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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전환 -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ㅣ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8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 길(도서출판) / 2009년 7월
평점 :
1. 더러운 걸레로 상 닦기
5년 전 한 남자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소비가 늘고, 기업의 투자가 늘어나고 외국투자가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남자가 늘린 것이 이 남자의 재산일 뿐이라는 것을, 프로크루스테스처럼 국민을 늘려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남자는 경제를 꼭 살리겠다고 말했다. 우리 모두를 잘 살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 남자는 노동법과 건축법 위반, 선거법 위반, 폭행, 주가조작, 사기 등 전과 14범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럼에도 이 남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것은 모두 과거일이라고, 큰일을 하다보면 그럴 수 있다고 했다. 사람들의 바람대로 이 남자가 대통령이 되었다. 얼마 후 이 남자는 국가를 자신의 수익모델쯤으로 여겼다. 비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쏟아지는 비리들 속에서 법에 근거한 합당한 처벌은 없었다. 도무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 윤리와 도덕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사회를 만들었다.
유시민은 한 인터넷 방송에 출연해서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당시 민심은 걸레인 줄 알아, 더러운 줄 알아, 그렇지만 저걸로 상 닦을 거야, 그 분위기였어요.” 우리는 이명박이라는 더러운 걸레로 상을 닦고야 말았다. 우리는 어쩌다가 이런 몰상식을 범하고 만 것일까. 우리는 이 (빌어먹을) 남자가, 이 의인법과 활유법의 (환장할 놈의) 대가가 생명체도 아닌 경제를, 그렇다고 죽지도 않은 경제를 살리는 소생술을 보고 싶어 했다. 이 쇼를 위해 우리는 5년을 매장했다. (3대가 염병에 걸려도 시원치 않은) 이 남자가 그토록 떠벌렸던 ‘이명박 효과’가 일어나 닫혔던 지갑을 열고 돈을 펑펑 쓸 수 있길 바랐다. 우리는 단지 잘 살길 바랐다. 하지만 그러한 간절한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고,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고, 다만 가게 부채가 ‘늘어’났다. 그랬던 우린 또 어쨌는가! “다시 한 번 ‘잘 살아보세’ 신화를 이룩하겠다”는, “중산층을 70%로 만들겠다”는, 말 아닌 말을 말이 아닌지도 모르고 내뱉는 자로, 이번에는 남자가 아닌 여자로, 무늬만 다를 뿐 속은 다를 것이 없는 여자로 갈아탔다. 환승 할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같은 번호의 버스를 타고야 말았다. 그런 점에서 유시민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남자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여자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경제를 살릴 수 있으리라는 환상 때문이다. 이 여자의 아버지는 온갖 악행을 저질렀음에도, 경제성장은 그런 모든 악행들을 상회하는 가치로 존재한다. 장물취득과 관련된 악취가 노골적으로 풍기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이 여자를 대통령으로 뽑고야 말았다. 이 여자에게 흐르는 저 더러운 피에 경제성장이라는 신화의 피도 같이 흐를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니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어쩌다 우리 삶 속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왔던 고매한 가치들을 경제 따위에게 저당 잡힌 것일까, 우리는 어쩌다 좋아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게 된 것일까, 우리는 어쩌다 노동의 대가를 돈과 교환할 수 있다고 굳게 믿게 된 것일까, 우리는 어쩌다 돈이 삶의 가장 꼭대기에서 군림하도록 내버려 두었는가, 이런 것들을 말이다.
2. 시장경제 혹은 자본주의적 인식의 계보학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바로 여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거대한 전환’이란 이익 또는 시장경제가 펼쳐 놓은 유토피아적 비전을 맹신하게 된 그러한 전환점들을 말한다. 이쯤에서 그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개인의 행복과 전체의 행복에 대해 대단히 해로운 [시장경제] 원리가 작동하여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적 환경, 그[인간]의 이웃 동네, 또 공동체 내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 그의 직업적 기술 등을 무차별하게 때려 부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진정한 문제는 예전에 그의 경제적 존재가 묻어들어 있었던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들이 완전히 황폐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산업 혁명은 거대한 규모의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고 있으며, 빈곤 문제란 이 거대한 사태의 경제적 측면에 불과하다(369면).
