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 디톡스 - 쾌락과 고통에 지배당한 뇌를 되돌려라
애나 렘키 지음, 고빛샘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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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재미를 추구하는 도파민 인간이다. 도파민은 재미있는 일에 몰두하며 즐거움을 느낄 때 분비되는 뇌내 신경전달물질이다. 우리 뇌에서 쾌락과 고통의 중추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화학물질이 도파민이다. 쾌락과 고통은 뇌의 같은 부위에서 처리하는데, 균형을 유지하려다보니 쾌락과 고통의 관계가 시소처럼 작동한다. 쾌락을 느끼면 뇌는 고통 쪽으로 기울여 균형을 맞추는 식이다. 현대인은 지나친 도파민 추구로 인해 쾌락과 고통 사이에서 건강한 균형을 잃어버렸다. 술, 담배, 도박, 스마트폰, 마약 등 크고 작은 중독의 수렁에 빠져든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병적인 중독은 집중력 저하, 강박적 과소비, 불안 등의 폐해를 부른다.

오늘날은 쾌락 과잉 시대다. 쾌락에 파묻힌 중독 사회다. 특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디지털 중독 현상이 심각하다. 유튜브 쇼츠, 소셜 미디어, 온라인 포르노, 비디오 게임, OTT에 대한 과잉 탐닉이 만연하고 있다. 맘을 다잡고 중독을 끊어보려고 해도 이내 불안, 과민성, 불쾌감, 불면증, 갈망 등의 금단 증상에 지고 만다. 해법은 오직 하나다. 바로 도파민 디톡스다. 쾌락과 고통의 홍수 속에서 삶의 균형을 되찾고, 몸과 마음의 항상성을 회복하려면 도파민 디톡스가 절실하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애나 렘키는 최신 뇌과학 및 신경과학의 성과와 실제 임상 사례에 기반한 도파민 디톡스 프로세스를 제시한다. 바로 '데이터, 목표, 문제, 절제와 금욕주의, 마음챙김, 통찰과 솔직함, 다음 단계, 실험'의 앞글자를 딴 여덟 가지 프로세스 'DOPAMINE'이다. 'DOPAMINE'은 도파민 추구로 인해 위기에 빠진 정신 건강을 회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디톡스 프로세스다. 저자 본인 역시 현실 도피형 소설, 무의미한 유튜브 시청, 초콜릿 과다 섭취, 아이들에 대한 걱정 같은 문제가 있다고 고백한다. 디톡스의 첫 단추는 객관적인 '문제 물질 및 행동 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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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철학하다 가슴으로 읽는 철학 1
사미르 초프라 지음, 조민호 옮김 / 안타레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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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는 고독과 절망의 화가로 유명하다. 대표작 <절규>와 <절망>처럼 화폭에다 불안, 공포, 두려움, 질투, 고독 등 인간 내면의 복잡한 감정 변화를 쏟아냈다. 뭉크는 일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내 고통은 나 자신과 예술의 일부이다. 고통은 나와 하나이기에 그것이 파괴되면 나도, 예술도 파괴될 것이다." 그렇다, 예술의 꽃은 고통을 자양분으로 삼아 피어난다. 그리고 그런 예술적 고통의 기본 정서가 바로 불안이다.

불안은 인간의 숙명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불안하다는 얘기다. 불안은 우리의 실존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불안이든, 사회적 불안이든, 도덕적 불안이든, 불안은 모두 실존의 문제로 귀착된다. 인도계 미국인 철학자 사미르 초프라는 불안을 크게 근본적 불안과 인위적 불안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불교 철학, 실존주의 철학, 철학적 정신분석학, 유물론적 비판 철학의 네 갈래로 불안의 조건과 상황을 성찰한다.

불안은 감정이다. 인식이 감정을 낳고, 감정이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인식이 감정에 영향을 끼치므로, 우리가 불안의 본질과 불안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다르게 인식하면 불안을 느끼는 우리의 감정도 바뀌게 된다.

