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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ㅣ What's Up 3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 / 새물결 / 2008년 2월
평점 :
카프카는 「법 앞에서」라는 우화에서 주권적 추방령의 구조에 대한 모범적인 윤곽을 제시한 바 있다.
아무것도 -분명 문지기는 금지하기 않는다-시골 사람이 법의 문으로 들어서는 것을 가로막지 않으며, 반대로 문은 항상 열려 있으며 또 범은 아무것도 명하지 않는다. 이 우화를 가장 최근에 해설한 데리다와 카치아리(Massimo Cacciari)도 다른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모두 그 점을 강조했다. 데리다는 이렇게 말한다.
법은 자신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지키며, 아무것도 지키지 않는 문지기에 의해 지켜지고 있으며, 문은 열려 있지만, 무엇에게도 열려 있지 않다(데리다, 「선입견」, p.356.).
카치아리는 나아가 훨씬 더 확고한 어조로, 이미 열려 있는 곳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우리가 이미 서 있는 장소에 도달할 수 없는 그런 불가능성 자체에 바로 법의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만약 문이 이미 열려 있다면 어떻게 문이 '열리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어떻게 열린 곳으로 들어가기entrare-l'aperto를 바랄 수 있겠는가? 열린 곳은 우리가 있는 곳이고 사물이 존재하는 곳이며, 우리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 우리는 우리가 열 수 잇는 곳에만 들어갈 수 잇다. 이미 열려 있음 il gia-aperto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 시골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데, 이는 이미 열려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카치아리, 『도상들』, p.69.).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앞의 카프카의 우화는 법의 순수한 형태를, 즉 더 이상 어떤 것도 명하지 않는 바로 그 지점에서 가장 강력한 모습을 드러내는 법의 형태(즉 순수한 추방령)을 보여주고 있다. 시골 사람이 법의 잠재성의 수중에 넘겨지는 것은 이 법이 시골 사람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단지 자신이 열려 있다는 사실만을 명하기 때문이다. 주권적 예외라는 도식에 따르자면, 법은 스스로의 적용을 유예함으로써 자신을 시골 사람에게 적용시키며, 또한 시골 사람을 자신의 외부에 버려둠으로써 시골 사람을 자신의 추방령 속에 포획하는 것이다. 열린 문은 오직 시골 사람만을 위한 것으로, 그를 배제시킴으로써 그를 포함시키고 그를 포함시킴으로써 그를 배제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모든 법의 정점이자 근원이다. 『소송』에서 사제는 법정의 본질을 "법정은 네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네가 오면 널 맞이하고 네가 간다면 가게 내버려두지"라는 공식으로 요약하고 있는데, 여기서 사제가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노모스의 본래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언어 또한 인간을 자신의 추방령 속에 포획하는데, 말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의식하지 못한 채 항상 이미 언어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비언어적인 것,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등등의 형식으로) 언어에 선행하는 모든 것은 바로 언어로부터 배제됨으로써 언어와 관계를 맺게 되는, 언어에 의해 전제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말라르메는 헤겔적인 공식을 빌려 "로고스란 모든 원리의 부정을 통해 전개되는 원리"라는 말로 언어의 이러한 자기 전제적 본성을 표현한 바 있다. 언어란 실상 관계의 순수한 형식으로서 (주권자의 추방령과 마찬가지로) 관계 외부라는 형태로 항상 자신을 전제하며, 따라서 관계라는 형식 자체에 속하는 것과 관계를 맺거나 아니면 그러한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말하는 존재인 인간은 비언어적인 것에 접근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관계 외부의 것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의 형태로는 결코 비언어적인 것에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뜻일 뿐이다. 비언어적인 것은 오직 언어 자체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벤야민의 말을 빌리자면 단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언어 속에서 수정처럼 맑게 해서 제거kristallreine Elimination des Unsagbaren in der Sparche"해야만 "말로 표현되기를 거부하는 것auf das dem Wort versagte"에 도달할 수 있다(벤야민, 『서한집』, p.127.).
-119~1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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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법의 예외상태는 법의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결코 법의 바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외가 법의 바깥에 있다고 말할 때 예외는 알 수 없는 괴물이 되고,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 하지만 예외는 우리의 일부라는 것, 괴물 역시 우리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가 발 딛은 근거ground를 의심하게 된다. 전자는 우리의 토대를 더욱 공고히 만들지만 후자는 우리의 토대를 늘 의심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그라운드 자체를 버릴 수는 없다. 언어가 문제 있다고 해서 우리가 언어를 버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라운드가 문제다' 또는 '그라운드는 없다'라고 말할 때 항상 그라운드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영화 <인셉션>에서 아서(조셉 고든 레빗)는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면 뭘 생각할까요?"라고 묻는다. 사이토(와타나베 켄)의 대답처럼 "코끼리"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 이유로 지젝은 "groundless ground" 를 말한다. 그라운드 속에서 그라운드 없음의 사유는 가능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처럼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락되는 것이다. 오히려 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라캉은 말한다. 지젝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신이 있어야 우리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신을 외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 옮겨와 자신의 원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때 우리의 사유는 가능해질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다시 언어로 말해야만 말로 표현되기를 거부한 것에 이를 수 있다는 벤야민의 말은 그런 점에서 얼마나 가혹하면서도 적확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