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철학사 - 상 - 고대와 중세 서양 철학사 - 상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지음, 강성위 옮김 / 이문출판사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 스토아학파에 대한 선행연구자의 물음: 스토아학파에게 '자유'는 어떻게 가능한가?

  스토아학파는 운명론자이면서 개인의 자유를 주장한다. 운명과 자유는 상충할 수밖에 없다. 운명은 이겨낼 수 없고, 제지할 수 없고, 방향을 돌릴 수 없는 원인이다. 운명이라는 거대한 원리에 맞추어 가는 삶, 이것이 현자의 삶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현자의 삶은 운명의 굴레에 갇힌 비주체적이며 수동적인 삶일 뿐이다. 스토아학파 혹은 그들의 가치의 실행자인 현자에게 자유가 성립될 수 있는 여지는 어디에 있는가?

2. 힐스베르그의 대답: 간단히 요약하자면 운명이 정해준 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곧 자유.

  스토아학파는 자유를 달리 해석함으로써 이런 모순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자유는 현실에 있어서는, 필연성과 일치된다는 것이다. 오직 어리석은 사람만이 꼭 있지 않으면 안될 것을, 그것과는 다른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현자는 사건의 법칙()을 자기 자신의 법칙()이라고 본다. 현자는 다른 것을 조금도 기대하지 않고, 운명을 긍정한다. 한 가지의 다른 의지는 자의(恣意)이며, 이 자의는 정욕과 무질서의 격정이 넘쳐흐르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욕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자유롭지가 못하며, 자기의 충동의 노예이다. 그는 바로 병든 사람이다. 그러나 철학을 통해 이성이 지배를 하게되어 건강해진 현인은, 운명의 필연성에 짓눌려 괴로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꺼이 맞아들인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완전히 스토아학파의 궤도를 따르면서, 키케로가 말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영혼의 의약인 철학은, 인간이 자기의 육체적인 성장과 성숙을 당연하고 자연적인 것이라고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운명이 정해준 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게끔 인간을 유도해 나간다.

 

3. 해소되지 않는 것들 혹은 부연해야 할 것들

  스토아학파는 운명을 말하면서 어떻게 자유를 말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 나름의 답을 내린 힐스베르그의 결론은 이렇다. 모든 운명을 긍정하며 운명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자유며, 이 자유를 괴로워하지 않는 자가 현자라는 것. 이것으로 만족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스토아학파의 윤리의 핵심 개념은 힐스베르그 스스로도 지적하였듯이 오이케이시스(Oikeiosis)이기 때문이다. 오이케이시스는 윤리적인 규범을 외부에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내면에서 끌어내는 것을 뜻한다. 전용(자기 것으로 삼음, Zueigung)’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플라톤의 오이케이온(Oikeion=)도 아니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평균적 또는 보편적으로 이상화된 인간의 본성도 아니다. 이것보다 더 직접적인 차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는 외부에서 왔거나, 인간의 평균적인 것이기 때문에 윤리적 규범의 목록이 존재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규범이 있기 때문에 그 규범을 지키면 윤리적이다. 이에 반해 스토아학파에게는 규범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윤리적 규범을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내면에서 찾는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처럼 외부에서 어떤 규범을 가져올 수 없다. 또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개인이 가진 윤리성을 등질화하거나 평균화할 수 없다.

  스토아학파에게 개인의 윤리는 개인의 내면에 존재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윤리가 이미 전제되어 있다. 스토아학파는 운명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운명을 개인이 알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운명이 주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운명을 찾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몫인 것이다. 운명을 알지 못하는 개인은 운명을 찾아야 한다. 그 속에서 절대적 자유가 생긴다. 이 자유는 윤리나 도덕에 지배받는 자유가 아니라 그러한 모든 것을 뚫고 날아오르는 자유다. 새로운 윤리와 도덕을 창조하는 자유다.

  운명은 주어져 있지만 인간은 운명을 알지 못하므로 운명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운명은 '나'의 내부에 내부에 각인되어 있다. '나'를 끝까지 밀고 나갈 때 비로소 운명은 발견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나'를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일까? 그것을 알 수 없다. 그 알 수 없는 곳까지 밀고나가는 일이 이것이 자유며, 스토아학파의 윤리다.

