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수련 옮김 / 새물결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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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오니 그의 책이 재출간 된다. 한국은 발 빠르게 철학을 받아들이고 소비한다. 그리고 기꺼이 그들의 충복이 되려고 한다. 식민지 근성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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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이란 무엇인가? - ‘0차원의 세계’에서 ‘고차원 우주’까지 뉴턴 하이라이트 Newton Highlight 28
일본 뉴턴프레스 엮음 / 아이뉴턴(뉴턴코리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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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보면 인문학은 물리학의 찌꺼기처럼 느껴진다. 정말 똑똑한 사람들은 물리학을 하고, 거기에 기생하는 잉여들이 다루는 학문이 인문학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비관적이지만은 아닌 것이, 이론물리학 역시 인문학적 사유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현대 과학의 실험과 측정으로 달성하지 못했던 것들이 이미 수천 년 전 인간의 사유 속에서 완성된 것들이었다. 물리학은 그 증명할 수 없었던 것들을 수식과 실험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문학은 새로운 지평을 향해 날아오른다. 물리학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둘은 쌍생아며, 둘은 서로 공모한다. 다른 것이 있다면 물리학은 사유를 펼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인 실험과 측정을 통해 그들의 사유를 증명한다. 이에 반해 인문학은 오로지 언어로써 사유의 올바름을 증명해낸다.

차원을 다루는 이론물리학은 일종의 시()다. 시는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사유의 영역에서 사유하기를 시작한다. 물리학 역시 우리의 인식 바깥에서 사유를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물리학의 언어는 곧 시다.

이런 식이다. 뉴턴은 만유인력이 아무리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순식간에 작동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과는 항상 지구의 중심을 향해 수직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뉴턴의 만유인력은 작동방식은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러한 힘이 왜 생기는지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사과의 낙하를 이렇게 설명한다.

 

지구가 존재하면 그 주위의 4차원 시공이 휘어진다. 거기에 있는 사과는 4차원 시공의 휘어짐을 따라 말하자면 언덕길을 구르는 것처럼 지구를 향해서 간다.”

 

사과는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휘어진 시공간을 따라 구르고 있다.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르고 있다니……. 만약 사과가 뉴턴 식으로 떨어진다면 사과의 꼭지부분은 항상 위를 향할 것이고, 사과의 밑 부분에만 멍이 들 것이다. 하지만 사과는 공간을 구르면서 떨어지기 때문에 그 멍이 든 곳은 동일하지 않다. 스마트 폰이 꼭 뒷면이 아니라 화면 방향으로 떨어지는 것은 폰이 반 바퀴 굴렀기 때문이다.

4차원도 재미있지만 0차원이나 1차원도 재미있다. 아니 어떻게 이라는 발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을 갖지 않으면서, 넓이도 높이도 가지지 않는 어떤 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이라는 것도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선은 넓이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하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은 사실 선이라고 할 수 없다. 아무리 얇은 펜으로 선을 그어도 선은 넓이를 가지게 된다. 2차원에서 존재하는 은 높이를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얇은 종이도 높이는 있다. 선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면이라고 부르는 면은 물리학의 면과는 거리가 멀다. , , 면을 알지만 우리는 현실 공간에서 이것을 구현할 수 없다.

3차원 공간에서는 3차원 너머, 그 너머가 더 낮은 차원이라 할지라도 이를 올바로 사유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 불가능이라는 조건에 괄호를 치는 일, ()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일, 이것이 물리학이다. 이것은 다시 시(). 3차원보다 낮은 차원을 사유하는 것도 불가능한데 더 높은 차원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푸앵카레는 역발상을 통해 차원을 정의한다.

 

단면이 0차원()이 되는 것을 1차원()이라 한다.

단면이 1차원이 되는 것을 2차원()이라 한다.

단면이 2차원이 되는 것을 3차원(입체)라 한다.

단면이 3차원이 되는 것을 4차원(초입방체)라 한다.

