩뿌져진 눈물들은 그녀의 밑거름이 되었을까, 다시 누군가를 믿는 힘이 될 수 있었을까.

 

"아니, 뭐. 그래. 힘들었다기보단 어려웠던 거지. 낯선 동네. 처음 해보는 배 사업.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딸들. 모든 것들이 나한테는 처음이었으니까. 그런데 지나고 보니 인생이란 건 참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인생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어렵거든." (p. 202)

 

엄마와 함꼐 다시 찾은 미조리에서 그녀는 "다시 이곳에 와보니 기분이 어떻냐"라고 엄마께 묻는다. 그러자 엄마는 '힘들었다'를 '어려웠다'로 바꿔 말한다. 그 말을 하는 엄마의 표정이 평온했다고 하니 이제 그 누구에게도 미조리는 더 이상 현재의 삶을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언니의 아이에게 재롱을 떨고 예뻐해주는 자상한 할아버지가 되었다. 마치 그때를 잊은 것처럼.

 

잊고 살아야 하는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산 같단 생각이 든다. 그 산을 기어코 넘어버린 그녀와 가족들처럼 나도 등에 짊어진 그 산을 넘어버리고 훌훌 털어낼 수 있을까. 사랑을 느낀 그녀처럼 나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여러 물음을 던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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