  이렇게 비유할 수도 있겠다. <심청전(沈淸傳)>의 주인공은 심청이다. 여기에서 은 성씨로 쓰일 때는 이지만, 평소에는 잠기다라는 뜻으로 쓰이며 으로 읽힌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라는 시집에 나오는 그 침묵에도 이 한자를 쓴다. 침묵은 말 없음에 잠기는 것결국 잠잠한 상태를 뜻한다.) ‘심청에는 두 가지를 지칭한다. 심봉사의 딸이라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맑은 물에 잠기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다라는 말은 동어반복 밖에 되지 않는다. “맑은 물에 빠질 소녀는 맑은 물에 빠졌다.” (심청=맑은 물에 잠길 소녀 / 인당수=연못 같이 맑은 물) 심청은 이름 속에 자신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심청은 자신의 이러한 운명을 알지 못한다. 심청이 인당수에 빠진 것은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 혹은 자유 속에서 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심청은 효녀이기 이전에 현자인 셈이다.

  이 개념[오이케이시스(Oikeiosis)]의 근본적인 동기는, 윤리적인 규점을 인간의 본성의 근원적인 충동 즉 감각적으로 스스로를 지각하는 데서 출발해서 자아에게 향하는 충동에서 이끌어내려는 경향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로 발전해나가는, 이런 자기 자신에 대한 지각에 있어서는, 우리들은 자아를 우리들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 다음에는 여기서부터 오이케이오시스가 가족, 정치 공동체 그리고 마침내는 전인류에게로 퍼져나간다. 즉 자아와 사회에 있어서 자아의 확장을 가능케 해주고 보장해주는 모든 것과, 이로운 것은 재촉하고 해로운 것은 멀리하는, 이런 모든 것으로 퍼져나간다. 따라서 오이케이오시스란 자기 것으로 삼음(Zueigung)’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아학파는 윤리학과 윤리학의 가치들을 이렇게 근거지우는 것과는 반대로 텔로스를 로고스에만 한정하기 때문에 역시 이런 점에서도 그 테두리가 소망하던 이상으로써 채워지지를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즉 스토아학파가 말하고 있는 인간의 본성은 플라톤의 윤리학이 말하고 있는 그런 오이케이온(Oikeion=아카톤 <>)도 아니고, 또 꼭같이 이상화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의 본성도 아니며 감각적인 자기지각에서 충동적으로 생긴오이케이오시스임이 분명하다(<<서양철학사>>, 1992, 318).

  객관적으로 올바른 일을 한다고는 하더라도, 우연이나 경향 때문에 행위하다가 객관적으로 올바른 일을 한 사람은 아직도 완전한 윤리를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니다. 이러한 완전한 윤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로 당연히 있어야 한다(Seinsollendes)’고 하는 관점에서, 즉 의무 자체를 위해서 특별히 선을 행하는 자이다(<<서양철학사>>, 1992, 3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길 위에서의 기다림 숙맥 8
정진홍 외 지음 / 푸른사상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흔이 넘은 선생들께서 모여 만든 수필 동인을 운영한다. 그 이름이 숙맥이다. 벌써 여덟 번째인 이 동인집의 제목은 󰡔길 위에서의 기다림󰡕이다. 그 중 정진홍 선생님의 걸음. . 그리고……」를 읽게 되었다는 것은 일종의 행운이다. 이 글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정진홍 선생님은 길을 걸으면 걸음의 수를 세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수를 셀 수 없게 되었다. 그때 비로소 자신을 지탱해온 것이 걸음의 수가 아니라 걸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걸음의 수는 길의 것이지 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걸음은 자신의 것이며 비록 걸음의 수를 잊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걸음은 지속된다. 걸음의 수가 길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걸음이 길을 완성한다. ‘의 걸음이 아니면 길은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늘그막에 깨닫게 되었다고 선생은 겸손히 말하고 있다. 그리고 더 큰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치밀한 삶의 방책이었던 숫자가 자리를 비켜주자 그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산사의 탑 그림자의 색깔과 무게또는 꽤 긴 산길을 올라 많은 걸음 끝에 닿았던 그곳에서의 조금은 피곤했던 휴식이 이제와서 더 분명하게 살아난다고 말하고 있다. 여든을 앞둔 선생의 말이 설사 거짓이더라도 나는 믿으리라.

