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엘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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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다와다 요코는 독일어와 일본어로 글을 쓰는 이중 언어 작가다. 도서관에 가게 되면 다와다 요코의 책은 대부분 독문학 코너에 있다. 《목욕탕》이 그러했고, 거의 십오 년 만에 새로이 몸단장을 한 《영혼 없는 작가》(엘리, 2025)도 그럴 것이다. "1979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독일로 건너가 1982년 독일로 이주했다." 《목욕탕》 작가 소개란의 한 대목이다. 이 한 대목 덕분에, 《영혼 없는 작가》의 첫 번째 글을 펼쳐든 나는 유럽행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여행기가 소설적 허구가 아닌 삶의 지축을 뒤흔든 열아홉 살 체험에 근거한 '철학 에세이'로 읽혀졌다. 철학의 테마는 여행, 언어, 장소, 경계 등이다. "고향에서 이방으로, 유년기에서 성인기로, 마법 같은 태고에서 미래로 향하는 여정"이 인상적인 혼종적인 느낌의 글이었다.

이 책 《영혼 없는 작가》는 세 권의 초기 산문집에서 스물세 편의 글을 추린 정선집이다. 『유럽이 시작하는 곳』(1991) 한 편, 『부적』(1996) 열여섯 편, 그리고 『해외의 혀들 그리고 번역』(2002) 여섯 편이다. 책 제목 '영혼'은 '모어'나 '경계', '장소적 정체성' 등 다양한 의미를 갖는데, 주로 모국어로 대변되는 고정된 정체성이나 고향의 경계짓기와 연관이 깊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러시아어의 정수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가 '러시아적 영혼이 있는 작가'라는 식으로 볼 수 있다면, 반대로 '영혼 없는 작가'란 결국 고정된 장소에 깃든 문화적 정체성이 없는 작가, 현실과 초현실을 넘나드는 서사의 작가, 모어 경계의 바깥으로 나가는 다중문화의 작가란 얘기다.

다와다 요코의 작품세계를 설명하는 일련의 수식어들이 있다. 예컨대 "몸의 감각으로 낯선 언어의 세계를 유영하는 유목민" 혹은 "엄격하고 절제된 사유로 신화적 상상의 안팎을 넘나드는 샤먼" 같은 표현들이 그러하다. 다와다 요코가 이중 언어를 사용하고 언어라는 '매체'의 유동성에 매우 민감한 작가라는 점에서, 독자는 '변화하고 움직이는 액체적 사고'와 경계의 넘나듦에 거침없는 고딕적 상상력에 서서히 물들게 된다. 저자의 글에서 너무나 말끔하게 발화되는 엄마말이나 '혀'는 징그러운 '비체'처럼 혐오시되기도 한다. 페미니스트 정신분석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주요 개념인 '비체'는 경계를 허물거나 체계를 위반하는 문화적·상징적 대상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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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니까 - 김소현 에세이
김소현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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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뮤지컬 배우 김소현의 팬이다. 최애곡은 《모차르트!》에서 남작부인이 부르는 넘버 〈황금별〉이다. 여러 배우들의 버전을 들어보았지만, 언제나 이미 '쏘금별'이 나의 최애다. 남작부인은 청년 모차르트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현명한 멘토이자 후원자다.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황금별〉이 전하는 이중의 메시지가 나를 두 번 울린다. 불안한 젊은 영혼(볼프강 모차르트)에게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북돋아 주면서, 동시에 방황하는 자녀를 둔 부모(레오폴트)에게 진정한 사랑은 어떠한지, 참다운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을 전한다.

"♪사랑이란 구속하지 않는 것/사랑은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때로는 아픔도 감수해야 해/사랑은 눈물 그것이 사랑//황금별이 떨어질 때면/세상을 향해서 여행을 떠나야 해/북두칠성 빛나는 밤에/저 높은 성벽을 넘어서/아무도 가보지 못한 그곳으로/저 세상을 향해서 날아봐/날아올라♪"

'김소현 무대'의 덕질 수준은 뒤에서 꼴찌이지만, '김소현 에세이'만큼은 맨 앞줄에 서는 그런 열혈 독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읽고 또 읽었다. 사람은 누구나 두 개의 얼굴을 지닌다. 공적인 얼굴과 사적인 얼굴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아들 주안이의 저녁 도시락을 준비하는 엄마로서의 얼굴이다. 일에 지친 워킹맘이 아들을 위해 '냉부해'처럼 후다닥 소고기 김치볶음밥을 만들었다는, 정말 별스럽지 않은 내용이다. 하지만 이토록 평범한 도시락이 사랑하는 아들의 일상을 응원하는 소현 엄마의 소소한 응원가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자에게 소울푸드가 뭐냐는 질문에 '엄마표 김치찌개'라고 답한 것과도 서로 연결된다고 본다. 참고로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는 배우의 소울간식은 아몬드 초콜릿이란다.

