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흥미롭기도 하고 좀 더 생각해 보기도 해야 할 것은 말러가 자신을 그토록 괴롭힌 반유대주의의 문제에 대해 그렇지만 눈에 띌 정도로 드물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골몰했음에도 불구하고 바그너의 반유대주의적 태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바그너 숭배가 빈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실로 엄청났는데, 이런 분위기가 구스타프 말러에게도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 영향은 단순한 ‘음악 취향‘을 한참 넘어서는 것이었다. - P163

그러나 바그너에 대한 빈 청소년들의 열광은 또한 대단히 정치적인 측면까지 지니고 있었다.

바그너에 대한 비판은 자유당 진영에서 나왔는데, 
여기서는 바그너의 반유대주의적 성향이 비판의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지만한 가지 이유이기는 했다. 

바그너 열광현상은 반유대주의를 몰고다니기도 했지만 

반유대주의뿐 아니라 무엇보다 대독일 민족주의를 몰고 다녔다. 

오스트리아 땅에서 독일민족적인 사고를 하며 사는 자라고 해서 반드시 바그네리아너가 될 필요는 없었지만, 

오스트리아 땅에서 바그네리아너로 자처하며 사는 자라면 독일민족적인 사고를 지녀야 했다. - P170

보고 배우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지방 극장을 전전하며
하나씩 단계를 밟아 올리감으로써 
실제적인 경험을 쌓는 것. 

이것이 말러 세대의 지휘자들이 
지휘법을 배워 가는 방식이었다. - P182

만 23세가 되면서 카셀로 자리를 옮겼을 당시, 
말러는 분명 완성된 한 사람의 지휘자가 되어 있었다. 

카셀 시절 초창기의 증언들만 봐도이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증언들을 토대로 해서 그려 보면, 

그곳에 갓 부임했을 때 
말러는 자기가 해석해야 할 음악만을기준으로 삼고 
그 외에는 어떠한 것도 판단의 기준으로 작용하도록 
놔두지 않았고, 

자신에게 동조한 단원이든 
자신의 말을 듣지않고 반대만 하는 단원이든 
대개 고만고만한 실력을 지닌 단원들을 
그들이 지닌 능력의 마지막 한방울까지 짜내도록 
몰아붙였으며, 

청중들을 
감동의 물결에 휩쓸려 가게 만들 수 있었던 
오페라지휘자, 

그리고 자신의 연주가 
위대한 작품들과 그 창조자들에게 
부끄러울 정도로 한참 부족하다는 불만을 
아마도 남의 음악을 연주하는 지휘자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끝마칠 때까지 달고 살았을, 

또 그 불만 때문에 
자신감을 잃고 
완전히 주저앉을 지경이 되어 버리기 수차례였던 
그런 지휘자였던 것이다. - P183

말러는 
바그네리아너요 
브루크너 선전가였으니 
태생적으로는 브람스의 적이었고, 
또 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 P195

1872년에는 
‘빈 독일계 대학생들의 독서회‘를 만들었다. 

여기서 방점은 ‘독일계‘에 있었다. 

이 독서회는 다른 대학생 단체와 함께 
1870년대 빈에서 가장 중요한 모임인 동시에 
가장 결정적인 지적 파급력을 지닌 대학생 운동이었다. - P204

어쨌든 여기에 인용한 리피니에게 갖다 붙인 
부정적인 의미의 관형어들이 뒷날 

동시대 말러 비평의 글자 그대로 표준 관형어가 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 관형사들은 
‘유대인은 창조적인 활동을 할 능력이 없다‘는 
주장과 연관되어 있으며, 

<음악에 나타나는 유대 민족성>에서 
리하르트 바그너가 이미 즐겨 쓰던 거다.  - P219

훗날 그는 말러를 이렇게 기억했다. 

"그들 중 한남자는 체구가 작은 편이었고, 
유별나게 까딱거리는 걸음걸이에서는 그의 신경질이 
예사롭지 않으리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지나치게 씰룩거려 정신적으로 긴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갸름한 얼굴은 갈색의 털보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고, 
하는 말은 항상 정곡을 찔렀으며 
말투에서는 오스트리아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그는 언제나 책이나 악보를 
한 보따리 팔에 끼고 다녔으며,
사람들이 그와 담소를 나누는 일은 
대개 어쩌다 한 번씩 있을 뿐이었다.
그의 이름은 구스타프 말러였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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