이 글의 전문은 이렇다.

전략(길을 걸을 때 걸음걸이를 세는 것이 버릇이라는 내용의 글을 썼고 그 글의 전문을 인용하고 있음)

 

이 글을 쓴 지 무척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저는 길을 걷습니다. 즐겨 걷습니다. 그리고 문을 나서면 나도 모르게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하나, , …… 하고 걸음을 세기 시작합니다. 예나 이제나 그 버릇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저는 풀턴의 그림에서 꽤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달라진 것도 없지 않습니다. 실은 바로 그 달라진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인데, 이렇게 서두가 길어졌습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 글을 쓴 뒤에 집을 또 한 차례 옮겼습니다. 같은 동네라서 이전의 전철역을 여전히 이용합니다. 그런데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아직 이전처럼 집에서 전철까지의 걸음을 정확히 센 적이 없습니다.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왜 그런지요. 틀림없이 집에서 나설 때면 걸음을 세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전철역에 이르면 그 걸음 수가 딱 멈춰 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되질 않습니다. 걷다 보면, 그러니까 걸음을 세다 보면, 어느 틈에 저는 제가 세던 걸음 수를 까맣게 잊습니다. 마치 한 움큼 움켜쥔 모래가 주먹에서 나도 모르게 새어 나가듯이 그러게 숫자가 모두 제풀에 사라집니다. 어떤 날은 저도 제가 그런 것이 하도 이상해서 의도적으로 끝까지 수를 세리라 다짐을 하고 열 단위로 오른손 손가락을 접고, 다시 백 단위로 왼손 손가락을 접으면서 걸어 보기도 했습니다. 한데 그렇게 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 저는 제가 센 숫자들이 모두 사라진 빈주먹만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숫자가 수를 세는 저를 배신하고 스스로 저에게서 달아난 것인지, 아니면 수를 세다 수에 묻혀 제가 사라진 저를 의식을 못한 것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제가 수를 끝까지 세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비록 걸음을 세는 수는 잃어버려도 저는 여전히 걷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걸음 수의 상실이 걸음의 상실은 아니었습니다. 그 걸음이 쌓은 수가 당연히 없지 않습니다만 그 수를 세는 기억이, 그러니까 그 숫자가, 저를 제가 이르려는 곳에 옮겨 놓은 것은 아닙니다. 제가 거기 이르러 이제 다 걸었다!’고 하는 것을 확인하기까지 저를 살게 한 것은 걸음이지 걸음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세던 수를 잃었다거나 잊은 것이 제 걸음 걷기를 조금도 훼손한 것은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저로 하여금 걸음을 셈하는 걷기에서 벗어나 셈과는 상관없는 진정한, 그리고 참으로 순수하다고 해야 할, 그런 걸음을 걷게 한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저는 이제야 비로소 걸음마를 하기 시작한 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슬프게도 너무 늦은 터득이긴 한데, 그래도 아직 해가 지기 이전의 오늘 이 시간에 그런 생각을 한 제가 스스로 기특하기 짝이 없습니다.

을 걷는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온갖 길이 제 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선택은 늘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어떤 길 위에 들어서야 비로소 사람살이를 지탱하는 것이 삶인데 선택을 회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뜻밖에 쉬운 길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외롭고 싫고 아픈 길도 왜 그리 자주 만났었는지요. 게다가 간판들은 어찌 그리 현란했는지요. 유혹은 가끔 있는 감춰진 함정이 아니라 그대로 드러난 일상이었습니다.

