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과 객관 - 과잉 정보의 시대, 본질을 보는 8가지 규칙, 2026년 대한민국 세종도서 선정 도서
키코 야네라스 지음, 이소영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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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과 객관|숫자 앞에서 사람이 사라지지 않도록


1985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지리학과 졸업생의 평균연봉이 1억 1천만원이 넘었다고 한다.

그 당시 미국에서 지리학과가 그렇게 유망한 학과이고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기 명문대인가?


아니다. 그 대학은 마이클 조던이 졸업한 학과다.

이 예는 우리가 믿는 숫자가 얼마나 엉터리일 수 있는지 우리에 알려준다.


이 책 <직관과 객관>은 비슷한 이야기들로 문을 연다.

숫자에 대한 책이지만, 숫자를 맹신하지 말라고 말하는 책이다.


평균의 함정보다 더 심각하게 우리가 가장 쉽게 빠지는 함정은 소위 '객관적이라는 착각'이다.

설명했듯 숫자는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숫자를 선택하고 해석하는 순간 이미 인간의 직관과 편향이 개입된다.

이 책은 우리 사회 곳곳의 이런 오류를 짚어내는 것부터 시작한다.



작은 표본이 만드는 큰 착각


생각보다 사람들은 표본의 크기를 쉽게 무시하곤 한다.

3건의 사례와 1만 건의 조사를 같은 무게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생각보다 흔하다.

저자가 말하듯 표본이 작을수록 결과는 극단으로 흔들리기 쉽고, 그 극단은 직관에 강하게 각인된다.


우리는 종종 숫자로 이루어진(이를테면 3대 맛집, 혹은 90% 이상이 선택한 같은) 이야기에 설득되지만, 그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데이터를 대표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지금도 SNS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어쭙잖은 숫자를 들이밀며 확신에 차서 말하고 있는가.

숫자를 본다는 건 수치를 읽는 일이 아니라 그 숫자가 어디서 왔는지를 함께 살피는 일이다.

저자는 이를 반복해서 상기시킨다.



무지는 왜 우리를 더 확신하게 만드는가


"우리는 잘 모르는 것을 가장 굳게 믿는다."

미셸 드 몽테뉴의 이 문장은 이 책을 아우르며 우리에게 던지는 경고다.

무지는 조심스러움을 낳기보다 오히려 대담함을 부른다.


확신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질문을 멈춘 지점에서 생겨난다.

저자는 인간의 자기 과신이 어떻게 판단 오류로 이어지는지를 다양한 사례로 보여주면서도 스스로를 예외로 두는 심리를 해부한다.

타인의 편향은 쉽게 보이지만, 자신의 편향은 좀처럼 인식되지 않는다.


사람은 재미있는 동물이다.



수학과 사람, 양립 가능해야 하는 것들


수학을 소위 '문과형 인간'에게 닿지 않는 영역으로 밀어내는 순간, 우리는 세상을 해석할 중요한 언어 하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저자는 수학을 일부에게 주어진 재능이 아니라 학습되는 언어로 설명한다.

옹알이에서 말로 나아가듯, 숫자 역시 익숙해지는 과정이 필요할 뿐이다.


이 관점은 데이터 리터러시를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로 바꿔 놓는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배제하는 대신 천천히 배워가는 쪽을 선택하라고 권한다.


그러면서 그는 말한다.

“사람을 향한 고려 없이는 인간과 관련된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고.


숫자와 데이터는 세계를 정밀하게 그려주지만, 그 세계 안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어야 한다.

효율과 생산성을 앞세운 도구적 이성이 인간을 소외시켜 왔다는 지적은 오늘날 여기저기서 들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데이터를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그 대안을 정량적 관점과 인본주의의 결합에서 찾는다.

숫자를 버리자는 말이 아니라, 숫자가 향해야 할 방향을 이제는 정확히 묻자는 이야기다.



직관과 객관사이


물론 저자는 직관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직관이 얼마나 쉽게 우리를 속이는지 그리고 그 거짓을 자각하는 태도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재차 강조한다.


사실 이제는 데이터 없이 어떤 것도 결정할 수 없는 시대다.

우리는 숫자를 통해 흐름을 보고, 그 흐름을 통해 내일을 예측하고 결정한다.

사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스티브 잡스가 그랬던 것처럼 직관의 힘을 믿는 편이긴 하다.


저자는 숫자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되 그 끝에 사람을 반드시 고려하는 조언으로 책을 맺는다.


