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약속
로맹 가리 지음, 심민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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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무언가를 쓰지 않고는 멈출 수 없는 사람들, 자신이 아닌 서술자로 불리는 무언가가 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그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로맹 가리는 자신의 내밀한 유년을 자전적 소설 형식으로 썼다. 『새벽의 약속』은 그런 책이다. 이 소설의 중심인물은 로맹 가리이기보다는 자신의 어머니다. 어머니와의 일화는 낯부끄러운 일들로 가득한데도 로맹 가리는 그 치부들을 한겹 한겹 벗겨내고 있다. 이런 일은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프로메테우스보다 더 끔찍한 일인지도 모른다. 끝까지 가야 하는 이야기, 자신을 발가벗겨야 하는 일이 소설가의 일이라면 로맹 가리는 누구보다 훌륭히 그 일을 해내고 있다.

  로맹 가리는 어머니와 관계한 한 일화를 소개하며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얼굴이 달아오른다."라고 쓰고 있다. 로맹 가리의 어머니는 이웃들에게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되면 그들을 층계참으로 불러내고선 "높고도 자랑"스러운 선언을 하였다고 한다. 

  더럽고 냄새나는 속물들아! 감히 너희들이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 줄이나 아는 게야? 내 아들은 프랑스 대사가 될 사람이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을 것이고, 위대한 극작가가 될 거란 말이야. 입센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될 거라구! 내 아들은…… (중략…). 내 아들은 런던식으로 차려입고 살 거야!(50면)

  "런던식으로 차려입고" 산다니, 그걸 사람들 앞에서 소리치다니, 이 글을 읽는 나도 얼굴이 빨개질 정도다. 그 수치심 속에서 그는 자살을 꿈꿨다고 한다. 이층 높이만큼 장작을 쌓아둔 곳으로 가서 장작을 하나씩 빼내어 통로를 만들고, 아무도 찾을 수 없고 들어올 수 없다는 느낌을 느낄 만한 곳에 이르러 오래도록 머물며 오래오래 울었다고 한다. 그의 나이 여덟 살의 일이다. 그리고 어느 날은 "모든 것을 끝장내기 위하여, 죽은 나무로 된 나의 성채가 내 위로 단숨에 무너져 나를 인생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장작을 뽑아낼 작정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그 부분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무들을 하나하나 만져보았다. 나는 지금도 그 나무들의 정답고 든든한 감촉을, 나의 축축한 코를,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모욕을 받거나 불행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갑자기 내 마음속에 자리 잡던 그 고요를 기억한다. 다리와 등으로 동시에 장작들을 밀어내면 될 것 같았다.

  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호주머니 안에 오늘 아침 빵집 골방에서 훔친 양귀비 과자 조각이 들어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 빵집은 우리 집과 한 건물에 있었는데, 그 집 주인은 손님이 있을 때면 골방을 비운 채 두고하였다. 나는 그 과자를 먹었다. 그런 다음 다시 나는 자세를 취하였고, 큰 숨을 내쉬며 밀 준비를 했다.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구했다.

  갑자기 그놈의 콧마루가 장작 사이에서 내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우리는 한동안 놀라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희한한 수고양이였다. 털은 뽑히고, 옴에 걸렸으며, 오렌지잼 같은 색깔을 하고 있었고, 귀는 갈갈이 찢기었고, 풍부하고도 다양한 경험의 덕으로 수고양이들이 마침내 갖게 되는, 뭔가 많이 아는 것 같은 수염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놈은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더니, 조금치도 망설이지 않고 내 뺨을 핥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 갑작스런 애정의 동기에 대해 전혀 환상을 품지 않았다. 아직 내 뺨과 턱에 눈물에 젖어붙은 양귀비 과자 부스러기들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 애무는 매우 타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내 뺨을 핥는 깔깔하고도 따뜻한 혀의 감촉은 나로 하여금 황홀해서 미소 짓게 하였다. 나는 눈을 감고 내버려두었다. 그 후,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도 그랬지만, 그때에도 나는 내게 보이는 애정의 표시 뒤에 정확히 무슨 일이 개입하고 있는지 알려고 애쓰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여기 다정함과 동정의 모든 외양을 갖추고 내 얼굴 위를 이리저리 열심히 핥고 있는 따뜻한 혀의 다정스런 콧잔등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행복해지기 위해 내게 그 이상의 것은 필요치 않다.