어쩌면 걸음을 세는 일은 그 선택과 그 힘듦과 그 유혹을 밀쳐 낼 수 있는 제 유일한 방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제 경험이 저도 모르게 저로 하여금 그러한 전략을 구사하게 한 것이라고 해야 옳을 터인데, 하긴 이러한 생각은 걸음 세기를 잃은 지금 그 잊음을 정당화하기 위한 가난한 변명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이 그런 것으로 바뀝니다. 알 수 없지만 그야말로 경험적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중요한 것은 이 아니었습니다. ‘걸음이었습니다. 길이 걸음으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걸음이 길을 내고 길을 채웠습니다. 길이 준 것이었다면 길의 길이를 짐작할 걸음의 수를 세야 하겠지만 걸음이 준 것이라면 길은 걸음이 빚는 만큼의 길이만을 가질 것인데 그 걸음을 굳이 셀 필요가 없습니다. 걸음 자체의 완성이 길의 완성일 것이니까요.

그래서 이제는 을 걷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걸음을 걷는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관성처럼 문을 나서면서 하나, , ……하며 걸음을 셉니다. 그런데 무든 숫자를 잊었다고 하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저는 길의 끝에 있음을 확인합니다. 숫자와 상관없이 걸음의 끝은 길의 완성입니다.

달력 넘기는 일이 서글프던 때가 없지 않았습니다. 숫자의 확인은 바른 삶의 방편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제는 제 나이 헤아리기도 힘듭니다. 자식들이 몇 살인지는 벌써 잊었습니다. 연대기도 그렇습니다. 그 뚜렷하던 숫자들이 흩어진 구름처럼 이미 몽롱해졌습니다. 그런데 언제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그날, 거기 머물던 이를테면 산사의 탑 그림자의 색깔과 무게가 뚜렷합니다. 꽤 긴 산길을 올라 많은 걸음 끝에 닿았던 그곳에서의 조금은 피곤했던 휴식이 바로 지금인 듯 뚜렷합니다. 숫자가 기억을 안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차츰 저는 숫자로부터 놓여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치밀한 삶의 방책이 이제는 효력을 다했다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서술의 논리를 펄쩍 건너뛰어 이제는 나도 꽤 자유로워진 것 같아!’ 하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 저를 보고 키득거리실 분들의 표정들이 그려져 서둘러 그런 발언은 삼가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습니다(14~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촌철살인: 하상욱의 시

 

서로가

소홀했는데

 

덕분에

소식 듣게 돼

   

이 시의 제목은? ‘애니팡이다. 애니팡, 알만한 사람은 아는 그 게임! 게임에 필요한 하트를 얻기 위해 자주 연락 한 적 없는 친구에게 이 게임을 추천하는 을 보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말이다. 정말 이 게임 덕분에 그 친구가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되기도 했다. 하상욱의 애니팡이라는 시는 게임 때문에 연락하는 우리의 우픈세태를 꼬집는다. 하지만 이 꼬집음은 아주 살짝, 그러니까 꼬집꼬집의 수준이다. 그래서 그렇게 아프지 않다. 그냥 정말, 그러네!’라고 생각하며 웃을 넘길 정도다.

그러면 이제 그의 시의 방식을 알게 되었다면 이 시의 제목은 뭘까?

 

고민하게

 

우리

둘 사이

 

끝이

어딜까

 

너의

잠재력

 

제목을 말하기 전에 이 시를 쓴 시인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이 시를 쓴 시인은 하상욱이다. 시를 팔아먹기 때문에 스스로를 시팔이라고 부른다. 이건 욕도 아니고 욕이 아닌 것도 아니다. 하상욱은 건국대학교 커뮤니케이션디자인 학과를 졸업하였다. 2014년 대학생이 가장 좋아하는 문학인으로 윤동주와 함께 5위에 올랐으며, 󰡔서울 시1󰡕10년 간 가장 많이 팔린 시집으로 4위에 󰡔서울 시2󰡕11위를 차지했다. 이외수를 제치고 온라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뽑혔으며, 각종 SNS에서 10만 개가 넘는 좋아요 개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부산경찰청은 하상욱을 홍보대사로 위촉하기도 했다.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시인이라 할 만하다.