직관과 객관,

어떤 기준으로 결정하던 사실 이건 개인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당신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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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견디는 기쁨 - 힘든 시절에 벗에게 보내는 편지
헤르만 헤세 지음, 유혜자 옮김 / 문예춘추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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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견디는 기쁨


헤르만 헤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늘 같은 오해를 한다.

이 사람은 이미 모든 고통을 통과했고, 그래서 우리보다 훨씬 가벼운 자리에서 인생을 내려다보고 있을 거라고.

투명한 미소, 노승 같은 평정, 삶을 초월한 지혜.

가끔 사진으로 보는 헤세의 얼굴 역시 그런 이미지에 가깝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그 오해는 오래가지 않는다.

헤세는 고통을 건너뛴 사람이 아니라 고통을 정면으로 통과한 사람이다.


'절망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정당화시키려는 진지한 시도가 만들어 낸 결과다'라는 문장에 마음이 좀 흠칫거렸다.

절망은 망한 사람의 대표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반대로 말한다.

대충 살지 않으려 했고, 덕망과 정의와 이성으로 살아가려 애썼고, 맡은 책임을 끝까지 완수하려 했던 사람들.

헤세는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절망이 온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절망은 나락의 증거가 아니라, 삶을 진지하게 대한 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그리고 헤세는 절망의 공간을 두 갈래로 나눈다.

이편에는 아이들이 살고, 저편에는 깨어난 자들이 산다고.

아이들의 세계는 아직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다. 질문이 생기기 전의 세계, 의미를 붙이지 않아도 되는 시간.

반면 깨어난 자들의 세계는 모든 것을 이해하려다 결국 무너진 뒤에야 도달하는 자리다.

절망이라는 최악의 감정 뒤에는 이러한 시간들이 존재한다.



사소한 기쁨을 회복하는 법


책을 읽으며 좋았던 건 특별한 이유는 헤세가 거대한 구원이나 초월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아주 구체적이고 생활적인 제안을 건넨다.

정해진 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이 어려운 사람이라면, 일주일에 한 번쯤은 열 시간 정도 푹 자 보라고 말한다.

그 시간은 낭비가 아니라, 오히려 삶을 회복시키는 투자라고.

자느라 잃어버린 시간과 쾌락을 대체하고도 남을 만큼 상쾌한 기분이 찾아올 거라고 그는 말한다.


나는 이 책이 헤세가 전하는 힐링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삶을 살아내야 하는지를 다루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헤세가 말하는 절제된 행동 습관은 금욕이 아니라 사소한 기쁨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능력이다.

도파민의 시대에 우리는 쾌락을 좇는 데 익숙하지만 기쁨을 느끼는 데는 점점 둔감해진다.

기쁨을 아는 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에게 주어졌지만, 우리는 속도와 경쟁 속에서 이 감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시간에 쫓기고, 돈에 연연하며, 일에만 몰두하는 삶.

그런 삶 속에서는 작은 기쁨들이 너무 흩어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헤세는 그런 우리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이 기쁨들은 우리 일상 곳곳에 놓여 있지만, 우리가 너무 바빠서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고통과 행복, 삶을 받치는 두 기둥


헤세의 글에는 늘 고통과 행복이 함께 등장한다.

하나를 제거하면 다른 하나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는 고통을 없애려 애쓰지 않는다. 대신 고통이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끝없이 사색한다.

고통은 사람을 부드럽게도 만들고, 강철처럼 단단하게도 만든다.

그래서 고통은 언제나 우리를 바꾼다. 다만 그 변화가 어떤 방향으로 갈지는 각자의 삶에 달려 있다.


여기서 헤세가 발견한 진리는 단순하다.

모든 고통에는 한계가 있고 그 지점에 이르면 고통은 끝나거나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그 변한 모습이 우리 삶의 색채다. 헤세는 글과 그림, 여행을 통해 그는 이 고통을 새로운 생명으로 바꾸어냈다.

그래서 이 책은 행복해지는 법을 알려주기보다 삶을 견디는 법,

그리고 그 견딤 속에서 우리 생의 기쁨이 어떻게 자라나는지를 알려준다.



견딘다는 것의 다른 이름


견디라는 말은 쉽게 사용한다.

내가 말한 견딘다는 이를 악물고 버티는 일인데, 헤세는 '견딤'을 사소한 기쁨을 놓치지 않는 태도라고 말한다.

잠을 충분히 자고, 음악을 듣고, 산책을 하고,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순간을 허락하는 일.

헤세는 그런 순간들이 결국 삶을 지탱한다고 말한다.


덧없고 잔인하고 어리석은 인생을 살다 지쳐 있는 사람에게, 이 책은 조용히 말을 건다.

