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 습관을 먹성에 비유할 수 있다면 소년 구스타프는 대식가여서, 음악을 닥치는 대로 들었던 것처럼 책도 닥치는 대로 읽어 댔다. 

이런 독서벽을 말러는 평생 달고 살았다. 

19세기에 살았던 작곡가 중에서 말러 정도의 독서를 한 작곡가는 리하르트 바그너와 베를리오즈 말고는 없을 것이다. 

책 읽을 여건이 제대로 갖추어지면 소년은 주변의 것들을 모조리 잊을 수 있었다.  - P95

1870년 10월 13일은 갓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된 재능 있는 어린이가 이름값을 얻기 시작한 날이다. 그의 첫공식 무대에 관한 소식이 가까운 일가친척의 테두리를 넘어 신문 지면에 실리게 된 것이다. 이글라우의 한 일간지에는 아홉 살짜리 피아노 명인이 시립 극장 무대에 섰는데, 그 어린이는 이곳에 사는 한 이스라엘계 상인의 아들이라는 기사가 났다. - P97

말러는훗날 나탈리에게 자신이 어린 시절에 보인 상상력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말러는 음악을 듣고 깊은 감명을받으면 그 음악으로 완결된 소설 한 편을 머릿속으로 지어냈다가, 

조도를 어둡게 해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 방 안에 부모와 친구들을 모아 놓고 그들 앞에서 자신이 창작한 소설을 연극형식으로 들려줬으며, 

가끔은 그 이야기에 스스로 감동해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고 한다. - P105

열다섯 살이라는 드물게 이른 나이, 부모 품에서 떨어져 나온 조심성 많은 촌놈 말러가 오직 자신의 음악적 재능에 대한 자부심하나로 이글라우를 떠나 당도한 1875년의 빈.

이해의 빈이 1897년의 빈, 그러니까 승리에 대한 확신을 안고 함부르크에서 돌아온 그가 마침내 유럽 음악계 최고의 결과적으로는 세계 음악계 최고의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을 당시의 빈과 똑같은 곳이라고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1875년에 빈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와 1897년 빈에서의 활동을 새로 시작할 때 말러의 출발점 위치가 천양지차였다면, 강산이 두 번은 바뀌고도 남은 세월을 사이에 둔 두 시기의 빈 역시 완전히 다른 도시였다. - P117

자유주의의 몰락은 사회의 다른 여러 분야에도, 예컨대 오스트리아에서 유대인이 누리고 있던 지위에도 영향을 미쳤다. 

유대인들이 오스트리아 문화에 동화되고 오스트리아에 유대 문화가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자유주의가 승승장구해 온 덕택이었던 만큼, 자유주의의 몰락이 가져온 타격도 특히나 컸던 것이다. 

1879년을 전후로 한 정치적 반유대주의의 대두가 
빈 회의 시대가 종말을 맞고 
자유주의가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 시점과 정
확히 맞물려 있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P128

당시에는 1848년의 국가 전복 기도에 가담한 사람들 중 다수가 유대인이었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는데, 훗날 빈에 퍼진 반유대주의 물결의 많은 부분은 악의적인 풍자화를 통해 후대에 계속 전해진 이런 유언비어에 기인한다. - P130

말러가 처음 빈에 상경했을 당시, 시골 유대인 가정의 자식인 말러가 문화적으로 비교적 쉽게 동화되었던 데에는 특히 자유주의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러가 음악가로서 쌓아온 경력의 첫 번째 정점에 도달한 지금은 그가 빈에 취임하자마자 그를 반대하는 반유대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그가 사임할 때까지 잠잠해진 적이 없었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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