신선했던 것은 매 이야기 꼭지마다 남편 손준호 배우의 따스한 코멘트가 달려 있다는 것이다. 두 배우의 결혼 이야기는 운명적인 로맨스 드라마를 빼닮았기에 대중적 호기심이 늘 끊이지 않는다. 가장 크게 놀랐던 것은 저자가 빼곡히 써 내려간 공연 노트들이다. 20여 년간 베테랑 뮤지컬 배우로 성장하기 위해 흘린 '피와 땀'을 사진으로 생생히 보여주고 있어 달리 긴 말이 필요 없었다. 저자는 이를 '반성 노트'라고 부르는데, 배역의 성격, 상황, 감정선을 분석하고, 공연 후 보완할 부분을 적은 노트다. 공연 얘기는 아쉽게도 《모차르트!》 가 빠져있지만, 《안나 카레니나》《명성황후》《위키드》《마리 앙투아네트》《마리 퀴리》에 대한 것은 전해 들을 수 있다. 아, 그리고 강력한 반전의 웃음 한 방이 있다. 그건 가족들 알레르기 검사와 관련이 있다. 단언컨대 삼분의 일 지점에서 터진다, 함박웃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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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 절망의 이야기에서 희망의 이야기로 나아가는 길
로냐 폰 부름프자이벨 지음, 유영미 옮김 / 지베르니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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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이야기를 먹고 성장하는 존재는 호모 사피엔스뿐이다. 우리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인류는 이야기를 만들고 전파하고 공유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먹는 것이 곧 우리'라는 말이 있다. '약식동원'이란 말도 있다. 이야기도 음식처럼 이로운 보약이 될 수 있고 해로운 독약이 될 수 있다. 그만큼 신중한 선택이 중요하다. 사회분열과 불신을 조장하는 이야기는 해롭다. 증오와 거짓, 악의와 망상으로 범벅된 가짜뉴스는 해롭다. 이성과 증거, 사실과 논리를 무시하는 '탈진실'이나 '대안사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악이다. 이야기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보니 똘똘하게 선택할 수 있는 선구안과 안목이 중요하다. 지금보다 나은 삶, 오늘보다 더 나은 미래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이야기를 능동적으로 가려 들어야 한다.

이야기는 자아와 세상에 대한 시각과 입장을 변화시킨다. 저널리즘도 바로 그러한 이야기다. 그런데 부정적인 이야기에 특화된 장르라는 게 문제다. 가령 기자는 경비견처럼 '문제'의 냄새를 맡는 데 뛰어나다. 사회적 불공정, 억압, 위기, 부정의, 재난, 전쟁 같은 냄새를 잘 탐지한다. 하지만 명탐정처럼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미치지 못한다. 신속, 공정, 객관, 간결 등의 뉴스 가치가 오히려 기자의 발목을 잡는 일이 빈번했다. 그러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뉴저널리즘 운동이 일어났다. 뉴저널리즘은 묘사와 대화, 스토리텔링 같은 소설 문학 기법을 뉴스에 적용한 문학적 저널리즘이다. 뉴저널리즘의 대표적 인물로는 존 허시, 톰 울프, 노먼 메일러, 게이 탤리즈, 조앤 디디온 등이 있다.

독일의 저널리스트 로냐 폰 부름프자이벨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진보 저널리즘의 새로운 가능성을 문학적 스토리텔링보다는 사회학적 상상력에서 찾았다. 그것이 바로 문제 해결에 특화된 '건설적인 저널리즘'이다. 건설적인 저널리즘을 공식으로 표현하면, '문제+X'이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것"을 뜻한다. 사회적 차원의 적폐, 부조리와 불공정은 물론, 개인적 차원의 걱정거리와 어려움 등을 두루 포함한다. 'X'는 문제를 감소시키거나 문제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다.

저자가 사회학적 상상력을 구비한 '긍정과 희망의 저널리즘'과 문제해결적 글쓰기를 강조한 이유는 분명하다. 대중이 이야기를 선택하고 소비하는 청중의 차원을 넘어, 개인적인 삶과 세상의 이야기를 보다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는 생산적 주체로 탈바꿈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이야기'를 생산하고 소비하고 재생산하는 주체가 되어, 세상의 점진적 변화와 일상적 진보를 이끌어내는 진보 세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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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쯤은, 서양미술사 - 다빈치부터 피카소까지, 시대별 대표 명화로 한눈에 보는 미술의 역사
김찬용 지음 / 땡스B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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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의 핵심을 충실하게 설명한 똘똘한 입문서를 만났다. 전업 도슨트 김찬용의 《한 번쯤은, 서양미술사》(땡스B, 2025)이다. 저자는 '대중의 미술화'를 지향한다는 목표 아래, 고대, 고전, 중세 시대는 과감히 건너뛰고, 곧장 우리에게 친숙한 르네상스 사조부터 시작한다. 이어서 매너리즘,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낭만주의 풍경, 라파엘전파, 사실주의, 아카데미즘, 인상주의, 신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표현주의와 상징주의, 빈 분리파와 아르누보, 야수주의, 입체주의까지 두루 소개한다.