저자는 불안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불교 철학과 실존주의 관점이 모두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붓다가 사성제와 팔정도로 인간 내면에 깊게 자리 잡은 실존적 불안을 치유할 수 있는 인지치료법을 제시한 영혼의 닥터라면, 장 폴 사르트르, 프리드리히 니체, 쇠렌 키르케고르, 폴 틸리히, 마르틴 하이데거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우리 자신의 인격성과 인간성을 실현하기 위해 불안과의 투쟁을 기꺼이 환영해야 한다고 주장한 영혼의 해부학자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도 불안을 존재론적 특징으로 이해했지만, 불안이 초래하는 죄책감, 수치심, 우울증, 공포증, 신경증 등의 증상에 주목했다. 즉 정신분석 체계 안에서 불안은 모든 정신적 병리 현상의 근본 원인이 된다. 한편, 불안을 개인적 병리의 원인이 아닌 사회적 결과로 본 유파도 있다. 바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와 카를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유물론적 비판철학이다. 비판이론가들은 불안을 사회의 억압과 불평등에서 기인하는 소외의 결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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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아제 바라아제
한승원 지음 / 문이당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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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가 나르치스와 골트문트라는 두 수도자를 내세워 사색과 금욕의 길과 체험과 사랑의 길을 구현했다면, 한국 작가 한승원은 진성과 청화라는 두 비구니를 내세워 소승적 깨달음의 길과 대승적 깨달음의 길을 제시한다. 거칠게 말하면, 진성 스님이 나르치스와 같은 과이고, 청화 스님은 골트문트와 같은 부류다. 굳이 아쉬운 구석을 하나 꼬집자면, 헤세의 소설에선 나르치스와 골트문트의 진한 우정과 서로에 대한 믿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한승원의 소설에선 진성과 청화의 그런 도타운 사귐과 교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얼음과 불처럼 너무 대립적이랄까.

"달마 스님의 얼굴에는 왜 수염이 없느냐." 스승인 은선 스님이 진성 스님에게 건넨 화두다. 텁석부리인 달마에게 수염이 없다는 것은 무슨 언어도단인가. 진성의 속명은 강수남, 학창시절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뻐서 선생을 비롯한 어른들은 그녀에게 의사나 간호사, 교사와 같은 길을 조언했다. 하지만 진성은 부모의 반대, 만류와 회유를 단호히 뿌리치고 산에 올라 구도자의 길에 나선다. 진성은 어릴 때부터 어렴풋이 그게 자신의 운명이라는 직관적인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청정암의 은선 스님은 진성이 대학에 갈 것을 권유하고, 진성은 서울에서 새내기 대학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주변사람들이 자신의 수행과 깨달음을 방해하는 마장처럼 느껴진다. 가령 머리에 먹물이 가득 든 복학생 선배 우종남이 그러하다.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난 우종남은 스스로를 강수남을 비구니 신분에서 구해줄 구원의 기사로 자처하면서 진성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사이비 교주급의 말빨이다.

"가장 사람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참답게 살아가는 겁니다. 사랑도 해보고, 미워도 해보고, 질투도 해보고, 입도 맞추어 보고, 이성의 맨살을 끌어안아도 보고, 아기도 낳아 보고, 그 아기가 퍼질러 댄 똥오줌도 주물러 보고, 그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이런저런 속된 즐거움을 맛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자기 세계를 차근차근히 건설해 나가야 합니다."(149쪽)

진성은 그래도 수행자의 본분에는 충실했다.

청화 스님은 진성 스님의 도반이다. 속명은 이순녀, 간호전문대학을 다니다 출가했다. 가끔 사내가 암자로 찾아와 청화 때문에 한바탕 난리부르스가 난다. 그만큼 도화살이 강한 민폐녀 이미지다. 아니지, '쾌걸'이라고 불러야 하나. 청화는 박현우라는 나쁜 남자 때문에 결국 파계하고 절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남자에게 버림을 받은 후엔 이리저리 떠돌면서 간호일을 보면서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을 찾아서" 보살행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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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의 슬기로운 생활수행
법상 지음 / 열림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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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은 심심한 천국보다 재미있는 지옥을 더 좋아한다. 지옥에는 분별심이 가득하지만 천국에는 없다. 우리는 보통 고통과 기쁨을 분별해선 고통은 피하고 기쁨은 구한다. 중생은 모른다, 고통과 기쁨이 하나라는 것을. 이게 무지, 무명이다. 분별심의 위험성만 제대로 실감해도 깨달음의 불꽃이 일어난다.

