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이 말해주듯, 이 소설은 허삼관의 매혈에 관한 이야기다. 허삼관은 통 털어 피를 열 번 판다. 피를 팔기 전엔 오줌보가 터지도록 물을 마시고, 400ml의 피를 팔고, 판 후에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돼지간볶음과 데운 황주를 주문한다. 피를 팔기 전과 판 후의 행동은 반복되지만, 피를 팔아야 하는 상황은 항상 다른 방식으로 찾아오고, 피를 판 후에 받게 돈의 쓰임 역시 항상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 삶을 이루고 있는 형식은 항상 같을지 모르나 그 세부는 다르다는 간명한 이야기를 이 소설은 위트 넘치게 펼쳐 내고 있다.

문화대혁명 때 허삼관의 아내 허옥란은 가장 번잡한 거리에서 기생 허옥란이란 나무판자를 걸고 하루 종일 의자 위에 서 있는 벌을 받는다. 허삼관은 세 아들에게 어머니에 밥을 가져다주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부분이 <<허삼관매혈기>>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낸다.

 

(……) 허삼관은 일락이에게 엄마한테 물과 밥을 가져다주라고 했다. 그러나 일락이는 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 이락이한테 가라고 하세요.”

그래서 이락이를 불러놓고 일렀다.

이락아, 우리는 다 밥을 먹었지만, 엄마는 아직 못 드셨잖니. 그러니 네가 엄마한테 밥을 좀 전해드려라.”

이락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버지, 삼락이더러 가라고 하세요.”(222~223)

 

작가는 허삼관이 아들들을 불러모았다.”라고 하는 법 없이, 언제든 허삼관은 일락이, 이락이, 삼락이를 불러 모았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꼬마돼지삼형제>에서 집짓는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서술되듯이 이 소설 역시 동일한 구조의 사건이 반복되고 변주된다.

가뭄이 심하게 들었을 때 피를 파는 허삼관의 내면과 아픈 일락이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열흘 동안 네 번 피를 파는 허삼관의 내면은 분명 다를 것이다. 작가는 허삼관의 내면을 묘파하는 대신 피를 파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형식들을 아주 미세하게 변형시킨다. 그리하여 서술자에 의해 허삼관의 내면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그 변형된 형식들이 허삼관의 내면을 주조하도록 만든다. 전통적인 이야기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으되, 그 이야기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반영한다. 삶의 형식들의 반복을 통해 드러나는 내면은 소설 밖의 세계전체를 뒤흔드는 커다란 울림을 만든다. 

허삼관이 열 번 매혈을 했다는 것은 허삼관의 삶에 열 번의 가혹한 시련이 닥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열 번의 시련은 수사적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구조의 변형을 통해 슬픔은 매번 다른 것으로 주조된다. 그리하여 허삼관에게 닥쳐 온 열 번의 슬픔은 동일하지 않는 슬픔으로, 차이 속에서 수 없이 분화하는 슬픔이 되어 모든 슬픔은 한때의 유일한 슬픔이 되어 그의 가슴 속에 각인된다.

 

이 소설은 허삼관의 매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허삼관이 돼지간볶음과 황주를 먹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허삼관은 아내와 더불어 그가 피를 판 후면 늘 찾아갔던 승리반점에서 예의 그 음식과 술을 시켜 먹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 평생 이렇게 맛있는 돼지간볶음은 처음이야.”

 

허삼관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단순해 보이는데, 그는 처음으로 피를 팔지 않고 돼지간볶음을 먹기 때문이다. 허삼관은 그동안 자신과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자신의 피와 맞바꾸었다. 그렇다면 돼지간볶음을 먹는 일이란 그 불행을 씹어 삼키는 일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허삼관은 불행과 마주하지 않고, 처음으로 불행을 걷어 낸 돼지간볶음을 먹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 음식이 어찌 맛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허삼관은 예순이 되었고, 병원은 그의 피를 받아주지 않는다그는 더 이상 불행이 닥친다해도 그 불행 을 감당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불행과 맞바꿀 수 있는 유일한 재산을 모두 소진해버렸다. 그 재산이란 그의 젊음 혹은 건강에 다름 아니다. 삶의 온갖 역경 속에서 허삼관이 건져 올린 전리품이란 돼지간볶음 세 접시와 황주 한 병, 그것이 전부라면, 승리반점에서의 식사를 하는 허삼관의 삶을 '승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장면은 행복이라고도 그렇다고 슬픔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그 분화하는 틈속에 허삼관의 삶을 위치시키고 있다.  곧 그것이 삶일 것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줄은 이렇다.

 

좆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지만 자라기는 길게 자란다

 

은 늘 삶을 구조하는 형식들의 뒤에 뒤쳐져 있고, 그러한 형식들이 삶을 옭아맨다 할지라도 삶은 그 속에서도 언제든 살아 그 형식들을 뒤따른다. 명심할 것은 삶의 형식들이 바뀔지언정 삶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 이러한 삶의 형식이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삶은 어떤 식으로든 그저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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