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말러가 행정가로서 매일같이 접해야 했던 
사람들과 오가야 했던 잡다한 동선들로 이루어진 그물망을 눈앞에 두고 있다. 

즉, 말러에게 딸린 
전담 잡역부와 충직한 비서, 
별로 충직하달 수 없는 합창 지휘자, 
관료주의적이고 예술과는 거리가 먼 극장 총지배인, 
무뚝뚝했지만 말러를 진심으로 아낀 궁내부 차관이 
그들이었고 그 서열의 맨 위에는 음악에 대해서는 
차라리 무지했지만 관대했던 황제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쪽에는 애초에는
대체로 적대적인 입장이었던 언론이 있었다.
그중 중요한 일부 언론사들은 1907년
말러가 떠날 때까지도 그런 입장을 견지했다. - P316

말러는 성악가의 목소리와 그 문제점들에 대한 진정한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목소리의 잠재력을 간파하는 귀와 연기력을 알아보는 눈은있었다. 

말러가 지닌 문제는 다만 너무나 빨리 열광해 버리는 경우가 번번이 있었다는 것, 자신의 판단이 충분히 무르익을 시간을 가진 것이 아니라 연습실에서 한 번 좋은 인상을 받은 것을 가지고, 혹은 딱 한 번 객원 출연한 것을 보고 해당 가수를 덜컥 채용해 버렸다가 그 뒤에 장기적으로 활동하게 되자 기대했던 것만큼의 활약을 보여 주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또한 말러는 똑같은 가수를 두고서 어떨 때는 반감을 표했다가 어떨 때는 공감을 표하는 식으로 변덕이 상당히 심했는데, 이것은 그가 번번이 비난을 받게 만든 잘못이었다. - P320

그러나 말러의 공연 계획에서 설득력 있고 수준 있는 신작이나 초연 작품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도 하다. 

우리는 말러의 극장 감독 활동에서 유일한 약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여기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말러가 궁정 오페라 극장을 아방가르드의 중심지로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를 받으면서 이 극장에 취임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은 언급해야겠다. 

무엇보다도 1890년에서 1920년까지의 그토록 풍요로웠던 오페라 시대에서도 정말 중요한 신작들은 희한할 정도로 빈곤했던 것으로 드러난 시기가 다름 아닌 1897년에서 1907년까지의 시기, 그러니까 말러의 빈 궁정 오페라 극장재직 시기였다는 사실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다.  - P322

말러가 자신과 슈트라우스가 인간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으면서도 슈트라우스와 관계를 끊지 않았던 것은, 그가 당대유명 지휘자들 가운데 슈트라우스 단 한 사람 말고는 누구도 더이상 그를 위해 일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 P342

두 사람의 경쟁 관계는 사후의 명성에서도 이어진다. 

말러와 슈트라우스를 똑같이 높이 평가하는 음악 애호가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은 말러냐, 슈트라우스냐 둘 중 한 사람 쪽으로 결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들 한다. 

속으로는 서로에 대한 어색함이 커져 갔지만 그런 어색함을 드러내 놓고 표현한 것은 말러뿐이었고, 슈트라우스는 그 점에 관해서 아무 말도 꺼낸 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P345

다시 말해, 말러는 어떠한 새로운 재료도 창조해 내지 않았고 오히려 옛 재료를 가지고 작업했으며, 자신의 내면에서 불타오르던 ‘세상의 심연‘을 묘사하기 위해 고전의 완결성을 해체시켜 버리고 스스로 그러한 완결성에서 해방되었다. 

그런 만큼 젊은 세대의 작곡가들이 무조건적으로 말러에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었다는 것도 결코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처음에는 브람스를 훨씬 더 무조건적으로 신뢰했던 그들에게는 이른바 후기낭만주의적인 음악 어법이라는 것이 당장이라도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 P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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