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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이란 무엇인가? - ‘0차원의 세계’에서 ‘고차원 우주’까지 ㅣ 뉴턴 하이라이트 Newton Highlight 28
일본 뉴턴프레스 엮음 / 아이뉴턴(뉴턴코리아)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다보면 인문학은 물리학의 찌꺼기처럼 느껴진다. 정말 똑똑한 사람들은 물리학을 하고, 거기에 기생하는 잉여들이 다루는 학문이 인문학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비관적이지만은 아닌 것이, 이론물리학 역시 인문학적 사유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현대 과학의 실험과 측정으로 달성하지 못했던 것들이 이미 수천 년 전 인간의 사유 속에서 완성된 것들이었다. 물리학은 그 증명할 수 없었던 것들을 수식과 실험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문학은 새로운 지평을 향해 날아오른다. 물리학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둘은 쌍생아며, 둘은 서로 공모한다. 다른 것이 있다면 물리학은 사유를 펼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인 실험과 측정을 통해 그들의 사유를 증명한다. 이에 반해 인문학은 오로지 언어로써 사유의 올바름을 증명해낸다.
차원을 다루는 이론물리학은 일종의 시(詩)다. 시는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사유의 영역에서 사유하기를 시작한다. 물리학 역시 우리의 인식 바깥에서 사유를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물리학의 언어는 곧 시다.
이런 식이다. 뉴턴은 만유인력이 아무리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순식간에 작동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과는 항상 지구의 중심을 향해 수직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뉴턴의 만유인력은 작동방식은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러한 힘이 왜 생기는지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사과의 낙하’를 이렇게 설명한다.
“지구가 존재하면 그 주위의 4차원 시공이 휘어진다. 거기에 있는 사과는 4차원 시공의 휘어짐을 따라 말하자면 언덕길을 구르는 것처럼 지구를 향해서 간다.”
사과는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휘어진 시공간을 따라 구르고 있다.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르고 있다니……. 만약 사과가 뉴턴 식으로 떨어진다면 사과의 꼭지부분은 항상 위를 향할 것이고, 사과의 밑 부분에만 멍이 들 것이다. 하지만 사과는 공간을 구르면서 떨어지기 때문에 그 멍이 든 곳은 동일하지 않다. 스마트 폰이 꼭 뒷면이 아니라 화면 방향으로 떨어지는 것은 폰이 반 바퀴 굴렀기 때문이다.
4차원도 재미있지만 0차원이나 1차원도 재미있다. 아니 어떻게 ‘점’이라는 발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을 갖지 않으면서, 넓이도 높이도 가지지 않는 어떤 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선’이라는 것도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선은 넓이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하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선’은 사실 선이라고 할 수 없다. 아무리 얇은 펜으로 선을 그어도 선은 넓이를 가지게 된다. 2차원에서 존재하는 ‘면’은 높이를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얇은 종이도 높이는 있다. 선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면이라고 부르는 면은 물리학의 면과는 거리가 멀다. 점, 선, 면을 알지만 우리는 현실 공간에서 이것을 구현할 수 없다.
3차원 공간에서는 3차원 너머, 그 너머가 더 낮은 차원이라 할지라도 이를 올바로 사유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 불가능이라는 조건에 괄호를 치는 일, (불)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일, 이것이 물리학이다. 이것은 다시 시(詩)다. 3차원보다 낮은 차원을 사유하는 것도 불가능한데 더 높은 차원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푸앵카레는 ‘역발상’을 통해 차원을 정의한다.
단면이 0차원(점)이 되는 것을 1차원(선)이라 한다.
단면이 1차원이 되는 것을 2차원(면)이라 한다.
단면이 2차원이 되는 것을 3차원(입체)라 한다.
단면이 3차원이 되는 것을 4차원(초입방체)라 한다.
4차원은 단면이 3차원이란다. 이것을 수학적 공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들은 아마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닐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력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플라톤은 현실계를 이데아의 그림자로 생각했다. 현실이 이데아의 그림자라면, 현실은 3차원이니까, 이데아는 4차원 시공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보자. 그렇다면 고차원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우리는 왜 4차원을 볼 수 없는 것인가. 오스카르 클라인은 그것이 너무 작아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가느다란 막대는 1차원(선)의 세계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선에는 굵기가 있다. 거기에 개미가 걸어가고 있다면 개미는 앞뒤좌우로 움직일 수 있다. 그러니까 숨어 있는 차원은 작아서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막대를 멀리서 보면, 막대의 표면이 가진 ‘제2의 차원’은 너무 작아 자신도 모르게 무시해 버리기 쉽다. 이와 마찬가지로, 3차원 공간을 구성하는 점 하나하나에 관측할 수 없을 만큼 작은 차원이 숨어 있다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물리학의 설명 방식은 ‘시’를 닮았다. 도달할 수 없는 인식의 지평에서 사유를 시작하는 일, 그리하여 진부함 너머에 존재하는 진귀한 사유를 펼친다. 이 새로운 것들은 아름답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수식과 사랑을 나누고 시인들은 언어와 사랑을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