이해하려 애쓰다 무너졌다면, 잠시 이해를 내려놓아도 괜찮다고.

그리고 오늘을 견뎌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고.


오늘 당신의 삶이 어땠는지 모르겠다.

만약 그 삶이 너무 힘겨웠다면 이 책을 권한다.

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그냥 곁에 두고 읽어도 좋다.

삶을 견디는 기쁨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아 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오늘 밤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조금 더 오래 잠들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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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비트코인 -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은
나탈리 브루넬 지음, 임지원 옮김 / 필름(Feelm)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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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의 책이 아니라, 돈의 구조를 묻는 책


처음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당연히 투자에 관련된 책이겠거나 했다. 그러면서 좀 의아하긴 했다. 내가 하는 <필름 출판사>는 그런 책을 내는 곳이 아니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다들 그렇지 않을까. 당연히 가격, 타이밍, 수익률 같은 이야기로 흘러갈 거라는 내 생각은 몇 장 넘기지 않고 틀렸다는 걸 알게 됐다. 책은 비트코인에 관한 책이기 이전에, 돈 그 자체에 관한 책이었다.


최근 읽은 책 중 가장 비슷한 책을 떠올리자면 <EBS 다큐 자본주의>다.. 이 책은 <자본주의>가 던졌던 돈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암호화폐가 등장한 이후의 세계로 확장해 놓은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돈에 대한 문제의식과 바라보는 시각이 비슷하다



돈은 불안하다


책의 전반부는 다소 느리게 흘러간다. 돈의 기원, 화폐가 신뢰를 획득해 온 방식, 자본이 사회에서 맡아온 역할을 차분히 짚는다.

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가 이렇게 작동하고 있는지, 왜 열심히 일해도 삶이 나아지지 않는 건지를 설명한다.

화폐의 탄생뿐 아니라 오늘날 돈과 경제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주식이라든지, 연준의 역할, 통화 정책, 자산과 기회의 쏠림 같은 이야기들이 꽤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물가가 오르는 게 문제일까, 아니면 우리가 믿고 의지해 온 돈 자체가 이미 수정되어야 할 어떤 것일까.

논의는 확장된다.

일시적인 물가 상승 같은 게 문제가 아니라 돈이 더 이상 공동의 신뢰를 지탱하지 못하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닐까.


월급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고, 생활비는 계속 오른다.

노력하면 나아질 거라는 믿음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간다.

저자는 그 좌절을 개인의 선택이나 능력 부족으로 돌리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화폐 시스템을 조용히 의심해 보자고 말한다.



2008년 금융위기의 시작 그리고 비트코인의 등장


책의 중반을 넘어가며 비트코인은 비로소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라는 극적인 순간, 기존 금융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자리에서 비트코인은 모습을 드러낸다.

비트코인을 지지하던 이들이 어느 지점에서 열광했는지 이해될 정도로 드라마틱 하다.


문득 첫 번째 비트코인 광풍 때 봤던 유시민과 정재승의 비트코인 논쟁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유시민의 회의적인 시선이 더 설득력 있어 보였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돌아보면 정재승의 말이 조금씩 현실적으로 들리는데,

책은 읽으며 그때의 논쟁 속의 정재승 박사의 이야기를 다시 듣는 기분이 들었다.


흥미로운 건 저자가 비트코인을 기술 혁신의 관점에서만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블록체인의 잘 완성된 시스템이 아니라 이제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누구나 코드를 검증할 수 있고, 특정 권위나 기관에 의존하지 않으며, 에너지를 통해 현실과 연결되는 시스템.

비트코인은 그렇게 신뢰를 잃어버린 시스템을 거부하고 돈의 규칙을 다시 설계한 실험으로 등장한다.



모두가 자신의 은행이 될 수 있다


저자가 책에서 말하는 것은 비트코인이 어디까지 올라갈 것인가, 우리는 이를 언제 가져야 하는가가 아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의 자산과 미래를 얼마나 통제하고 있는가.


예금 금리는 체감 물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자산 시장은 점점 복잡해진다.

개인은 늘 선택지가 제한된 채 시스템에 종속되어 왔다.

비트코인이 이 구조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그것은 이 선택의 주체를 개인에게 되돌려 놓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스스로 보관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구조.

이 바뀐 시스템의 작동이 우리를 얼마나 변화시킬지 책은 계속해서 우리를 설득한다.


비트코인은 오랫동안 '투기'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런데 저자는 비트코인을 통해 '자유'와 '주체성'이이라는 이름으로 재정의한다.