그럼 위의 시의 제목은 무엇을까? 축의금이며 다 쓴 치약이다. 그의 시는 아주 짧지만, 대상을 재치 있게 포착하고 있다. “이게/뭐라고//이리/힘들까라는 시의 제목은 메뉴 선택이다. 오늘은 뭐 먹지는 만고의 너나 없는 고민이다. “니가/있기에//나는/힘을 내대출금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빚을 갚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왜 하필/이곳에//왜 하필/당신이의 제목은 같은 옷이며, “잘못된/선택//뒤늦은/후회내 앞자리만 안 내림이다. 그의 시는 대상을 향해 강렬하고 정확하게 날아간다. 제목을 듣고 나면 절로 하는 감탄사를 내뱉게 될 것이며, 하마터면 박수도 치게 될지도 모른다. 심하면 자려고 이불을 끌어올리다가 터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잘한 재미도 몇 개 있다. 이 시집을 펴면 다른 시집과 마찬가지로 작가소개작가의 말이 있다. 그런데 거기에 적힌 것은 글이 아니라 사진이다. 이렇게 말이다.

    

 

제일 아래에 제목을 적은 것은 충격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전략일 것이다.

 

잘 읽어보면 애니팡이 딱히 이 시의 제목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하상욱 단편시집 애니팡에서”라는 표기의 중의성 때문이다. 단편소설집은 있어도 단편시집은 없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저 짧은 시가 애니팡이라는 시집의 일부인지, 아니면 애니팡이라는 시의 일부인지 알 수 없다. 어찌 되었든 그것이 일부라면 전체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서울 시󰡕는 시집이 아니라 하상욱의 시들 중 일부를 모아놓은 선집으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 하상욱은 시의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을 통해서도 웃음을 유발하고 있다. 이 웃음이 박장대소 할만한 웃음은 아니더라도 기특하게 기발하구나 이런 생각은 든다.

하상욱 시를 (시라고 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촌철살인이다. 짧으면서 기발하다는 것, 이것이 이 시의 미덕이자, 이 시가 지닌 전부다. 그렇다고 하상욱이 단시(short poem)의 형식을 발견하거나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사람이라고 말할 순 없다.

 

2. ‘칸칸이 밤이 깊은: 서정춘의 시

서정춘은 이미 오래전에 단시를 통해 한국현대시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으니 시를 보는 것이 좋겠다. 이것은 !이라는 시다.

 

누가 뒷일 보는 거다

소통의 방언이다

저 비음이 긍정적이다

'!' 전문

 

수세식 화장실이 아니라 푸세식화장실이라야 어울릴 것 같다. 그야말로 오래된 것과 새 것의 똥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힘을 주는 사람이 있다. 목젖을 울리는 소리가 아니라 코를 울리는 저 소리, 그냥 도 아니고 !’이라니, 저 소리를 들었다면 아마 얼결에 박수를 치거나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소통이 절로 작동한다. 하상욱만큼 강렬하지는 않다고? 그러면 이 시는 어떤가.

 

어리고, 배고픈 자식이 고향을 떴다

아가, 애비 말 잊지 마라

가서 배불리 먹고 사는 곳

그곳이 고향이란다

―「30년 전1959년 겨울전문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1959년 겨울에 시인은 고향을 떠나왔나 보다. 시인의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는 아들이 행여 고향으로 돌아올까 봐 걱정이었나 보다. 돌아오면 먹고 살기 막막한 이곳에서 가난은 대물림 될 것이 번연하니 말이다. 그래서 배불리 먹고 사는 곳을 고향으로 여기고 살라는 말을 했을 거다. 어린 손자의 손을 붙잡은 할머니 역시 아들의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런 말 밖에 할 수 없는 시인의 아버지와 시인의 할머니의 삶은 얼마나 지난했던 것일까, 어린 아이를 떠나보내며 이들은 소리도 없이 얼마나 크게 울어야 했을까, 그리고 30년 후 늙어버린 아이가 떠올린 이 말은 또 얼마나 그를 울렸던 것일까?

