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장남자 시코쿠>>로 한국시의 물줄기를
자신 쪽으로 틀어버린 바 있는 황병승은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후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생활고에 치이다 보니 시에만 집중할 수
없었죠.”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가 아직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시인의 말은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도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는
다른 언어가 한 번도
발 딛지 못한 최초의 영역에 언어를 펼쳐 새로운 길을 놓은 시를 썼고,
새로울 것이란 더
이상 없을 법도 한 이 지난한 인간의 역사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미지를 길어 올렸다. 그는 그의 시와 더불어 시간도 공간도 없는
영역,
어떤
찬란한,
침범 불가능한 곳을
점유한,
이 비루한 세상과
분리된 시라는 세상에 접어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될만큼 터무니 없이 좋은 시를 쓰는 사람이었다. ‘생활고’라는 말이 그와 연결되어 있으리라고는
정말이지 전혀 생각조차 못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측면에서 충격을 받았다.
‘아,
그런데도 삶은 끝나지
않는구나!’가 그 하나라면
‘아,
그러고도 살아남아
삶의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 써야 하는구나!’가 나머지 하나였다.
먼저의 당혹스러움이 죽음을 향한 것이라면
나중의 것은 이 시인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이 당혹감
혹은 원망은 그를 비롯한 인간의 삶 전체로 뻗어나갔다.
그러니까 이 시인의
별 말 아닌 말 덕분에 나는 추잡스러운 삶을 생각했고 또 광폭한 죽음의 민낯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죽음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 찾아오는
법이 없다.
죽음은 삶의
대척점에서 삶과 완전히 무관하며 그 삶에 포섭된 하잘 것 없는 인간의 기대,
바람,
기원 따위와도
관계없이,
어떤 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서,
자신이 원할 때
자신의 법에 따라,
심지어 자살을 선택할
때조차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그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며,
아무 때고 삶 편으로
스민다는 것,
삶에서 죽음 편으로
결코 들어설 수 없이 오직
죽음 쪽에서 삶
쪽으로만 스민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