 

4차원은 단면이 3차원이란다. 이것을 수학적 공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들은 아마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닐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력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플라톤은 현실계를 이데아의 그림자로 생각했다. 현실이 이데아의 그림자라면, 현실은 3차원이니까, 이데아는 4차원 시공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보자. 그렇다면 고차원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우리는 왜 4차원을 볼 수 없는 것인가. 오스카르 클라인은 그것이 너무 작아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가느다란 막대는 1차원()의 세계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선에는 굵기가 있다. 거기에 개미가 걸어가고 있다면 개미는 앞뒤좌우로 움직일 수 있다. 그러니까 숨어 있는 차원은 작아서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막대를 멀리서 보면, 막대의 표면이 가진 2의 차원은 너무 작아 자신도 모르게 무시해 버리기 쉽다. 이와 마찬가지로, 3차원 공간을 구성하는 점 하나하나에 관측할 수 없을 만큼 작은 차원이 숨어 있다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

 

물리학의 설명 방식은 를 닮았다. 도달할 수 없는 인식의 지평에서 사유를 시작하는 일, 그리하여 진부함 너머에 존재하는 진귀한 사유를 펼친다. 이 새로운 것들은 아름답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수식과 사랑을 나누고 시인들은 언어와 사랑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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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7 0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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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말해주듯, 이 소설은 허삼관의 매혈에 관한 이야기다. 허삼관은 통 털어 피를 열 번 판다. 피를 팔기 전엔 오줌보가 터지도록 물을 마시고, 400ml의 피를 팔고, 판 후에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돼지간볶음과 데운 황주를 주문한다. 피를 팔기 전과 판 후의 행동은 반복되지만, 피를 팔아야 하는 상황은 항상 다른 방식으로 찾아오고, 피를 판 후에 받게 돈의 쓰임 역시 항상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 삶을 이루고 있는 형식은 항상 같을지 모르나 그 세부는 다르다는 간명한 이야기를 이 소설은 위트 넘치게 펼쳐 내고 있다.

문화대혁명 때 허삼관의 아내 허옥란은 가장 번잡한 거리에서 기생 허옥란이란 나무판자를 걸고 하루 종일 의자 위에 서 있는 벌을 받는다. 허삼관은 세 아들에게 어머니에 밥을 가져다주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부분이 <<허삼관매혈기>>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낸다.

 

(……) 허삼관은 일락이에게 엄마한테 물과 밥을 가져다주라고 했다. 그러나 일락이는 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 이락이한테 가라고 하세요.”

그래서 이락이를 불러놓고 일렀다.

이락아, 우리는 다 밥을 먹었지만, 엄마는 아직 못 드셨잖니. 그러니 네가 엄마한테 밥을 좀 전해드려라.”

이락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버지, 삼락이더러 가라고 하세요.”(222~223)

 

작가는 허삼관이 아들들을 불러모았다.”라고 하는 법 없이, 언제든 허삼관은 일락이, 이락이, 삼락이를 불러 모았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꼬마돼지삼형제>에서 집짓는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서술되듯이 이 소설 역시 동일한 구조의 사건이 반복되고 변주된다.

가뭄이 심하게 들었을 때 피를 파는 허삼관의 내면과 아픈 일락이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열흘 동안 네 번 피를 파는 허삼관의 내면은 분명 다를 것이다. 작가는 허삼관의 내면을 묘파하는 대신 피를 파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형식들을 아주 미세하게 변형시킨다. 그리하여 서술자에 의해 허삼관의 내면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그 변형된 형식들이 허삼관의 내면을 주조하도록 만든다. 전통적인 이야기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으되, 그 이야기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반영한다. 삶의 형식들의 반복을 통해 드러나는 내면은 소설 밖의 세계전체를 뒤흔드는 커다란 울림을 만든다. 

허삼관이 열 번 매혈을 했다는 것은 허삼관의 삶에 열 번의 가혹한 시련이 닥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열 번의 시련은 수사적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구조의 변형을 통해 슬픔은 매번 다른 것으로 주조된다. 그리하여 허삼관에게 닥쳐 온 열 번의 슬픔은 동일하지 않는 슬픔으로, 차이 속에서 수 없이 분화하는 슬픔이 되어 모든 슬픔은 한때의 유일한 슬픔이 되어 그의 가슴 속에 각인된다.

 

이 소설은 허삼관의 매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허삼관이 돼지간볶음과 황주를 먹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허삼관은 아내와 더불어 그가 피를 판 후면 늘 찾아갔던 승리반점에서 예의 그 음식과 술을 시켜 먹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 평생 이렇게 맛있는 돼지간볶음은 처음이야.”