  고양이가 핥기를 끝냈을 때 나는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세상은 아직도 가능성들을, 결코 하찮게 여길 수 없는 우정들을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고양이는 옹알거리며 내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나는 그놈의 옹알거림을 흉내내려 애썼고, 우리는 서로 다투어 옹알거려가며 썩 행복한 한때를 보냈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과자부스러기를 긁어 모아 녀석에게 주었다. 녀석은 흥미를 보이더니, 꼬리를 빳빳이 세우고 내 코에 몸을 기댔다. 놈이 내 귀를 물었다. 간단히 말해, 인생은 다시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되었던 것이다. 오 분쯤 뒤에, 나는 나무로 된 내 성 밖으로 기어나와 집을 향해 갔다. 손은 호주머니에 찌르고 휘파람을 불며, 꽁무니엔 고양이란 놈을 달고서.

  그 후 난 언제나 생각해왔다. 사는 동안, 만일 진정 순수하게 사랑 받고 싶거든 얼마간의 과자 부스러기를 지고 있는 것이 좋다고.

 ​죽기를 결심했던 로맹 가리는 고양이가 자신의 얼굴을 핥았다는 사실 때문에 죽기를 멈춘다. 어떤 거룩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얼굴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먹기 위한 고양이의 행동에 불과했는데도 말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대단한 계시나 기적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일에 지날지도 모른다.사람을 죽일 만큼 힘들게 만드는 일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죽고 사는 일은 허약한 기반 위에 아주 간신히 머물고 있다.

  이렇게 말해버리면 삶이 너무 허무하고 공허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로맹 가리의 처방은 간단하다. 어떤 행위 뒤에 내재한 정확한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기 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행위에 집중하라는 것. 비록 고양이가 양귀비 과자 부스러기를 먹기 위해 자신을 핥았지만, 그러한 논리적 인과보다는 표면적으로 느껴지는 "다정함과 동정"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일이라고 로맹 가리는 말하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논리적 이유라는 것은 인간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사건은 늘 그런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어 끝 간데 없이 진행된다. 그런데도 인간은 사건의 일부만을 발췌하여 그것이 사건의 시작이자 끝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리하여 그 사건에 쉽게 패배한다. 인간은 결코 패배하지 않지만, 패배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인간 수준의 논리일 뿐 인간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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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What's Up 3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 / 새물결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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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프카는 「법 앞에서」라는 우화에서 주권적 추방령의 구조에 대한 모범적인 윤곽을 제시한 바 있다.

  아무것도 -분명 문지기는 금지하기 않는다-시골 사람이 법의 문으로 들어서는 것을 가로막지 않으며, 반대로 문은 항상 열려 있으며 또 범은 아무것도 명하지 않는다. 이 우화를 가장 최근에 해설한 데리다와 카치아리(Massimo Cacciari)도 다른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모두 그 점을 강조했다. 데리다는 이렇게 말한다.

 

  법은 자신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지키며, 아무것도 지키지 않는 문지기에 의해 지켜지고 있으며, 문은 열려 있지만, 무엇에게도 열려 있지 않다(데리다, 「선입견」, p.356.).

 

