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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역사 - 표현하고 연결하고 매혹하다
샬럿 멀린스 지음, 김정연 옮김 / 소소의책 / 2024년 9월
평점 :
영국 미술평론가 샬럿 멀린스의 《예술의 역사》(소소의책, 2024)는 예술사 입문서로 제격이다. 일단 내용 전개는 예술 사조의 변천에 충실하다. 동굴 조각과 벽화 같은 선사시대 예술부터 출발해, 고대와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를 거쳐,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인상파를 정점으로 찍은 후에,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 미니멀리즘, 팝 뮤직비디오까지 폭넓게 소개하고 있다. 무엇보다 독자들이 주목할 만한 이 책의 특색을 하나 꼽는다면, 그동안 주류 예술사에서 자주 배제되곤 했던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을 애써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프리다 칼로나 오노 요코 같은 몇몇 유명인들을 제외하면, 저자가 거론한 대다수 여성 예술가들의 이름과 작품이 내겐 생소했다. 일테면 1850년대 로마에서 활동한 일군의 미국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데, 해리엇 호스머의 「쇠사슬에 묶인 제노비아」(1859년)와 메리 에드모니아 루이스의 대리석 조각 「영원한 자유」(1867년) 등이 그러하다. 인상파 화가들을 논할 때도 여성 예술가 명단을 빼먹지 않는다. 클로드 모네, 에드가 드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같은 유명한 남성 화가들만이 아니라 베르트 모리조와 미국인 화가 메리 카사트 같은 여성 화가들도 거의 같은 비중으로 언급한다.
예술의 역사는 표현의 역사, 연결의 역사, 그리고 매혹의 역사다. 예술은 삶과 죽음을 표현하고 연결한다. 그리고 예술작품으로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고 유혹한다. 프로이트 심리학에선 인간의 기본 욕동으로 삶 충동과 죽음 충동을 강조했다. 이는 예술 사조에도 대입할 수 있는데, 그리스 예술과 고대 예술이 삶 충동에 기반해 현세를 긍정했다면, 이집트 예술과 중세 예술은 죽음 충동에 기반해 영원불변의 내세를 지향했다.
한편, 문예이론가 발터 벤야민은 예술 작품의 가치를 크게 전시 가치와 예식 가치로 구분한 바 있다. 전현대 예술은 예식 가치가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현대의 예술작품은 상품으로써의 전시 가치가 우선이다. 가령 선사시대에 프랑스 동굴 벽에 남겨진 들소 부조는 다산 의식이나 성인식 같은 통과의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구석기 시대 익명의 예술가가 창조한 들소 조각에서 꿈틀거리는 생명력이 느껴진다. 동굴 미술은 의례적이면서 예술적이다. 현대 화가 알리 바니사드르에 따르면, 동굴미술 이래로 모든 예술은 마법에 관한 것이다. 예술은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는 어떤 신비한 힘에 관한 것이다. 일테면 동물 벽화에 그려진 동물들은 샤먼이 동물의 혼령을 불러내는 데 쓰였을 수도 있고,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었을 수도 있다.
예식 가치에서 전시 가치로 문턱을 확실히 넘은 이정표적 작품을 하나 꼽자면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1863년)가 아닐까 싶다.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에세이 〈현대 생활의 화가〉에서 예술가란 "역사 속에서 유행이 담아내는 시적인 요소를 추출하고,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을 추출하는 것을 자신의 업으로 삼는다"고 했는데, 마네가 바로 그런 대표적인 '모던 화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