 

허삼관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단순해 보이는데, 그는 처음으로 피를 팔지 않고 돼지간볶음을 먹기 때문이다. 허삼관은 그동안 자신과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자신의 피와 맞바꾸었다. 그렇다면 돼지간볶음을 먹는 일이란 그 불행을 씹어 삼키는 일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허삼관은 불행과 마주하지 않고, 처음으로 불행을 걷어 낸 돼지간볶음을 먹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 음식이 어찌 맛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허삼관은 예순이 되었고, 병원은 그의 피를 받아주지 않는다그는 더 이상 불행이 닥친다해도 그 불행 을 감당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불행과 맞바꿀 수 있는 유일한 재산을 모두 소진해버렸다. 그 재산이란 그의 젊음 혹은 건강에 다름 아니다. 삶의 온갖 역경 속에서 허삼관이 건져 올린 전리품이란 돼지간볶음 세 접시와 황주 한 병, 그것이 전부라면, 승리반점에서의 식사를 하는 허삼관의 삶을 '승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장면은 행복이라고도 그렇다고 슬픔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그 분화하는 틈속에 허삼관의 삶을 위치시키고 있다.  곧 그것이 삶일 것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줄은 이렇다.

 

좆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지만 자라기는 길게 자란다

 

은 늘 삶을 구조하는 형식들의 뒤에 뒤쳐져 있고, 그러한 형식들이 삶을 옭아맨다 할지라도 삶은 그 속에서도 언제든 살아 그 형식들을 뒤따른다. 명심할 것은 삶의 형식들이 바뀔지언정 삶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 이러한 삶의 형식이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삶은 어떤 식으로든 그저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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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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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물

김병수(): 연쇄살인범이다. 지금은 알츠하이머(치매)에 걸린 70대의 늙은이다. 40대 때 은희의 엄마를 죽이고 돌아오다 교통사고가 난다. 그때 뇌를 다쳤기 때문인지 아니면 은희 엄마를 죽이면서 위안을 얻었기 때문인지, 살인을 완전히 끊는다. 그리고 은희를 딸처럼 기르며 현재까지 살아오고 있다. 그런데 ‘가 살고 있는 지역에 연쇄살인범이 나타난다. 나는 때를 같이 하여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는다.는 연쇄살인범이 박주태라고 단언한다. ‘는 우연히 박주태와 접촉사고를 낸 일이 있는데, 그 때 본능적으로 그가 범인임을 알게 되었다. ‘는 처음으로 유희가 아닌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살인을 계획한다.

은희'나'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지만, 엄마를 죽인 연쇄살인범인지는 모른다. 치매에 걸린 '나'를 간호한다. 그녀는 농대를 나와 지역의 연구소에서 식물의 품종을 개량하는 일을 한다. 식물은 말을 하지 않는다. 은희는 그런 식물을 좋아한다. 은희는 의 실체를 모르면서 를 아버지로 여기는 것처럼, 박주태의 실체를 모르면서 그를 사랑하고 결혼하기를 희망한다. 은희는 어디에나 있거나 어디에도 없거나 둘 중 하나다.

박주태: 역시 연쇄살인범. 부동산업을 하며, 사냥을 즐긴다. ‘를 죽이기 위해 은희에게 접근했다, 고 '나'는 믿고 있다.

 

2. 단평

죽음의 위험에 놓여 있는 은희를 보호하고위험의 원인인 박주태를 죽인다면, 이것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이런 결말을 기대했다면 완전히 작가의 의도에 보기 좋게 낚인 것이다. 작가는 새로운 결말을 예비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결말은 새로운가, 이 물음은 새로운 문제를 발명해내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상응한다. 이것이 이 소설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연쇄살인과 알츠하이머가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 아니 정확히는 알츠하이머가 이 소설의 원동력이다. 연쇄살인도 알츠하이머라는 소재도 낡았다. 이 낡은 소재를 얼마나 새롭게 만들 수 있는가, 가 소설을 평가하는 또 다른 잣대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영하는 낡은 소재를 새로운 문제를 통해 쇄신하고 있는가, 이것이 이 소설을 평가하는 최종적 척도 일 것이다. 김영하는 이 낡은 소재를 낡은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소설 초반부터 젠체하며 김영하는 이것을 기억의 문제로 치환한다. 우리의 기억은 완전한가, 라고 묻고 있다.

