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안 보여주고 싶은 책이 있다. 나만 읽고 싶고 나만 알고 싶은 책들이 있다. 저 말들을 삼켜 마치 내 것인냥 쓰고 싶어서 일 것이다. 김홍희의 책들이 그런 책들이다. 그는 사진으로도 말하고 글로도 말한다. 글에 대한 최대의 찬사가 시(詩)라면 그의 글과 사진 둘 모두에 해당하는 말일 것이다.
집은 돌아갈 곳의 대명사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것이 천막으로 얼기설기 지은 집이든 나무로 지은 집이든. 물리적인 집이 아니라 온유함을 가리키는 마음의 집이라면 더욱 행복하다. 온유는 여유에서 나오고, 여유는 삶의 확신에서 나오며, 삶의 확신은 방랑에서 나온다. 이때의 방랑은 삶의 궁극을 묻는 걸음걸이여야 한다. 방랑의 동반자는 진리로 만든 나무지팡이일 수도 있고, 차가운 쇠로 깍은 카메라일 수도 있다. 그것은 슬픔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든 존재에 대한 연민을 바탕으로 해야만 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살아내려고 온 힘을 다한다. 스스로 서 있기조차 버거운 삶을 하나씩 지고는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숙명이다. 스스로를 연민하는 자만이 다른 산 것들을 연민할 수 있다. 살아 있는 다른 모든 것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자는 스스로를 연민했던 자이고 긍휼히 여겼던 자이다. 그는 시와 공이 함께할 때 우리의 인식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존재이다. 그 인식은 시공을 벗어날 때 비로소 사라진다는 것 또한 알고 있는 자이다. 모든 방랑의 목적지는 바로 그곳이다(<<몽골방랑>>, 34~35면).
사진기를 들고 방랑하는 그를 생각하면 덩달아 고독해진다. 방랑을 통해서 "삶의 확신"에 이르고, 여기에서 다시 "여유"를 찾고, "온유"함을 배우는 그 연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방랑의 기저에는 연민이 있다. 그 연민은 싸구려 동정심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그의 운명과 동일한 파장을 가진 것들에서 연민을 느끼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발견한다. 방랑 속에서 그는 어김없이 사람을 만난다. 그렇게 만난 사람 중의 하나가 '무서운 눈'을 가진 매 사냥꾼이다.
무서운 눈에는 두 종류가 있다. 세상을 돌며 무서운 눈을 가진 사람들을 찍으며 알게 된 것이다. 하나는 남이 두려워하기를 바라는 가장 된 무서운 눈이고 다른 하나는 타고난 무서운 눈이다. 전자는 살면서 익힌 사회적 습관이고 대개 용렬하다. 후자는 타고난 것이라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뼛속에서부터 익혀온 사람이다. 가장된 눈빛은 카메라를 들이대면 대개 웃음으로 얼버무리거나 미동한다. 그러나 태생적 눈빛은 야수처럼 미동하지 않고 웃지도 않는다.
카메라가 코앞에 걸리고 셔터가 끊어졌다. 역시 사내의 눈빛은 움직이지 않았다. 송곳처럼 한쪽으로 고정된 채 오직 '본다'로 일관되어 있었다. 어떤 형용사적 감정이나 부사적 서술이 없는 말 그대로의 동사, '보다' 그 자체의 눈빛이었다.
나는 이런 사내들의 눈빛을 지구촌을 여행하며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눈빛은 강렬하고 무섭지만 그 속은 부드럽다. 내공이 그대로 눈빛으로 드러나는 사내들은 대개 용감하며 관대하다. 당연히 손님에게는 후하다(<<몽골방랑>>, 155~158).
비록 '무서운 눈'이라 했으나 그것이 어디 무서운 눈이겠는가. 언어는 문맥을 떼어 놓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무서운 눈'은 저 문맥을 벗어나면 아무 것도 아닌 말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맥 속에서 '무서운 눈'을 새롭게 읽어내야 한다. 무서운 눈을 가진 사람은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뼛속에서부터 익혀온 사람"이다. 이 설명은 조금 부족한 듯하다. 하지만 아래의 진술과 더불어 생각해보면 분명해진다. "송곳처럼 한쪽으로 고정된 채 오직 '본다'로 일관"하는 사람 역시 무서운 눈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니 무서운 눈이란 가혹한 세상 앞에 위축되지 않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눈일 것이다. 세상의 협작과 모략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자의 눈, 참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바라보고, 심지어는 참을 수 없는 것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 자의 눈일 것이다. 김홍희는 그런 "눈빛을 지구촌을 여행하며 몇 번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어쩌면 그가 처음으로 대면한 무서운 눈은 그의 스승인 마쓰자키 선생의 그것일지도 모른다.
“너희들은 수영을 잘한다. 강에 사람이 떠내려간다. 아직 살아 있다. 사람을 구할 수도 있고 카메라를 들고 있으니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어떻게 할래? 너!”
내 앞자리의 학생이 머뭇거리자 여지없이 밀어낸다.
“너!”
