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은 언니를 사랑하지 않아. 언니에 대해 알고자 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거든. 언니를 어떻게 만났는지도 기억하지 못해. 그건 언니도 마찬가지야. 당신들은 서로 이해하는 척하지만, 서로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서로를 속이느라 삶을 허비하고 있어."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니, 인간이라는 게 과연 이해받을 수 있는 존재일까? 평생 병에 시달리며 고독하게 지냈던 겐로꾸(元祿) 시대 가인 나이또오 죠오소오(内藤丈草)는 독신한거 생활을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었다. "春雨や抜け出たままの夜着の穴"(はるさめやぬけでたままのよぎのあな, 봄비가 오네 빠져나온 그대로의 잠옷의 구멍) 아마도 밤의 속살을 적시는 봄비가 아니었더라면, 그 무엇도 잠옷 속의 쓸쓸한 나이또오를 움직이게 하지 못했을 테다. 결국 봄비에 마음이 먼저 움직인 뒤에야 나이또오는 몸의 형상대로 '요기(夜着)'의 그 구멍을 보게 됐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모두 그런 어두운 구멍이 있는 법이다. 그 어두운 구멍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구멍인 것이다. 그 어두운 구멍 속에서는 서로를 속이는 것도, 속는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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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또오의 시를 분석한 한 일본인의 블로그에서 구한 사진

출처: http://e2jin.cocolog-nifty.com/blog/2013/02/post-7db8.html

 

  김연수는 나이또오 죠오소오의 시를 해석하면서 몇 개의 잘못을 범했다. '夜着'은 '잠옷'이 아니라 '이불'이, '春雨や'는 '봄비여'가 적합하다. 그러니 "봄비여 빠져나온 대로의 이불의 구멍" 정도.

  아무래도 사전을 찾지 않는 것이 이 시를 위해서 더 좋았을 것이다. 김연수의 해석대로라면 여기에는 세 개의 '나'가 있다. '잠옷을 입은 나'와 '봄비를 바라보는 나'와 '봄비를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는 나' 이렇게 말이다. '봄비를 바라보는 나'는 '잠옷을 입은 나'일 것이나, 봄비 듣는 소리를 듣는 나는 잠옷을 입고'만' 있는 나와는 또 다를 것이다. 그런 식이라면 세 개의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나'를 이 짧은 시는 품고 있는 것이다.

  잠옷을 입은 채 봄비 소리를 듣는 '나'가, '나'를 떠나 그런 '나'를 바라보니, '잠옷을 입은 나'는 없고, 잠옷 그대로의 텅 빈 구멍만을 보게 된다는 것. '나'는 얼마나 외로운 '나'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이 글을 읽고 있었는데, 김연수는 "인간에게는 모두 그런 어두운 구멍이 있는 법"이라고 썼다. 여기에서 턱 걸리고 말았다. 그러니 사전을 찾은 것은 나의 잘못이기보다는 김연수의 책임이 크다. "인간에게는 모두 그런 어두운 구멍이 있는 법"이라는 말을 옮기면 '인간은 어두운 구멍을 하나 정도 가지고 있다'에 해당할 것이나, "빠져나온 그대로의 잠옷의 구멍"이라는 말을 더 충실하게 옮긴다면, '인간은 그런 어두운 구멍 자체다'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어두운 구멍은 인간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의 커다랗고 어두운 구멍인 셈이다.

  그래서 이 시에 내가 모르는 일본어 뜻이 있나 해서 사전을 찾았던 것. 그랬더니 이 시는 잠옷을 입은 나를 바라보는 나에 대한 시가 아니라, 봄비 소리에 깨어 그 소리를 들으며 밖을 서성이다가 잠자리로 돌아와 보니 이불에는 자신이 빠져나온 그대로의 휑한 구멍만 있더라는 그저 그렇고 그런 시였던 것. 내가 빠져나온 구멍을 이불이 그대로 유지하고 있더라는 말과 내가 나를 바라보니 내가 텅 비어 있더라는 말은 얼마나 다른가. 그 말의 진폭을 굳이 설명하는 것은 무척 조악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 '그저 그런 시'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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