단호히 말해주마! 그 따위 물음 지겹다.

 

3. 해설에 대해

이 소설의 제목은 '살인자의 기억법'이다. 신형철은 김훈을 비평하면서 라깡의 테제를 들고와서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김훈의 소설은 방황에 대한 소설이 아니다. 방황하는 것, 그 헛것, 설사 체제 순응적 방황이라 할지라도 그 헛것, 그 허위의 밥통을 깨뜨리지 않는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빈 밥통인지를 알면서 그 빈 밥통을 부여잡고 사는 삶은, 빈 밥통에 무언가를 채우려는 삶보다 더 가혹할 것이다. 더 지난할 것이다. 김훈의 소설은 그러한 허무를 살아내는 자의 지난함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허무를 살아내는 자들이 바로 우리라고 말한다. 김훈의 글은 체제순응적인 글이 아니라 허무한 삶을 허무로 끝끝내 살아내고 마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신형철이 붙인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라는 멋드러진 제목은 이 소설(<<살인의 기억법>>)을 위해 아껴 두는 것이 좋을 뻔했다. 이 소설을 비평한 권희철은 남성적인 소설’, ‘강인한 사내에 관한 소설 성숙한 남성에 관한 소설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을 수 없는 농담, 사드-붓다의 악몽>이라고 제목했다. 하지만 권희철은 뭔가 단단히 착가하고 있다. 이 소설의 '나'는 연쇄살인범이었다는 사실조차 불명확한 어떤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하다면 여기 어디에 '강인한 사내'가 자리할 곳이 있단 말인가. 이 소설은 속지 않으려는 자의 방황에 대한 이야기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4. 작가의 말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작가의 말>이다.

 

이 소설은 유난히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 애를 먹었다 하루에 한두 문장씩밖에는 쓰지 못한 날이 많았다. 처음에는 꽤나 답답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게 바로 주인공의 페이스였다.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 아닌가. 그래서 마음을 편히 먹고 천천히 받아 적기로 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이것은 내 소설이다. 내가 써야 한다. 나밖에 쓸 수 없다.”와 같이 간지 나는 말은 낭비일 뿐이다. 김영하의 소설은 어중간하게 지적이며 어중간하게 대중적이다. 그래서 그와 견줄 수 있는 작가는 이문열 정도다. 

 

인물을 정확히 세우고 인물의 말을 받아 적으면 소설은 저절로 굴러간다. 하지만 시는 그렇지 않는다. 상황은 결코 말하는 법이 없으니까. 그래서 시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은 시를 일인칭 자기고백체라고 말한다. 이보다 더 무식한 말이 어딨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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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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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소설은 삶을 올곧이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투쟁과 고투에 관한 기록이다. 둘은 모두 하나씩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로자 아줌마는 독일군에게 끌려가 겨우 살아온 유대인이었으며, 모모는 3살 때 버려졌다. 하지만 이들은 행복을 부여잡거나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 치지 않는다. 행복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달라붙으려 할 뿐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모른다. 불행은 외부에서 오기도 하고 내부에서 비롯하기도 하는데, 외부에서 오는 불행을 피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내부에서 일어나는 불행은 피할 수 없다. 불행하다는 마음에는 발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행복은 잡을 수 있더라도 움켜쥐지 않는 것이 좋으며, 불행은 벗어나기 보다는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다. 삶은 그저 불어오는 바람과 같고, 우리의 삶은 그 바람에 날리는 낙엽과도 같다. 이런 행복과 불행을 신경쓰다보면 우리의 삶은 거기에 종속되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삶을 올곧이 나의 것으로 소유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그냥 낙엽과 같이 나부끼면 된다. 앞에서 이 소설을 투쟁과 고투의 기록이라 했으나, 정정해야겠다. 모모와 로자 아줌마는 그냥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어떤 기대도 없이, 어떤 목표도 없이 그렇게 삶이라는 바람을 타고 흘러가는 일, 이것이 삶이다. 결국 삶은 삶으로 이어질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죽음의 등질성만이 지난한 삶에 대한 대가일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이 스스로 다가와 이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만이 이 쓸모없는 생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하게 가치있는 일일 것일 테니. 