  카치아리는 나아가 훨씬 더 확고한 어조로, 이미 열려 있는 곳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우리가 이미 서 있는 장소에 도달할 수 없는 그런 불가능성 자체에 바로 법의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만약 문이 이미 열려 있다면 어떻게 문이 '열리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어떻게 열린 곳으로 들어가기entrare-l'aperto를 바랄 수 있겠는가? 열린 곳은 우리가 있는 곳이고 사물이 존재하는 곳이며, 우리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 우리는 우리가 열 수 잇는 곳에만 들어갈 수 잇다. 이미 열려 있음 il gia-aperto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 시골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데, 이는 이미 열려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카치아리, 『도상들』, p.69.).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앞의 카프카의 우화는 법의 순수한 형태를, 즉 더 이상 어떤 것도 명하지 않는 바로 그 지점에서 가장 강력한 모습을 드러내는 법의 형태(즉 순수한 추방령)을 보여주고 있다. 시골 사람이 법의 잠재성의 수중에 넘겨지는 것은 이 법이 시골 사람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단지 자신이 열려 있다는 사실만을 명하기 때문이다. 주권적 예외라는 도식에 따르자면, 법은 스스로의 적용을 유예함으로써 자신을 시골 사람에게 적용시키며, 또한 시골 사람을 자신의 외부에 버려둠으로써 시골 사람을 자신의 추방령 속에 포획하는 것이다. 열린 문은 오직 시골 사람만을 위한 것으로, 그를 배제시킴으로써 그를 포함시키고 그를 포함시킴으로써 그를 배제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모든 법의 정점이자 근원이다. 『소송』에서 사제는 법정의 본질을 "법정은 네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네가 오면 널 맞이하고 네가 간다면 가게 내버려두지"라는 공식으로 요약하고 있는데, 여기서 사제가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노모스의 본래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언어 또한 인간을 자신의 추방령 속에 포획하는데, 말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의식하지 못한 채 항상 이미 언어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비언어적인 것,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등등의 형식으로) 언어에 선행하는 모든 것은 바로 언어로부터 배제됨으로써 언어와 관계를 맺게 되는, 언어에 의해 전제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말라르메는 헤겔적인 공식을 빌려 "로고스란 모든 원리의 부정을 통해 전개되는 원리"라는 말로 언어의 이러한 자기 전제적 본성을 표현한 바 있다. 언어란 실상 관계의 순수한 형식으로서 (주권자의 추방령과 마찬가지로) 관계 외부라는 형태로 항상 자신을 전제하며, 따라서 관계라는 형식 자체에 속하는 것과 관계를 맺거나 아니면 그러한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말하는 존재인 인간은 비언어적인 것에 접근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관계 외부의 것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의 형태로는 결코 비언어적인 것에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뜻일 뿐이다. 비언어적인 것은 오직 언어 자체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벤야민의 말을 빌리자면 단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언어 속에서 수정처럼 맑게 해서 제거kristallreine Elimination des Unsagbaren in der Sparche"해야만 "말로 표현되기를 거부하는 것auf das dem Wort versagte"에 도달할 수 있다(벤야민, 『서한집』, p.127.).

-119~122면.

=====

  핵심은 법의 예외상태는 법의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결코 법의 바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외가 법의 바깥에 있다고 말할 때 예외는 알 수 없는 괴물이 되고,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 하지만 예외는 우리의 일부라는 것, 괴물 역시 우리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가 발 딛은 근거ground를 의심하게 된다. 전자는 우리의 토대를 더욱 공고히 만들지만 후자는 우리의 토대를 늘 의심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그라운드 자체를 버릴 수는 없다. 언어가 문제 있다고 해서 우리가 언어를 버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라운드가 문제다' 또는 '그라운드는 없다'라고 말할 때 항상 그라운드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영화 <인셉션>에서 아서(조셉 고든 레빗)는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면 뭘 생각할까요?"라고 묻는다. 사이토(와타나베 켄)의 대답처럼 "코끼리"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 이유로 지젝은 "groundless ground" 를 말한다. 그라운드 속에서 그라운드 없음의 사유는 가능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처럼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락되는 것이다. 오히려 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라캉은 말한다. 지젝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신이 있어야 우리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신을 외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 옮겨와 자신의 원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때 우리의 사유는 가능해질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다시 언어로 말해야만 말로 표현되기를 거부한 것에 이를 수 있다는 벤야민의 말은 그런 점에서 얼마나 가혹하면서도 적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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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주년을 맞이한 알라딘 축하드립니다. 대학원 진학하면서부터 그러니까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이용하게 되었군요. 알라딘을 이용하게 되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전공서적이라 리뷰나 100자평이 없는 것이 많아서 thanks to를 누를 수 없어서 친구와 리뷰쓰고, 서로 thanks to를 눌러 주자는 일명 ˝thanks to 계˝를 만들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물론 이후에 흐지부지 되긴 했지만... 저와는 여러가지 곡절이 많은 인터넷 서점이군요. 책 발송이 늦어서 고객센터 분들과 많이 싸우기도 했네요. 며칠 전에도 발송이 늦어져서 고객센터에 문의해 놓은 상태이긴 하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고, 잘못된 건 잘못된 일이니까. 가끔 이런 일이 있긴 하지만, 편리하게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고맙게 잘 이용하고 있다는 말은 꼭 드려야겠군요.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더 더 번창하시기 바랍니다. 동네 서점에 대한 지원과 대책까지도 함께 생각하면서 발전해 가길 소망합니다. 아! 제가 얼마나 알라딘을 특별히 생각하냐 하면 알라딘에서 보내 준 광고, 안내, 정보메일을 따로 분류해서 모아두고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면 이런 것들이 우리나라의 출판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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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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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곧장 울어버릴 태세지만, 울음으로 말을 그치거나 서사를 마치는 일 없이, 끝끝내 말로 눈물을 대신 하는 그런 소설, 그 문장들이 눈물만큼이나 아름다운 그런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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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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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언니를 사랑하지 않아. 언니에 대해 알고자 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거든. 언니를 어떻게 만났는지도 기억하지 못해. 그건 언니도 마찬가지야. 당신들은 서로 이해하는 척하지만, 서로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서로를 속이느라 삶을 허비하고 있어."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니, 인간이라는 게 과연 이해받을 수 있는 존재일까? 평생 병에 시달리며 고독하게 지냈던 겐로꾸(元祿) 시대 가인 나이또오 죠오소오(内藤丈草)는 독신한거 생활을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었다. "春雨や抜け出たままの夜着の穴"(はるさめやぬけでたままのよぎのあな, 봄비가 오네 빠져나온 그대로의 잠옷의 구멍) 아마도 밤의 속살을 적시는 봄비가 아니었더라면, 그 무엇도 잠옷 속의 쓸쓸한 나이또오를 움직이게 하지 못했을 테다. 결국 봄비에 마음이 먼저 움직인 뒤에야 나이또오는 몸의 형상대로 '요기(夜着)'의 그 구멍을 보게 됐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모두 그런 어두운 구멍이 있는 법이다. 그 어두운 구멍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구멍인 것이다. 그 어두운 구멍 속에서는 서로를 속이는 것도, 속는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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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또오의 시를 분석한 한 일본인의 블로그에서 구한 사진

