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견디는 기쁨 - 힘든 시절에 벗에게 보내는 편지
헤르만 헤세 지음, 유혜자 옮김 / 문예춘추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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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견디는 기쁨


헤르만 헤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늘 같은 오해를 한다.

이 사람은 이미 모든 고통을 통과했고, 그래서 우리보다 훨씬 가벼운 자리에서 인생을 내려다보고 있을 거라고.

투명한 미소, 노승 같은 평정, 삶을 초월한 지혜.

가끔 사진으로 보는 헤세의 얼굴 역시 그런 이미지에 가깝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그 오해는 오래가지 않는다.

헤세는 고통을 건너뛴 사람이 아니라 고통을 정면으로 통과한 사람이다.


'절망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정당화시키려는 진지한 시도가 만들어 낸 결과다'라는 문장에 마음이 좀 흠칫거렸다.

절망은 망한 사람의 대표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반대로 말한다.

대충 살지 않으려 했고, 덕망과 정의와 이성으로 살아가려 애썼고, 맡은 책임을 끝까지 완수하려 했던 사람들.

헤세는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절망이 온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절망은 나락의 증거가 아니라, 삶을 진지하게 대한 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그리고 헤세는 절망의 공간을 두 갈래로 나눈다.

이편에는 아이들이 살고, 저편에는 깨어난 자들이 산다고.

아이들의 세계는 아직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다. 질문이 생기기 전의 세계, 의미를 붙이지 않아도 되는 시간.

반면 깨어난 자들의 세계는 모든 것을 이해하려다 결국 무너진 뒤에야 도달하는 자리다.

절망이라는 최악의 감정 뒤에는 이러한 시간들이 존재한다.



사소한 기쁨을 회복하는 법


책을 읽으며 좋았던 건 특별한 이유는 헤세가 거대한 구원이나 초월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아주 구체적이고 생활적인 제안을 건넨다.

정해진 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이 어려운 사람이라면, 일주일에 한 번쯤은 열 시간 정도 푹 자 보라고 말한다.

그 시간은 낭비가 아니라, 오히려 삶을 회복시키는 투자라고.

자느라 잃어버린 시간과 쾌락을 대체하고도 남을 만큼 상쾌한 기분이 찾아올 거라고 그는 말한다.


나는 이 책이 헤세가 전하는 힐링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삶을 살아내야 하는지를 다루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헤세가 말하는 절제된 행동 습관은 금욕이 아니라 사소한 기쁨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능력이다.

도파민의 시대에 우리는 쾌락을 좇는 데 익숙하지만 기쁨을 느끼는 데는 점점 둔감해진다.

기쁨을 아는 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에게 주어졌지만, 우리는 속도와 경쟁 속에서 이 감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시간에 쫓기고, 돈에 연연하며, 일에만 몰두하는 삶.

그런 삶 속에서는 작은 기쁨들이 너무 흩어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헤세는 그런 우리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이 기쁨들은 우리 일상 곳곳에 놓여 있지만, 우리가 너무 바빠서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고통과 행복, 삶을 받치는 두 기둥


헤세의 글에는 늘 고통과 행복이 함께 등장한다.

하나를 제거하면 다른 하나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는 고통을 없애려 애쓰지 않는다. 대신 고통이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끝없이 사색한다.

고통은 사람을 부드럽게도 만들고, 강철처럼 단단하게도 만든다.

그래서 고통은 언제나 우리를 바꾼다. 다만 그 변화가 어떤 방향으로 갈지는 각자의 삶에 달려 있다.


여기서 헤세가 발견한 진리는 단순하다.

모든 고통에는 한계가 있고 그 지점에 이르면 고통은 끝나거나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그 변한 모습이 우리 삶의 색채다. 헤세는 글과 그림, 여행을 통해 그는 이 고통을 새로운 생명으로 바꾸어냈다.

그래서 이 책은 행복해지는 법을 알려주기보다 삶을 견디는 법,

그리고 그 견딤 속에서 우리 생의 기쁨이 어떻게 자라나는지를 알려준다.



견딘다는 것의 다른 이름


견디라는 말은 쉽게 사용한다.

내가 말한 견딘다는 이를 악물고 버티는 일인데, 헤세는 '견딤'을 사소한 기쁨을 놓치지 않는 태도라고 말한다.

잠을 충분히 자고, 음악을 듣고, 산책을 하고,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순간을 허락하는 일.

헤세는 그런 순간들이 결국 삶을 지탱한다고 말한다.


덧없고 잔인하고 어리석은 인생을 살다 지쳐 있는 사람에게, 이 책은 조용히 말을 건다.

이해하려 애쓰다 무너졌다면, 잠시 이해를 내려놓아도 괜찮다고.

그리고 오늘을 견뎌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고.


오늘 당신의 삶이 어땠는지 모르겠다.

만약 그 삶이 너무 힘겨웠다면 이 책을 권한다.

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그냥 곁에 두고 읽어도 좋다.

삶을 견디는 기쁨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아 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오늘 밤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조금 더 오래 잠들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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