 

통찰들

1. 존재의 증명

너를 낳아준 사람이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너 자신뿐이란다.”(46~47)

 

2. 암사자와 인간

로자 아줌마는 동물들의 세계가 인간세계보다 훨씬 낫다고 했다. 동물들에게는 자연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라나. 특히 암사자의 세계가 그러하단다. 로자 아줌마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암사자를 칭찬했다. 나는 잠들기 전에 이따금 상상 속에서 초인종 소리를 들었다. 문을 열고 나가보면, 거기에는 새끼들을 돌보기 위해 집 안으로 들어오려는 암사자가 한 마리 있었다. 로자 아줌마는 바로 그것이 암사자들의 특성이라고 했다. 암사자들은 새끼를 위해서라면 절대 물러시지 않고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데, 그것이 정글의 법칙이며, 암사자가 새끼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암사자를 신뢰하지 않을 거라고 얘기했다.

나는 거의 매일 밤 나의 암사자를 불러들였다. 암사자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로 뛰어올라 우리들의 얼굴을 핥아주었다. 다른 아이들도 모두 그러길 원했고, 또 내가 나이가 가장 많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을 돌봐야 했다. 그런데 수사자들은 평판이 좋지 않았다. 세상 모든 수컷들과 마찬가지로 수사자들은 자기 혼자 먹고살기에도 바쁘기 때문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내 암사자가 올 거라고 하면 아이들은 이불 속에서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73~74).

 

3. 두려움

두려워할 거 없어.”

그걸 말이라고 하나. 사실 말이지 두려워할 거 없다라는 말처럼 얄팍한 속임수도 없다. 하밀 할아버지는 두려움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믿을 만한 동맹군이며 두려움이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면서 자기의 오랜 경험을 믿으라고 했다(108).

 

4.

땅바닥에 누워서 눈을 감고 죽는 연습을 해봤지만, 시멘트 바닥이 너무 차가워 병에 걸릴까봐 겁이 낫다. 나는 마약 같은 너절한 것을 즐기는 녀석들을 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생의 엉덩이를 핥아대는 짓을 할 생각은 없다. 생을 미화할 생각, 생을 상대할 생각도 없다. 생과 나는 피차 상관이 없는 사이다.

 

5. 인간이 아닌 개에게만 안락사가 허용되는 이유

로자 아줌마가 개였다면, 진작에 사람들이 안락사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사람에게보다 개에게 더 친절한 탓에 사람이 고통 없이 죽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126).

 

6. 아름다움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275).

 

7. 정상(인)이란

나는 절대로 정상은 안 될 거예요, 선생님. 정상이라는 작자들은 모두 비열한 놈들뿐인걸요.”

정상인을 말하는 거다.”

나는 정상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예요, 선생님…….”(268)

 

 

행복과 불행

1. 안에서 생기는 폭력은 다리가 없다.

은다 아메데 씨가 편지 내용을 불러주는 동안, 왼쪽 경호원은 소파에 앉아서 손톱에 윤을 내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오줌을 누러 나가려는데 그 멍하니 있던 작자가 나를 붙잡아 자기 무릎에 앉혔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더니 모자를 뒤로 젖히고 말했다.

널 보니 우리 아들 생각이 나는구나. 모모야. 방학이라서 엄마와 함께 니스 해변엘 갔는데, 내일 돌아오지. 녀석의 생일이거든. 생일 선물로 자전거를 사줄까 하는데, 우리 아들녀석하고 놀고 싶으면 우리집에 오도록 해라.”

엄마도 아빠도 자전거도 엇이 지낸 지 벌써 몇 년째인데, 이제 와서 이 작자가 나를 못 견디게 만들다니. 여러분은 내 말을 이해랄 것이다. 좋다. ‘인샬라(신의 뜻대로)’. 하지만 이건 진심이 아니다. 단지 내가 훌륭한 회교도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뿐이다. 하여튼 그 사건이 내 감정을 건드렸고, 나는 너무 열이 올랐다. 그런 감정은 내 속에서 치밀어오른 것이었고, 그래서 더운 위험했다. 발길로 엉덩이를 차인다든가 하는 밖으로부터의 폭력은 도망가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안에서 생기는 폭력은 피할 길이 없다. 그럴 때면 나는 무작정 뛰쳐나가 그대로 사라져버리고만 싶어진다. 마치 내 속에 다른 녀석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울부짖고 땅바닥에 뒹굴고 벽에 머리를 찧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그 녀석이 다리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니까. 아무도 마음속에 다리 따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까 기분이 좀 나아진다. 그 녀석이 조금은 밖으로 나가버린 기분이다. 여러분은 내 말을 이해하는지?(62~63)

 

2. 마약과 행복: 행복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기위해선 마약을 멀리해야 한다.