출처: http://e2jin.cocolog-nifty.com/blog/2013/02/post-7db8.html

 

  김연수는 나이또오 죠오소오의 시를 해석하면서 몇 개의 잘못을 범했다. '夜着'은 '잠옷'이 아니라 '이불'이, '春雨や'는 '봄비여'가 적합하다. 그러니 "봄비여 빠져나온 대로의 이불의 구멍" 정도.

  아무래도 사전을 찾지 않는 것이 이 시를 위해서 더 좋았을 것이다. 김연수의 해석대로라면 여기에는 세 개의 '나'가 있다. '잠옷을 입은 나'와 '봄비를 바라보는 나'와 '봄비를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는 나' 이렇게 말이다. '봄비를 바라보는 나'는 '잠옷을 입은 나'일 것이나, 봄비 듣는 소리를 듣는 나는 잠옷을 입고'만' 있는 나와는 또 다를 것이다. 그런 식이라면 세 개의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나'를 이 짧은 시는 품고 있는 것이다.

  잠옷을 입은 채 봄비 소리를 듣는 '나'가, '나'를 떠나 그런 '나'를 바라보니, '잠옷을 입은 나'는 없고, 잠옷 그대로의 텅 빈 구멍만을 보게 된다는 것. '나'는 얼마나 외로운 '나'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이 글을 읽고 있었는데, 김연수는 "인간에게는 모두 그런 어두운 구멍이 있는 법"이라고 썼다. 여기에서 턱 걸리고 말았다. 그러니 사전을 찾은 것은 나의 잘못이기보다는 김연수의 책임이 크다. "인간에게는 모두 그런 어두운 구멍이 있는 법"이라는 말을 옮기면 '인간은 어두운 구멍을 하나 정도 가지고 있다'에 해당할 것이나, "빠져나온 그대로의 잠옷의 구멍"이라는 말을 더 충실하게 옮긴다면, '인간은 그런 어두운 구멍 자체다'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어두운 구멍은 인간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의 커다랗고 어두운 구멍인 셈이다.

  그래서 이 시에 내가 모르는 일본어 뜻이 있나 해서 사전을 찾았던 것. 그랬더니 이 시는 잠옷을 입은 나를 바라보는 나에 대한 시가 아니라, 봄비 소리에 깨어 그 소리를 들으며 밖을 서성이다가 잠자리로 돌아와 보니 이불에는 자신이 빠져나온 그대로의 휑한 구멍만 있더라는 그저 그렇고 그런 시였던 것. 내가 빠져나온 구멍을 이불이 그대로 유지하고 있더라는 말과 내가 나를 바라보니 내가 텅 비어 있더라는 말은 얼마나 다른가. 그 말의 진폭을 굳이 설명하는 것은 무척 조악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 '그저 그런 시'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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