산발적으로 날아다니는 그의 손가락 끝은 칼날처럼 날카롭다.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우리로서는 생각을 가다듬어본 적이 없는 그런 질문의 연속이었다. 카메라를 내던지고 사람을 구한다고 해도 밀려나고 사진을 찍고 난 뒤 구한다고 해도 밀려난다. 그런 상황이 되면 생각해보겠다는 학생들은 완전히 바보 취급을 당하며 밀려났다. 그는 ‘바보 같은 놈’이라는 말을 학생들의 뒤통수에 꽂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너!”
갑자기 칼끝이 내 눈을 가리켰다.
“사진을 찍고 말겠습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 잘난 사진을 찍고 있어?”
도마에 오른 고기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도망갈 곳이 없었다. 마쓰자키 선생은 분명 우리들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그런 공격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넌 잔인한 놈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분명 너를 잔인한 놈으로 낙인찍을 거다.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사람의 사진을 찍어? 한 장의 사진을 위해? 그럴 수 있어? 넌 잔인한 놈이야!”
그는 집요했다. 몇 남지 않은 학생들은 숨을 죽이고 우리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찍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이유를 대라.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여? 넌 살인자야. 정당한 이유를 대지 않는 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모르겠다는 말 외에는. 답을 알기는 알겠지만 말로 할 수가 없다는 변명을 들이대었을 때 그는 노기를 띠면서 몰아붙였다.
“아는데 말을 못해? 니가 니 엄마를 아는데 엄마라고 안 부르고 뭐라고 불러?”
난감하다. 천하에 잔혹한 질문이다(<<방랑>> 중)
(<<방랑>>은 2002년에 나온 책인데, 지금은 절판이다. 정가가 9,800원 하는 책인데, 한 중고서점에서 세 배에 가까운 값을 주고 샀다. 아마 네 배 다섯 배여도 샀을 것이다.)
마쓰자키 선생은 강의 첫 시간에 질문을 던져 학생들을 몰아낸다. 그의 질문은 무작위다. 하루에 몇 시간 사진을 생각하는지, 이 강의실에 모기가 있는데 어떻게 할 것인지, 이런 질문들을 마구 던진다. 선생은 그 질문의 정점에서 '천하에 잔혹한 질문'을 던진다. 죽어가는 사람을 구할 것인가, 사진을 찍을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마쓰자키 선생의 눈은 분명 '무서운 눈'일 것이 틀림없다. 김홍희는 사진을 찍겠다고만 말한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다. 이 책의 어디에도 '죽어가는 사람'을 찍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오고 수 년이 지난 뒤 김홍희는 이에 대해 어렴풋이 답하고 있다. 사진을 찍는 동안 그 역시 무서운 눈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허리띠 속에 감춰둔 전대를 풀어 달러 한 장으로 고슴도치의 생명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는 인적 없는 들판에 자유롭게 풀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슴도치의 고통이 순박한 사내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잡혀온 그의 절망이 더 이상 깊어질 수 없는 나락에 떨어진 순간, 나의 셔터는 끊어졌다.
이때의 고슴도치와 나는 동격이다. 고슴도치는 이 순간에서 달아나려 할 뿐이고, 나는 최절정의 순간을 담으려 할 뿐이다. 고슴도치는 지금 직면한 운명에 거역을 꿈꾸고, 나는 더할 수 없는 그의 절망을 카메라에 담는다. 아이러니한 운명의 만남이다. 그때 그 순간이 고슴도치에게 주어졌듯, 내게도 주어진 것이다. 그와 나는 피할 수 없는 다급한 운명 안에서 조우했고, 우리는 각자 할 일을 했다(<<몽골방랑>>, 31면).
삶은 가혹하다. 저토록 가혹하다. 그래도 바라볼 수 있을까. 바라보아야 한다. 죽을 운명에 처한 고슴도치의 다급함과 물에 떠내려 가는 사람의 다급함, 그 다급함만큼이나 사진을 찍는 사람의 운명 역시 다급하다. 이미지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흘러 가버린다. 흘러 가버린 것은 죽음과 같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러니 어찌 보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찍지 않을 수 겠는가. 사진가의 윤리는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생명의 온전한 드러남을 보는 것이다. 사진가의 윤리는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다급함을 포착하는 것이다. 죽음의 운명을 거스르는 최선의 방법은 죽음이다. 사진가의 운명에서 벗어나는 최선의 방법은 셔터를 누르는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죽은 자는 죽음으로써 영원히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으나, 사진가는 셔터를 누르는 그 순간에만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왜? 사진을 찍는 그 순간만큼은 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바깥에는 내 생에 한유했던 어떤 비밀의 오후가 멈추려 했다. 나는 얼른 카메라를 들었다. 카메라의 셔터는 깜박이는 눈과 같다. 어떤 것을 보는 순간은 뜬 눈이지만, 메모리가 되는 시간은 눈을 깜박이는 탄지의 순간이다. 그러니 실제로 촬영되는 어떤 광경이란 실제로는 사진가가 보지 못하는 순간이다(<<몽골방랑>>, 2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