나는 마약에 대해서는 침을 뱉어주고 싶을 정도로 경멸한다. 마약 주사를 맞은 녀석들은 모두 행복에 익숙해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행복이란 것은 그것이 부족할 때 더 간절해지는 법이니까. 하긴 오죽이나 간절했으면 주사를 맞았을까만은 그 따위 생각을 가진 녀석은 정말 바보 천치다. 나는 절대로 꼬임에 넘어가지 않는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몇 차례 마리화나를 피운 적은 있지만, 그래도 열 살이란 나이는 아직 어른들로부터 이것저것 배워야 할 나이다. 아무튼 나는 그런 식으로 행복해지기보다는 그냥 이대로 사는 게 더 좋다. 행복이란 놈은 요물이며 고약한 것이기 때문에, 그놈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어차피 녀석은 내 편이 아니니까 난 신경도 안 쓴다. 나는 아직 정치를 잘 모르지만, 그것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득이 되는 것이라고 들었다. 행복을 찾는답시고 천치 짓을 하는 녀석들을 막을 법은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주절거리는 것뿐이다. 어쩌면 내가 잘못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고. 하지만 나는 행복해지자고 주사를 맞는 짓 따위는 안 할 거다. 빌어먹을, 나는 이제 행복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 그러다가 또 발작을 일으키면 큰일이니까. 그런데 하밀 하아버지는 내가 표현할 수 없는 것, 바로 그것을 찾아야 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 바로 거기에 그것이 있다고 말했다(99~100).

 