이 책은 “저질 인간으로 타락”으로 이끄는 이러한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이를 가능하게 만든 잘못된 조건들을 계보학적으로 추적해 가고 있다. 폴라니는 고전정치경제학이 (요컨대 전쟁을 일으키고, 전염병을 치료할 약을 만들지 말아야 하며, 굶어죽은 사람을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이상한 이론을 펼친 멜서스, 임금의 상승이 이뤄지면 자본의 이윤이 줄어들고 다시 투자량이 감소하며 추가적인 생산이 멈추고 말 것이라며 임금 기금설을 주장한 리카도, 그리고 구빈법의 폐지를 주장한 에드먼드 버크와 벤담, 최소한의 정부를 고집하며 자유방임주의를 말한 애담 스미스 등이) 공통으로 기반하고 있는 것이 타운센드의 논고라고 말한다. 타운센드는 이 책에서 하나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칠레 연안 태평양의 로빈슨 크루소라는 무인도에 후안 페르난데스(Juan Fernandez)가 나중에 식량으로 쓰기 위해 몇 마리의 염소를 풀어놓았다. 그랬더니 염소의 수가 ‘바다의 모래알’만큼이나 늘어났다. 그러자 스페인 상선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사략단이 이 섬을 식량 창고로 삼았다. 당황한 스페인 정부는 여기에 암수 한 쌍의 개를 이 섬에 풀어 놓았다. 여기서부터는 폴라니를 따라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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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들 또한 그 염소들을 잡아먹으면서 대단히 큰 수로 불어난 반면, 염소들의 수는 줄어들었다. “그러자 새로운 종류의 균형이 다시 나타났다”고 타운센드는 말한다. “양쪽 생물 종 모두에게 가장 약한 것들이 제일 먼저 희생당했고, 가장 활동적이고 센 것들은 목숨을 보존했다.” 여기에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인류의 수를 조절하는 것은 식량의 양이다.”
염소라는 식량은 한정되어 있다. 개들이 늘어나면 그 한정된 식량은 바닥이 날 것이다. 맬서스의 괴상한 인구론은 바로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맬서스의 지난한 인구론에 관해서라면,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웅진지식하우스, 2009)를 권한다). 하지만 그 뒷부분의 이야기를 맬서스는 언급하지 않는다. 개의 수와 염소들의 수가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염소들은 개들이 쫓아오면 암벽으로 도망칠 수 있었고, 도망치다가 약한 염소는 개에게 잡혀 먹었다. 그러했기에 개와 염소 사이에는 균형이 생겼던 것이다. 그 균형은 정부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부는 치안을 유지하는 규모로 작동해도 된다. 또한 약한 염소들에 대응되는 빈민들은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좋다. 그들은 약하지 않은 인간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빈민은 구제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는 얼마나 빈틈없이 매끈한가!) 타운센드는 짐승의 활동에서 인간의 삶의 조건을 유추해내고 있다. 인간 사회에서 정부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라는 정치학의 근원적 물음들을 타운센드는 “인간 공동체를 아예 동물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함으로써 그 질문을 따돌려”버렸다(342면). 폴라니는 바로 이 지점, 인간과 짐승을 동일한 선상에서 바라보고 있는 이러한 관점들에 대해 분개한다(2부 10장 참조).