시인은 말한다, 고통과 사랑이 하나라고. 수행자는 말한다, 번민과 보리는 하나라고. 일체가 모두 고통이라는 가르침은, 보는 시각에 따라 일체가 모두 사랑이라는 얘기도 된다. 큰 번뇌는 다름아닌 큰 지혜의 씨앗이다. 그러니 고통과 번뇌에 기죽지 말자, 절망하지 말자.

법상스님은 분별심의 해로움과 어리석음을 설하고, 우리 생활 속에 팔정도의 가르침을 구현하는 길을 강조한다. 무상과 무아를 깨치는 일보다, 아공과 법공을 깨치는 일보다, 하루하루의 삶에서 팔정도를 펼쳐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 팔정도는 올바른 견해 갖추기(正見), 바르게 생각하기(正思惟), 바르게 말하기(正語), 바르게 행동하기(正業), 바르게 일하기(正命), 바르게 노력하기(正精進), 바르게 알아차리기(正念), 바르게 집중하기(正定)다.

여덟 가지 생활 수행인 팔정도가 바로 해탈에 이르는 길이자 일상의 행복을 부르는 첩경이며 고통과 번뇌의 근본 치유법이다. 붓다가 설파한 불교 수행의 세 기둥이 '계戒·정定·혜慧'인데, 팔정도의 정어, 정업, 정명은 계율 수행이고, 정정진과 정정은 참선 수행, 정견, 정사유, 정념은 지혜 수행이다. 특히 올바른 견해 갖추기는 행복 감수성의 기반이며 다른 생활 수행의 굳건한 기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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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제한선 - 1% 슈퍼 리치는 왜 우리 사회와 중산층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해로운가
잉그리드 로베인스 지음, 김승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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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불평등 감수성이 높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적 차원의 감수성이지 제도적 차원이나 정책적 차원의 것은 아니다. 제도권 내부에선 오히려 불평등을 감내하고, 내부고발자를 꺼리는 상명하복의 조직 문화가 존재한다.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갈수록 깊어지지만, 제도적 차원의 개선은 요원해 보인다. 경제 불평등 심화를 억제할 수 있는 방책은 무엇이 있을까.

경제학자 잉그리드 로베인스는 '부의 제한주의'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부에는 상한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부의 불평등을 제어하려면 빈곤층을 보조할 뿐 아니라 극단적인 부도 제한해야 한다는 이상론을 펼친다. 극단적인 부는 매우 비도덕적이고 때때로 불법적인 속성을 지니며, 민주주의의 기반을 허물고 기후 재난을 가속화하면서, 불평등을 심화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계속 빈곤에 묶어두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의 제한주의는 결국 부유층에도 이롭다고 설득한다.

부의 제한주의는 정치적 제한선과 윤리적 제한선을 구분한다. 정치적 제한선은 "국가가 사회 시스템과 조세 재정 시스템을 만들 때 목표로 삼을 수 있는, 개인의 부를 제도적으로 제한하는 가장 궁극적인 상한선"이고, 윤리적 제한선은 "도덕적으로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돈이 얼마인지를 의미한다." 저자는 정치적 제한선을 자산 기준 1천만 달러(유로)를, 윤리적 제한선을 1백만 달러(유로)로 설정한다.

말은 쉽지만 실행이 어렵다. 부의 제한주의에는 세 가지 행동이 필요하다. 구조적 행동(부의 형평성을 보장하는 정책과 경제 시스템), 재정적 행동(조세와 사회적 급부 제공의 시스템), 윤리적 행동(제한주의 에토스)이다.

"요약하면 부의 제한주의 윤리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안정성 있고 좋은 삶을 누리는 데 필요한 것 이상으로 가지고자 해서는 안 되며 우리가 가진 것을 가장 불운한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도덕적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2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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