3. 행복이란 손 닿는 곳에 있을 때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뜻밖에 좋은 일이 생겼다. 오페라에 있는 백화점에 심부름을 갔는데, 그곳에는 부모들을 따라온 아이들이 공짜로 구경할 수 있는 서커스 모형 진열장이 있었다. 그곳에 간 건 이미 열 번도 더 됐지만 그날은 너무 이른 시각이어서인지 아직 커튼이 쳐져 있었다. 나는 잘 모르는 한 흑인 청소부와 잡담을 나누었다. 그는 흑인들이 많이 사는 오베르빌리에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는 담배를 한 대씩 나눠 피웠다. 나는 잠시 서서 그가 거리를 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일은 아주 멋진 일이었으니까. 그런 후 나는 백화점으로 들어가서 신나게 구경했다. 서커스 진열장의 가장자리에서는 실제보다도 훨씬 더 큰 별들이 눈짓을 하는 것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서커스는 진열장의 한가운데에서 펼쳐졌다. 어릿광대들은 물론이고, 달에 날아갔다 내려오며 행인들을 향해 손짓을 하는 우주비행사도 있었고, 능숙한 솜씨로 공중을 날아다니는 곡예사도 있었다. 흰색 발레복을 입은 무용수들이 말 잔등에 올라탄 채 묘기를 부렸고, 근육이 울퉁불퉁한 힘센 장사들이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것들을 들어올렸다. 물론 그것들은 사람이 아니고 다 기계장치였다. 춤추는 낙타도 있었고, 마술사도 있었다. 마술사의 모자에서는 토끼들이 줄줄이 나왔는데, 그것들은 트랙을 한 바퀴 돌고는 다시 모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구경거리는 끝이 없었다. 나는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광대들은 원래 그렇듯 울긋불긋한 옷차림이었다. 푸른 색, 흰색, 그리고 무지개색 옷을 입고 코에는 반짝이는 빨간 전구를 달고 있었다. 무대 뒤편에도 역시 웃기기 위한 장치로 구경꾼들을 만들어서 늘어놓았는데, 그것들은 끊임없이 박수를 쳐대고 있었다. 우주비행사는 달에 착륙할 때마다 일어서서 인사를 했고, 그때마다 기계장치는 그가 여유 있게 인사를 하도록 기다려주었다. 이제 다 봤다 싶을 때면 우스꽝스런 모습의 코끼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창고에서 나와서 트랙을 몇 차례씩 돌았는데, 맨 끝에 나온 코끼리는 이제 막 태어난 것처럼 분홍빛이 도는 아기코끼리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광대들이었다. 그들은 이 세상 무엇과도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기상천외한 머리 모양에다 물음표처럼 생긴 누하며, 모두들 너무 멍청해서 늘 히히거렸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로자 아줌마를 생각했다. 로자 아줌마가 광대였다면 참 우스웠을 텐데, 광대가 아니라서 무척 아쉬었다. 광대들의 바지는 오르락내리락하며 사람들을 웃겼고, 들고 있는 악기에선 진짜 소리 대신 불꽃과 물이 뿜어져나왔다. 광대는 네 명이었다. 그중 대장은 뾰족모자에 부푼 바지를 입은 흰둥이로, 다른 광대들보다도 훨씬 얼굴이 휘었다. 부하 광대들은 그에게 굽신거리며 군대식 경례를 했고, 대장은 그들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발길로 차는 일만 반복했는데, 그는 발길질을 하라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게 짓궂게 보이기보다는 그저 기계적인 동작으로 보일 뿐이었다. 녹색 점이 박힌 노란색 옷을 입은 광대는 넘어져도 마냥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주로 줄타기를 하는데, 번번이 실패를 하면서도 웃는 걸 보면 철학자 광대인 모양이었다. 그는 갈색 가발을 쓰고 있었는데, 줄 위에 첫 발을 내딛고 다음 발을 내딛고는 줄 위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벌벌 떨었다. 그때마다 그 가발의 머리칼이 사방으로 뻗쳐 떨리면서 구경꾼들이 배꼽을 잡게 만들었다. 무서움에 떨고 있는 광대처럼 우스운 것도 없었다. 그의 친구 광대 하나는 온통 푸른색으로 차려입고는 작은 기타를 둘러메고 달을 보며 노래 부르며 온갖 주책을 떨었다. 그는 무척 착해 보이는 얼굴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주책바가지였다. 마지막 광대는 하나이면서 둘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분신 하나를 매달고 있었는데, 하나가 움직이면 다른 하나도 똑같이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그 둘은 함께 묶여 있었기 때문에, 서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가 없었다. 그 구경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그들 모두가 실제 인간이 아니라 기계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고통받지 않으며 늙지도 않고 불행에 빠지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네 인간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는 낙타에게조차도 호감이 갔다. 녀석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마치 거드름을 피우는 중년 부인처럼 몸을 좌우로 흔들며 걸어다녔다. 이 서커스의 세계는 인간 현실과는 동떨어진 행복의 세계였다. 철사줄 위에 있는 광대는 절대 떨어질 리가 없었다. 열흘 동안 나는 그저 떨어지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그가 떨어지더라도 하나도 아프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것은 정말 별세계였다. 나는 너무 행복해서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손 닿는 곳에 있을 때 바로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103~106).

 

 

자연법칙

1. 부속품이 된 인간의 자연법칙

사람들은 모두 자연의 법칙을 지켜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자연 속의 예비 부속품들인 인간부터 지켜야 할 것 같다(181).

 

2. 자연 법칙의 거부

자 나하고 뭘 좀 먹자. 그럼 좀 나아질 거야.”

아니에요, 고맙지만 난 이제 아무것도 먹지 않아요.”

뭐라구?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구?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니?”

나는요, 자연의 법칙 따위에 얽매이지 않아요, 롤라 아줌마[여장남자, 매춘부].”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자연의 법칙 같은 것은 개나 물어가라고 해요.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어요. 구역질나는 그 따위 것은 없어져버렸으면 좋겠어요(304).

 

3. 동정심 없는 자연 법칙

나는 그녀의 몸에 향수를 몽땅 뿌려주고, 자연의 법칙을 감추기 우해 온갖 색깔로 그녀의 얼굴을 칠하고 또 칠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뚱이는 어느 곳 하나 성한 데 없이 썩어갔다. 자연의 법칙에는 동정심이란 게 없으니까(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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