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말러가 지휘법을 처음 본격적으로 익힌 것은 바로 이 ‘인물의 시대‘, 다시 말해 자신만의 매력을 지닌 인물들이 많이 살던 1880년대였다.
그가 이 시기에 와서야 지휘를 제대로 배웠다고 말해야만 하는 까닭은 이미 말했듯,
아무리 당대의 위대한 지휘자들을 오페라 극장이나 연주회장에서 관찰하여 귀감으로 삼았다고는해도 음악원에서 지휘법을 딱히 정식으로 배운 것은 아니었기때문이다. - P240
<탄식의 노래>는 사실 ‘op. 1‘치고는 그 기획이 대단하고 거창한 작품이고, 스무 살짜리 작곡가의 작품치고는 엄청난 노작이며 말문이 막힐 정도로 거대한 대작이다.
만약 말러가 <탄식의 노래> 이후에는 더 이상 곡을 쓰지 않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및 교향악 연주회 지휘자‘밖에 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한 사람의 크나큰 재능이 흐지부지 묻혀 버린 것을 안타까워해야 했을것이다.
말러는 이 작품의 가사는 1878년에 이미 완성해 놓았고
제1부 ‘숲속 이야기‘는 1879년에서 1880년 초에 걸쳐 작곡했으며,
제2부 ‘음유시인‘은 1880년 3월에,
제3부 ‘결혼식 장면‘은 같은 해 10~11월에 끝마쳤다.
말러는 훗날 쓴 편지에서 이 작품 전체를 한 편의 "동화"라 불렀는데, 아닌 게 아니라 이 작품에는 알베르 지로의 텍스트에 쇤베르크가 곡을 붙인<달에 홀린 피에로>에 나오는 말처럼 "동화 시대에서 불어오는오래된 향기"가 엮여 있다. - P251
그는 어쨌든 류블랴나에 수석지휘자로 초빙되었고
(이것만으로도 이미 바트할에서의 지위에 비해 결정적인 진보라할 수 있다)
계약이 개시되는 날짜는 1881년 9월 3일이었다.
안톤 크리스퍼가 마침 류블랴나 출신이었기에 말러는 크리스퍼의 부모가 사는 집에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고, 가족처럼 편안한 분위기에서 지낼 수 있었다 - P273
말러는 단순히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공연, 실력도 안 되는 협연자들을 데리고 날림으로 제작한공연을 일생 동안 혐오했고,
훗날 큰 무대에서 활동할 때에는 그런 공연을 일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예술에 대한 열광적이고 경건한 믿음으로 대했는데,
그러한 혐오감은 바로 바트 할과 류블랴나, 올뭐츠에서의 지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P274
사실 푹스의 작품들과 <탄식의 노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푹스를 절대적으로 신뢰한 심사위원단의 눈에는 말러의 작품이 기이한 것들만 잔뜩모아 놓은 무더기처럼 보였음이 틀림없다. 그 저명한 심사위원들 가운데 여기 한 젊고 재능 있는 작곡가가 계시처럼 나타났다는 예감을 한 사람은 오로지 칼 골트마르크뿐이었던 것 같다. - P279
말러는 세 악장으로 된 초판은 살아생전에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지휘할 때는 두 악장으로 된 판본도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세 악장으로 된 초판이 원래 존재했다는 사실은 1930년대 중반에 와서야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고,
이 초판의 재발견은 1969년에 와서야 비로소 제대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1969년 당시 연주되고 음반으로 녹음된판본은 순수한 초판이 아니라 전거가 의심스러운 혼합판이었다(다시 말해 이 당시 사용되었던 악보는 초판에만 수록된 제1부를 2~3부만 수록된 개정판과 이어 붙인 악보다).
구스타프 말러의 대담한 "작품 번호 1번"의 초판은 수년 전 켄트 나가노가 지휘한 연주회 및 그가 취입한 음반을 통해서야 비로소 설득력 있는 모습으로 제대로 소개되었다.
그때 이래로 <탄식의 노래>는 단 두가지 판본으로만, 즉 두 악장으로 된 개정판이나 세 악장으로 된초판으로만 연주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마땅하다. (그중에서도 가급적이면 후자로 연주할 것이 권장된다). 두 판본을 혼합한 악보로 연주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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