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는 작품을 구상하고 창조에 착수한다. 그러나 난제는, 어떻게 하면 자신이 품은 악상을 다섯 줄 평행선 위의 음표로 옮겨 적어 최대한 애매하지 않게 표현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수백 가지의 성질 부여와 요건이 더해진다. 이를테면 세게, 여리게, 좀 더 세게, 속도를올려서, 여기에 강력한 강세를 주고, 적당한 길이로 쉬어 가고, 따위의 단서들이다.
작곡가가 구상한 바를 빠짐없이 옮겨 적은 모눈종이를 가리키는, 간편하지만 부정확한 명칭이바로 ‘음악‘이다.
내가 ‘부정확한‘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음악은 우선 작곡가의 머릿속에 존재할 뿐 다른 사람이 듣기전까지는 음악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다른 사람이이를 듣기 위해서는 작곡가가 남긴 기보 지시를 중간 매개자(때로는 수백 명에 이르기도 한다)가 읽고 해석하여 실제 소리로 옮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 P96
총보를 읽으려면 악보 전체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나가며 여러 단에 나뉘어 있는 음악을 하나로 통합하여 그소리의 결과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좌에서 우로읽어가며 눈으로는 재빠르게 위아래를 훑어 (제일 윗줄의 플루트부터 가장 아랫줄의 콘트라베이스까지) 소리와 악보의 구성 요소들을 두뇌에 입력시켜야 하는 일이다.
운동신경을 타고나듯 독보재능을 타고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 못한 지휘자들은 다양한 절차의 도움을 받아 총보를 읽는다. 어쨌거나 그 결과는 양쪽이 같아야 한다. 매 순간 악보에 담긴 음악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알아야만 이들 소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도 비로소 갈피가 잡힌다. - P98
그 어떤 예술 작품도 완성은 없다는 말이 있다. 고치고 개선하길 몇 번이고 되풀이하다가 끝내 포기해버린 것이 작품이기 때문이다. - P110
우리가 음악이라 부르는 언어는 다른 감각기관이 경험하는 것을 나타내는 메타포의 언어다. 그것은 빠르고 느린 진동(서로 다른 음높이)을 높고 낮음의 시각적 세계로 옮겨 이해하려는 시도의 한 방편이다. - P113
세상에 서로 같은 연주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모든 연주 가 독보적이라는 점을, 그리고 연주회장에 모인 모든 이가 음악가들과 힘을 모아 음악의 궁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데 일익을 담당할 거라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 P120
중세 직업별 길드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지휘는 선배가 후배에게, 스승이 제자에게 직접 실습을 통하여 가르치는 것이일반적이다. 설령 학교를 다니며 지휘 과정을 이수한다 해도이는 크게 바뀌지 않는 사실이다.
과거고 현재 간에 자신이 받은 가르침을 이야기할 때 위대한 멘토에 대한 언급을빼놓는 지휘자는 없다. 자신의 인생에 잠시만 머물다 간 카리스마 넘치는 마스터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는 운 좋은 젊은지휘자도 있다.
마스터클래스를 통해서 배울 수도 있고, 더바람직하게는 몇 년간 마스터의 보조 지휘자 노릇을 하며 근거리에서 관찰하고 배울 수도 있다. - P148
이처럼 번스타인의 두 스승의 계보를 따라가다 보면 두다리 건너 리하르트 바그너가 나온다.
앞서도 말했지만 바그너는 오케스트라 피트를 고안하고, 템포가 초지일관하는게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음악을 지음으로써 역할을 필수 불가결하게 만든 인물이었다.
그는 언젠가 "지휘 예술은 이행과 변이의 예술"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지휘자의 신축적이고 탄력적인 리더십이 필수적이다. - P150
지난 5주간 이해관계에 따라 벌어지던 옹졸한 알력 싸움을 단칼에 끊고 우리가 그해 여름 그곳에 모인 이유와 또 우리가 애초에 음악가가 되기로 작정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깨우쳐준 것, 그것이 바로 번스타인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었다. 나는 그날 밤 쏟아지는 별빛을 보고 걸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누구인지를 잊었던 게 부끄러워서 울음이 났고, 그 전까지는 딱히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사내가 말이나 책,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로서 나의 정체성을 일깨워준 것이 감격스러워 눈물이 흘렀다. - P164
우리 지휘자들은 신체 나이를 거스르는 존재다.
이십 대시절에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비창>을 지휘하는 우리는 나이보다 원숙해지고, 토스카니니가 여든을 눈앞에 둔 1946년에 경험했듯이 젊음의 덧없음을 이야기로 그린 푸치니의 <라보엠>을 지휘하는 우리는 언제나 젊은이다. - P168
모든 연주는 음악 작품의 일면만을 드러내 보일 수밖에없다. 아무리 훌륭한 연주라 해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악보위 음표의 번역일 수밖에 없는 연주에, 대단히 독창적이고설득력 있는 무언가를 가미할 수 있는 이를 우리는 최고 수준의 지휘자라 칭한다. - P171
불레즈와 번스타인, 카라얀은 예술품 복원에 관한 세 가지 다른 견해를 표상한다. 카라얀은 다빈치 그림을 발견한그대로 보존하고 사랑하는 쪽이었다. 그는 도료를 벗기려들지 않았고, 부드러운 윤곽선을 선호했으며, 어둡고 흐릿한 표면이 다빈치가 의도한 바라 믿었다. 레니는 스푸마토기법을 수상쩍게 여겨 배경과 중경의 오리지널 색상을복원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불레즈는 엑스레이 기계를사용해 다빈치의 골조와 작업 절차를 냉정하게 분석하길 원했다. - P172
우리는 연습하고 공연한다. 우리의 번역을 받아들이는 건 청중이며, 우리가 만족하건 안 하건 간에 청중이 우리의 행위를 어떻게 인지하느냐가 사실은 유일한 진실일 것이다. 안무가 마사 그레이엄이 후배 애그니스 데밀에게 만족이라는 화두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술가는 만족을 모르는 존재다. 그 어떤 경우 그 어떤 시점에도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기묘하고 거룩한 불만, 축복받은 불만이 있을 뿐이다." - P1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