그는 인류학적 접근을 통해 자본주의가 인간을 정의하는 방식을 뒤집고 있다. “[인간이] 어떤 사물을 다른 것과 물물교환·교역·교환하고자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는 또는 “인간은 물질적 재화의 소유라는 개인적 이해를 지켜내기 위해 행동”한다, 는 애담 스미스식의 인간 정의를 폐기한다(181면). 어떤 부족 사회도 개인만의 경제적 이해가 그 개인의 행동에서 으뜸가는 중요성을 가지는 일은 도무지 벌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부족 공동체는 구성원 중 특정인을 굶기지 않는다. 공동체 전제가 굶주리거나 위험에 직면하는 일이 있을지언정 특정 개인에 한해서 위험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생산과 분배는 상호성과 재분배의 원리에 의해 지켜진다(2부 4장 참조).
이 책의 가장 드라마틱한 부분은 스피넘랜드 법을 다루고 있는 2부의 7장과 8장이다. 이 법은 영국의 뉴베리 근처 스피넘랜드에서 1795년부터 1834년까지 시행되었다. 이 지역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스스로 벌어들이는 수입과 무관하게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하기 위해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것이 이 법의 골자다(251면). “농촌의 환경을 지켜내고, 전통적으로 내려온 농촌의 위계질서를 강화하며, 농촌 노동자이 모조리 도시로 빠져나가버리는 것을 막고, 농업 경영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농촌의 임금을 올릴 수 있는” 방법으로 이 법은 고안되었다(306면). 하지만 막상 이 법이 시행되자 노동 시장에서 실제로 지불되는 임금이 영으로까지 떨어졌다. 임금저하는 노동을 통해 스스로 생계비를 버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사람들은 자연히 구호 대상 극빈자가 되어갔고, 일을 하지 않아도 보조금은 나왔기에 노동은 백해무익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 중에 구호 대상 극빈자가 되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다. 이들이 이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단결 행동을 통해 표준 임금을 끌어올려야 했지만, 단결 금지법을 재정하여 탈출구를 봉쇄해버렸다. 당연히 자본가들 역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 법은 1834년 전면 폐지되었고 빈민들은 굶어죽도록 방치되었다. 폴라니는 이것을 근대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무자비한 조치”였다고 말한다(259면).
이 법은 현대인들의 의식을 새롭게 주조했다. 빈민이 무조건 구호를 받을 권리는 없다는 것, 노동을 한 만큼의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비록 칼 폴라니가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함의는 이렇다. 공산주의적 경제체제에서 인간은 모두 나태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경쟁하여 더 많이 노력하고 더 많이 일을 할 때 더 많은 임금을 가져갈 수 있다. 열심히 일한다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된다는, 모두가 열심히 일하면 모두 잘 살 수 있다는 유토피아의 환영을 만들었다. 자본주의가 만드는 이런 유토피아가 허구임은 분명해지고 있다. 노동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으니 말이다.
3. 사람 중심의 공동체를 구성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우리는 저마다 경제적 성공을 추구한다. 그 와중에 사람은 늘 배제된다. ‘아름다운 공주가 백마 탄 왕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와 같은 이야기들을 보라. 지금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행복하게 살았다’에만 집중하고 있다. ‘누가’ ‘어떻게’ 행복해졌는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이미 정해져 있다. ‘부자’가 ‘돈을 더 많이 벌면’ 행복해질 수 있다.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와 같은 물음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행복과 부의 양은 비례한다. 그러한 형식의 세상으로 재편되고 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경제적 성공이 아니라 이 성공의 프레임을 벗어나는 일이다. 자본주의적 소망을 철회하는 일이다. 칼 폴라니는, 시장경제는 사람의 영혼을 앗아가고 사람을 동물의 차원으로 강등시킨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빠져 있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중심되는 사회에서 사람이 빠졌다니 그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런 놀라움도 주지 않는다. 충격체험이 삶의 유일한 조건이 되어버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폴라니의 말처럼, 사람들과 함께, 다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그러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문제는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것, 늦어도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 그러나 시간은 늘 ‘너무 늦었음’에 멈춰 있으니, 그 늦음 속으로 우리의 ‘청순한 날’을 더럽히면서, ‘발밑을 빛으로 적시’는 해와 같이, 소리도 냄새도 없이 스며들 때이다(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길, 2007, 5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