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장남자 시코쿠>>로 한국시의 물줄기를 자신 쪽으로 틀어버린 바 있는 황병승은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후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생활고에 치이다 보니 시에만 집중할 수 없었죠.”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가 아직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시인의 말은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도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는 다른 언어가 한 번도 발 딛지 못한 최초의 영역에 언어를 펼쳐 새로운 길을 놓은 시를 썼고, 새로울 것이란 더 이상 없을 법도 한 이 지난한 인간의 역사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미지를 길어 올렸다. 그는 그의 시와 더불어 시간도 공간도 없는 영역, 어떤 찬란한, 침범 불가능한 곳을 점유한, 이 비루한 세상과 분리된 시라는 세상에 접어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될만큼 터무니 없이 좋은 시를 쓰는 사람이었다. 생활고라는 말이 그와 연결되어 있으리라고는 정말이지 전혀 생각조차 못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측면에서 충격을 받았다.

 

, 그런데도 삶은 끝나지 않는구나!’가 그 하나라면

 

, 그러고도 살아남아 삶의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 써야 하는구나!’가 나머지 하나였다.

 

먼저의 당혹스러움이 죽음을 향한 것이라면 나중의 것은 이 시인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이 당혹감 혹은 원망은 그를 비롯한 인간의 삶 전체로 뻗어나갔다. 그러니까 이 시인의 별 말 아닌 말 덕분에 나는 추잡스러운 삶을 생각했고 또 광폭한 죽음의 민낯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죽음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 찾아오는 법이 없다. 죽음은 삶의 대척점에서 삶과 완전히 무관하며 그 삶에 포섭된 하잘 것 없는 인간의 기대, 바람, 기원 따위와도 관계없이, 어떤 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서, 자신이 원할 때 자신의 법에 따라, 심지어 자살을 선택할 때조차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그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며, 아무 때고 삶 편으로 스민다는 것, 삶에서 죽음 편으로 결코 들어설 수 없이 오직 죽음 쪽에서 삶 쪽으로만 스민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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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4-12-13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황병승의 시보다도 이 글이 더 좋은걸요.
황병승의 시들은 제겐 어려워요. 김소연의 시조차 소화하지 못하는 제가
황병승을 접수할 수 있을리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