이 책이 필요한 사람들


투자를 원하는 이들이라면 <모두를 위한 비트코인>은 썩 재미없는 책일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 시스템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이들에게 우리가 알고 있던 '돈'에 대해 한 번쯤 다시 돌아보길 원한다면 꽤 괜찮은 책이다.


비트코인을 선택하든, 선택하지 않든 상관없이, 새로운 돈의 질서 앞에서 우리는 이제 자신의 위치와 태도를 고민해야 한다.


나만 벼락 거지가 될 것 같아 불안하기만 한 시대에, 투자가 아니라 이해를 위해 읽어볼 만한 책을 찾고 있다면, 충분히 좋은 책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서둘러 결론을 내리지 말고 천천히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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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6-01-18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트코인의 미래에 대해 통찰이 필요한 것 같아요.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스즈키 유이 지음, 이지수 옮김 / 리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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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장에 흔들리다


살다 보면 단 한 줄의 문장이 마음을 휘젓는 순간이 있다.

이유도 맥락도 없이, 그 문장의 울림만으로 삶의 지도가 살짝 어긋난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일본의 괴테 연구자 도이치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어느 날 식당에서 그는 홍차 티백에 적힌 한 문장을 우연히 마주친다.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처음 보는 낯선 문장이었다.

평생 괴테만 연구해 온 도이치조차 본 적 없는 구절인데, 이상하게도 그 문장은 그가 평소 탐구해 온 주제를 단숨에 꿰뚫고 있었다.

눈앞의 한 줄에 마음 깊은 곳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 그는 혼란에 빠진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이 말은 거짓일까, 혹은 새로운 진실일까?



신념과 믿음의 경계에서


도이치는 곧 그 문장의 출처를 찾아내기 위해 모든 열정을 쏟아붓는다.

진짜 괴테의 말이라는 증거만 찾아낸다면 마음의 혼란도 잠재울 수 있으리라 믿으며, 그는 언어의 미로 속을 헤맨다.

하지만 세상은 뜻대로 흘러주지 않는다.

누군가는 냉소적으로 말한다.


"독일 사람은 말이야... 괴테가 말하길-이라고 덧붙여 둬. 왜냐하면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거든."


출처 모를 문장에 일단 괴테의 이름을 붙이면 그럴듯해진다는 농담 속에는, 우리가 얼마나 권위에 기대어 진실을 가늠하는지가 드러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누가 말했다'는 꼬리표로 언어의 가치를 판단하는지 떠올리며, 나 역시 조금 씁쓸해진다.


학자로서 원칙을 지키는 일은 도이치의 신념이었다.

그는 결국 출처를 확인하지 못한 상태로 방송에서 그 문장을 인용하고, 스스로 금기를 어겼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과연 그 말이 정말 괴테의 입에서 나왔는지가 그렇게 중요할까? 소설은 이 질문을 조용히 독자 앞에 내어놓는다

말의 진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이 누구의 마음에 가 닿았느냐는 사실 아닐까.



결국 이 책이 말하는 것은


"전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괴테는 정말로 모든 것을 말하려고 했구나, 그런 생각은 듭니다."


도이치가 만난 청년의 이야기에 도이치는 문득 한 가지 깨달음에 다다른다.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어도 세상의 모든 것을 말해보려 했던 마음.

그 순간 활자에 머물렀던 괴테의 모습이 사람의 형태로 다가온다.

아마 도이치는 그때야 비로소 괴테를 알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이야. 문장의 분위기를 살리면서 조금 더 따뜻하게 풀어쓸 수 있어:


소설이 끝을 향해 갈수록 도이치의 삶에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서서히 맞춰지기 시작한다.

가족과 제자, 동료들 사이에 오고 간 대화와 기억들이 마치 문장처럼 이어지고 그 속에서 도이치는 자신이 놓쳐온 감정과 진심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처음에는 괴테의 진위를 파헤치기 위한 학문적 집착으로 시작된 여정이었지만, 그 여정은 점차 일상으로, 관계로 돌아온다.

고전의 무게와 지금 이 순간의 숨결이 맞닿고, 정답을 찾는 학문의 길 위에서 결국 도이치는 말이라는 것의 진짜 의미를 깨닫는다.

그렇게 삶은 사랑하는 이들이 주고받는 온기로 완성되어 간다.


* 2001년생 스즈키 유이는 이 첫 장편소설로 2000년대생 최초의 아쿠타가와상 수상자가 되었다.

깊이 있는 주제를 놀랍도록 섬세한 필치로 풀어내는 그의 문장은 방대한 인문학적 인용과 지식을 담고 있으면서도 전혀 무겁지 않다.