개인적으로 미술사보다는 예술 창작 과정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 화가들의 미완성 스케치나 초벌 그림, 메모 노트 같은 것들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미술 애호가의 안목을 키우는 첫 단추로 친절한 미술사 입문서는 언제나 환영이다. 세계적인 명화(아주 잘 그린 그림 또는 유명한 그림)들을 접할 때 사조를 알면 역사적 배경 파악은 물론 작가의 의도를 비롯해 그림이 전하는 메시지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 미술 감상의 안목을 키우는 첩경이 바로 미술사 공부다.

현대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예술 사조는 무엇인가. 나는 낭만주의라고 본다. 뿐만 아니라, 평범한 한국인의 심미적 취향과 가장 잘 어울리는 사조 역시 낭만주의 아닐까 싶다. 낭만미는 삼국 시대 풍류도에서 연원한 우리네 전통 정서와 잘 어울린다. 예술 사조는 '살부' 경향이 강한데, 낭만주의는 신고전주의를 아비로 삼고 사실주의를 형제로 삼는다. 잘 알다시피, 낭만주의는 이성보다 감성, 합리성보다 비합리성, 감각성보다 관념성, 동일성보다 차이성을 강조한다.

저자는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을 낭만주의 화풍의 대표작으로 소개하고, 아울러 낭만주의 사조의 하위 개념으로 인물보다 자연을 중심에 둔 독일과 영국 출신 화가들의 작풍을 '낭만주의 풍경'으로 구별한다. 가령 숭고미가 매우 인상적인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와 산업혁명(증기기관차)의 아이러니를 드러낸 윌리엄 터너의 〈비, 증기, 그리고 속도〉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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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광희 최광희입니다
최광희 지음 / CRETA(크레타)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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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밀한 가족사를 얘기하는 영화평론가의 글은 처음 접한다. '미치광희'라는 별명으로 불린다는 영화평론가의 책《미치광희 최광희입니다》(크레타, 2025)를 흥미롭게 읽었다. 유머가 양념처럼 뿌려진 신변잡기 에세이다. 간혹 〈매불쇼〉 시네마지옥 코너에서 중절모를 쓰고 있는 저자 모습은 얼핏 봤어도 그가 '정통파' 영화평론가인 줄은 몰랐었다. 그냥 영화를 사랑하는 애호가 수준 아닌가 여겼더랬다. 뭐, 아직도 저자의 진지한 영화평론은 한 줄도 읽은 바 없으니 애호가나 덕후 인상을 지우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이번 책에는 뭔가 자기만의 철학과 딸깍발이스런 고집이 느껴지는 갬성이 장난 아니다. 특히 도덕 교사로 중학생 꿈나무들을 지도하면서도 이른바 '정답이 있는 삶'과는 다른 노선을 지향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무언가를 추구하고 그것을 성취하며 사는 삶은 근사해 보인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나처럼 도망치듯 사는 길도 과히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걸 한다’는 것과 ‘하기 싫은 건 참지 않는다’는 정반대로 보이지만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하기 싫은 걸 억지로 참느니 도망치는 것도 삶의 방편이고, 그 길에서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을 수도 있다."(32, 33쪽)

나는 영화를 사랑해야 영화평론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지식을 사랑해야 철학자가 될 수 있듯이 말이다. 글재주가 있는 먹물들은 평론 쪽에 기웃거리기 마련이다. 나도 한때 영화평론을 멋지게 쓰고 싶었다. 그래서 무식하게 '하루 한 편 365일 영상 수련'을 한 적도 있다. 그런데 내 영화 사랑은 쉽게 물리고 마는 성질의 것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보름 넘게 카레만 먹고 지냈다고 하기에 나도 할 수 있다 여기고 대뜸 도전하다 실패한 적이 있는데, 영화도 쉽게 물리고 말더이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난 후 저자의 한 언론 인터뷰를 찾아보니, 나의 고정관념을 깨부수며 뒤늦은 위안과 위로를 주는 대사가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평론은 기본적으로 거리두기에서 시작돼요. 평가 대상과 거리를 둬야 하는데 평론가들이 그 대상과 붙으려고 하죠." 영화평론도 정치평론처럼 비판적 거리를 적절히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에 '그렇구나' 싶었다. 사랑이 아니라 비판이 먼저라는 소리다. 아무튼 영화라는 영상매체에 쉽게 물리는 내게 실망한 내게 위안을 주는 조언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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