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 인물

김병수(): 연쇄살인범이다. 지금은 알츠하이머(치매)에 걸린 70대의 늙은이다. 40대 때 은희의 엄마를 죽이고 돌아오다 교통사고가 난다. 그때 뇌를 다쳤기 때문인지 아니면 은희 엄마를 죽이면서 위안을 얻었기 때문인지, 살인을 완전히 끊는다. 그리고 은희를 딸처럼 기르며 현재까지 살아오고 있다. 그런데 ‘가 살고 있는 지역에 연쇄살인범이 나타난다. 나는 때를 같이 하여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는다.는 연쇄살인범이 박주태라고 단언한다. ‘는 우연히 박주태와 접촉사고를 낸 일이 있는데, 그 때 본능적으로 그가 범인임을 알게 되었다. ‘는 처음으로 유희가 아닌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살인을 계획한다.

은희'나'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지만, 엄마를 죽인 연쇄살인범인지는 모른다. 치매에 걸린 '나'를 간호한다. 그녀는 농대를 나와 지역의 연구소에서 식물의 품종을 개량하는 일을 한다. 식물은 말을 하지 않는다. 은희는 그런 식물을 좋아한다. 은희는 의 실체를 모르면서 를 아버지로 여기는 것처럼, 박주태의 실체를 모르면서 그를 사랑하고 결혼하기를 희망한다. 은희는 어디에나 있거나 어디에도 없거나 둘 중 하나다.

박주태: 역시 연쇄살인범. 부동산업을 하며, 사냥을 즐긴다. ‘를 죽이기 위해 은희에게 접근했다, 고 '나'는 믿고 있다.

 

2. 단평

죽음의 위험에 놓여 있는 은희를 보호하고위험의 원인인 박주태를 죽인다면, 이것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이런 결말을 기대했다면 완전히 작가의 의도에 보기 좋게 낚인 것이다. 작가는 새로운 결말을 예비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결말은 새로운가, 이 물음은 새로운 문제를 발명해내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상응한다. 이것이 이 소설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연쇄살인과 알츠하이머가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 아니 정확히는 알츠하이머가 이 소설의 원동력이다. 연쇄살인도 알츠하이머라는 소재도 낡았다. 이 낡은 소재를 얼마나 새롭게 만들 수 있는가, 가 소설을 평가하는 또 다른 잣대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영하는 낡은 소재를 새로운 문제를 통해 쇄신하고 있는가, 이것이 이 소설을 평가하는 최종적 척도 일 것이다. 김영하는 이 낡은 소재를 낡은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소설 초반부터 젠체하며 김영하는 이것을 기억의 문제로 치환한다. 우리의 기억은 완전한가, 라고 묻고 있다.

단호히 말해주마! 그 따위 물음 지겹다.

 

3. 해설에 대해

이 소설의 제목은 '살인자의 기억법'이다. 신형철은 김훈을 비평하면서 라깡의 테제를 들고와서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김훈의 소설은 방황에 대한 소설이 아니다. 방황하는 것, 그 헛것, 설사 체제 순응적 방황이라 할지라도 그 헛것, 그 허위의 밥통을 깨뜨리지 않는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빈 밥통인지를 알면서 그 빈 밥통을 부여잡고 사는 삶은, 빈 밥통에 무언가를 채우려는 삶보다 더 가혹할 것이다. 더 지난할 것이다. 김훈의 소설은 그러한 허무를 살아내는 자의 지난함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허무를 살아내는 자들이 바로 우리라고 말한다. 김훈의 글은 체제순응적인 글이 아니라 허무한 삶을 허무로 끝끝내 살아내고 마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신형철이 붙인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라는 멋드러진 제목은 이 소설(<<살인의 기억법>>)을 위해 아껴 두는 것이 좋을 뻔했다. 이 소설을 비평한 권희철은 남성적인 소설’, ‘강인한 사내에 관한 소설 성숙한 남성에 관한 소설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을 수 없는 농담, 사드-붓다의 악몽>이라고 제목했다. 하지만 권희철은 뭔가 단단히 착가하고 있다. 이 소설의 '나'는 연쇄살인범이었다는 사실조차 불명확한 어떤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하다면 여기 어디에 '강인한 사내'가 자리할 곳이 있단 말인가. 이 소설은 속지 않으려는 자의 방황에 대한 이야기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4. 작가의 말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작가의 말>이다.

 

이 소설은 유난히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 애를 먹었다 하루에 한두 문장씩밖에는 쓰지 못한 날이 많았다. 처음에는 꽤나 답답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게 바로 주인공의 페이스였다.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 아닌가. 그래서 마음을 편히 먹고 천천히 받아 적기로 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이것은 내 소설이다. 내가 써야 한다. 나밖에 쓸 수 없다.”와 같이 간지 나는 말은 낭비일 뿐이다. 김영하의 소설은 어중간하게 지적이며 어중간하게 대중적이다. 그래서 그와 견줄 수 있는 작가는 이문열 정도다. 

 

인물을 정확히 세우고 인물의 말을 받아 적으면 소설은 저절로 굴러간다. 하지만 시는 그렇지 않는다. 상황은 결코 말하는 법이 없으니까. 그래서 시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은 시를 일인칭 자기고백체라고 말한다. 이보다 더 무식한 말이 어딨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