일본 소설을 좋아했(?)는데 오랜만에 꽤 오래 앉아서 책을 펴들고 있었다.

아직 밖은 추운데 하늘은 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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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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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제일 답답한 순간이 있다.

분명 한글인데 내가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다.

있어 보이는 단어들 사이로 문장은 유유히 흘러가는데 의미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요즘은 AI가 쓴 글들이 주로 이렇던데 그러고 보니 철학자들의 글과 AI가 좀 유사한 것 같기도 하다.

(너무 많이 알면 일반인의 영역에서 풀어쓰기 힘든 건가…)

보통 이럴 때의 선택지는 두 가지다. 끝까지 따라 읽어보거나, 무시하고 비웃거나.

나는 대체로 전자를 택해왔다. 사실 학부 시절 수많은 철학 책으로 단련된 독서력 덕분에 포기를 선언할 만큼 어려운 책을 만나는 일은 드물었던 것도 사실이다. (단언컨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보다 어려운 책은 세상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씨 이게 뭔 소리야 싶은 책은 잊을 법하면 툭툭 튀어나온다.

이건 나이가 들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해하려 노력하는 게 귀찮고 힘들어질 무렵,

이 책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를 여러 번 접었다 폈다 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끝까지 따라가 보기로 했다.

아마도 이 책의 마지막 장에도 놓인 질문 때문이었다.


“우연이라는 불가해한 힘 앞에

삶은 얼마나 파편 된 진실이며 필연적 거짓인가?”



선명해질수록 희미해지는 진실


소설은 닐이라는 남자의 회고로 시작된다. 두 번의 이혼 이후 삶의 결핍을 느끼던 그는 한 강좌에서 엘리자베스 핀치 교수를 만난다.(이 책의 원제는 <엘리자베스 핀치>다) 그는 지식을 주입하는 대신 질문을 던지고, 학생을 깎아내리지 않으면서 그들의 생각을 존중하는 어른이다.

닐은 그 만남이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찾아온 순간임을 직감한다.

그렇게 그는 엘리자베스 교수와 20년에 걸친 만남을 이어오며 철학과 역사, 신념과 회의에 대해 묻고 또 답한다.



이해하려는 시도의 아이러니


그러던 중 핀치 교수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닐은 그녀의 서류와 노트 등을 유품으로 전해 받는다.

그는 그 속에서 미완의 과제였던 배교자 율리아누스에 관한 에세이를 완성하는 한편, 이것으로 엘리자베스 핀치라는 인물을 회고하려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닐의 삶을 흔들었던 절대적인 핀치 교수라는 존재가 사실은 그게 진리에 가까운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닐은 계속 핀치 교수를 일관되이 현자의 자리에서 두고 그의 삶을 해석하려 한다.

그런데 이 시도들이 결국 하나의 생각으로 사람을 규정하지 말라는 핀치 교수의 태도와 어긋나 있음을 그는 곧 알게 된다.


심지어 닐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기억 속 엘리자베스 핀치는 닐의 알고 있던 그 사람과 다른 사람이다.

그 틈에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해했다고 믿는 순간 어쩌면 우리는 가장 크게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렇듯 책은 우리 삶의 인식의 한계를 우리에게 명확히 알려준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고 심지어 그것마저 오해되기 십상이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설명 가능한 삶은 실상 얼마나 취약한가.

역사는 왜 사실이 아니라 해석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책은 말한다.



우연 앞에서 할 수 있는 것, 없는 것


뒤로 갈수록 이야기는 오히려 더 난해해진다.

배교자 율리아누스의 서사 위로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볼테르의 이름이 불쑥불쑥 등장하고, 소설 안에서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마저 흐려진다.

읽고 있다기 보다 헤매고 있다는 느낌에 더 가깝다.


그렇게 수많은 철학자들의 생각을 오가며 이 책이 결국 도달하는 곳은 의외로 단순하다.

삶은 생각보다 우리가 설계할 수 있는 영역이 좁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종종 그 한계를 드러내는 일에 불과하다.

그 이해의 너머에는 우연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은 우리의 어떠함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연에게 삶을 맡길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의지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 앞에서는 한 걸음 물러서는 태도는 분명 필요하다.


닐이 핀치 교수를 몰랐던 것처럼,

우리의 노력이 삶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책이 말하는 삶의 자세는 어쩌면 그 정도의 겸손일지도 모르겠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이 끝내 남아 있긴 하지만.

꽤 어려운 철학 책의 퍼즐을 맞추는 일을 즐기는 분들에게는 추천.

그렇지 않으면 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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