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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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제일 답답한 순간이 있다.

분명 한글인데 내가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다.

있어 보이는 단어들 사이로 문장은 유유히 흘러가는데 의미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요즘은 AI가 쓴 글들이 주로 이렇던데 그러고 보니 철학자들의 글과 AI가 좀 유사한 것 같기도 하다.

(너무 많이 알면 일반인의 영역에서 풀어쓰기 힘든 건가…)

보통 이럴 때의 선택지는 두 가지다. 끝까지 따라 읽어보거나, 무시하고 비웃거나.

나는 대체로 전자를 택해왔다. 사실 학부 시절 수많은 철학 책으로 단련된 독서력 덕분에 포기를 선언할 만큼 어려운 책을 만나는 일은 드물었던 것도 사실이다. (단언컨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보다 어려운 책은 세상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씨 이게 뭔 소리야 싶은 책은 잊을 법하면 툭툭 튀어나온다.

이건 나이가 들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해하려 노력하는 게 귀찮고 힘들어질 무렵,

이 책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를 여러 번 접었다 폈다 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끝까지 따라가 보기로 했다.

아마도 이 책의 마지막 장에도 놓인 질문 때문이었다.


“우연이라는 불가해한 힘 앞에

삶은 얼마나 파편 된 진실이며 필연적 거짓인가?”



선명해질수록 희미해지는 진실


소설은 닐이라는 남자의 회고로 시작된다. 두 번의 이혼 이후 삶의 결핍을 느끼던 그는 한 강좌에서 엘리자베스 핀치 교수를 만난다.(이 책의 원제는 <엘리자베스 핀치>다) 그는 지식을 주입하는 대신 질문을 던지고, 학생을 깎아내리지 않으면서 그들의 생각을 존중하는 어른이다.

닐은 그 만남이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찾아온 순간임을 직감한다.

그렇게 그는 엘리자베스 교수와 20년에 걸친 만남을 이어오며 철학과 역사, 신념과 회의에 대해 묻고 또 답한다.



이해하려는 시도의 아이러니


그러던 중 핀치 교수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닐은 그녀의 서류와 노트 등을 유품으로 전해 받는다.

그는 그 속에서 미완의 과제였던 배교자 율리아누스에 관한 에세이를 완성하는 한편, 이것으로 엘리자베스 핀치라는 인물을 회고하려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닐의 삶을 흔들었던 절대적인 핀치 교수라는 존재가 사실은 그게 진리에 가까운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닐은 계속 핀치 교수를 일관되이 현자의 자리에서 두고 그의 삶을 해석하려 한다.

그런데 이 시도들이 결국 하나의 생각으로 사람을 규정하지 말라는 핀치 교수의 태도와 어긋나 있음을 그는 곧 알게 된다.


심지어 닐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기억 속 엘리자베스 핀치는 닐의 알고 있던 그 사람과 다른 사람이다.

그 틈에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해했다고 믿는 순간 어쩌면 우리는 가장 크게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렇듯 책은 우리 삶의 인식의 한계를 우리에게 명확히 알려준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고 심지어 그것마저 오해되기 십상이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설명 가능한 삶은 실상 얼마나 취약한가.

역사는 왜 사실이 아니라 해석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책은 말한다.



우연 앞에서 할 수 있는 것, 없는 것


뒤로 갈수록 이야기는 오히려 더 난해해진다.

배교자 율리아누스의 서사 위로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볼테르의 이름이 불쑥불쑥 등장하고, 소설 안에서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마저 흐려진다.

읽고 있다기 보다 헤매고 있다는 느낌에 더 가깝다.


그렇게 수많은 철학자들의 생각을 오가며 이 책이 결국 도달하는 곳은 의외로 단순하다.

삶은 생각보다 우리가 설계할 수 있는 영역이 좁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종종 그 한계를 드러내는 일에 불과하다.

그 이해의 너머에는 우연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은 우리의 어떠함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연에게 삶을 맡길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의지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 앞에서는 한 걸음 물러서는 태도는 분명 필요하다.


닐이 핀치 교수를 몰랐던 것처럼,

우리의 노력이 삶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책이 말하는 삶의 자세는 어쩌면 그 정도의 겸손일지도 모르겠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이 끝내 남아 있긴 하지만.

꽤 어려운 철학 책의 퍼즐을 맞추는 일을 즐기는 분들에게는 추천.

그렇지 않으면 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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