시인은 1941년 전남 순천에서 가난한 마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가난 덕분에 매산중고 야간부를 다녀야 했다. 아버지의 친구이자 한때 빨치산이었던 외팔이 장씨의 서가에서 정지용, 백석, 이용악, 오장환의 시를 읽었고, 구상 시인의 친구이자 동경 제대 출신 조율사인 삐아노 최씨에게서 정식 시인으로 인정받고 술상을 마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위의 시를 믿는다면 서정춘은 1959년 겨울 순천을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무엇을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거의 10년이 지난 1968신아일보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등단은 했지만 학력이 낮다는 이유로 취직을 하지 못한 채 전전하다 소설가 김승옥의 소개로 동화출판공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그는 그 직장을 1996년까지 다녔고, 퇴직하면 쓸쓸해질 것 같아 그동안 써온 시를 묶었다고 한다. 등단 후 29년 동안 써온 시는 고작 70여 편, 그런데 거기서 다시 반을 버리고 35편만으로 시집을 묶었다. 1년에 한 편을 쓴 셈인데, 시에 대한 그의 결벽증이 대개 이와 같다(시인에 대해서는 1996년 이문재가 시사저널에 쓴 등단 29년 만에 첫 시집 낸 서정춘이라는 기사를 참조할 것.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607 검색일: 20141213). 이문재는 서정춘의 시를 박용래의 따뜻한 서정(내용)과 김종삼의 언어 경제’(형식)가 하나의 몸을 이루어 그 발뒤꿈치를 들어올린 시라고 평했다.

서정춘과 하상욱의 공통점은 언어를 경제적으로 사용한다는 것, 그리고 재치 있고 기발한 발상을 통해 충격을 준다는 것이다. 이때 충격은 지적인 충격 즉 인식론적 충격이다. 그런데 서정춘이 하상욱이 가지지 못한 미덕 하나를 더 가지고 있다. 이미지가 그것이다.

 

글쎄

산기슭에

홀아비가 살았더라

살다가 죽었더라

빈 집은 헐었더라

헐다가 내려앉았더라

싸리울 너머

배경만 어림잡아

허공 십만 평이더라-

―「글쎄전문

 

홀아비가 살았다는 산기슭의 빈집, 홀아비가 죽자 그 집을 헐었는데, 온전히 헐기도 전에 제물에 풀썩 집은 내려않았나 보다. 그렇게 내려앉은 집 너머로 허공이 십만 평이나 펼쳐진다. 그냥 십만 평도 아니고 어림잡아십만 평! 십만 평은, 외로움을 견디며 살아왔을 홀아비의 쓸쓸한 내면의 다름 아닐 것이다. ‘홀아비는 외로웠다라고 말하는 것과 그 외로움을 어림잡아 허공 십만 평이라고 말하는 것의 차이는 얼마나 큰가. 땅 십만 평은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혹은 어떤 나무나 집을 기준으로 저-기까지, 대략 그만큼이 십만 평일 게다. 그런데 허공의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기준은 무엇으로 삼아야 하나? 땅 십만 평과 달리 허공 십만 평은 시각화할 수 없다. 즉 홀아비가 가진 외로움은 짐작할 수 없다. 하니 어림잡아 허공 십만 평일 수밖에…… 지적 충격은 언어의 영역 안에 존재하는 것이어서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지가 부여하는 충격은 이루다 말할 수 없다. 언젠가 신형철은 심상(心象)으로 번역되는 이미지(image)를 한자어로 바꿔 쓴 바 있다. “이 미지(未知)”가 그것이다. 이미지가 심상이긴 하지만 시에서 성공하는 이미지는 우리가 한 번도 감각해보지 못한 것, 한 번도 표현한 적 없는 것이어야 한다. 아직 알지 못하는(未知)’ 어떤 것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미지에 대한 번역으로서 이 미지(未知)”는 탁월하다 할만하다.

서정춘의 󰡔죽편󰡕이 나왔을 때, 시단에서는 󰡔죽편󰡕 읽어봤는가?”라는 새로운 인사말이 돌았을 정도라고 한다. 과장처럼 들리겠지만, 그의 시 죽편1을 읽으면 어쩌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부터, ------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죽편1여행전문

 

, 준비 되었다면 이제 여행을 떠나야겠다! 목적지는 대나무 꽃이 피는 마을이고, 교통수단은 기차. 그런데 그냥 기차가 아니라 푸른 기차며 게다가 이 기차는 칸칸마다 밤이 깊. 어찌된 영문일까? 이 시가 죽편(竹篇)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 기차가 실제의 기차가 아니라 대나무의 은유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시사철 푸른 대나무는 마디져 있으므로 그 마디는 기차의 한 에 해당한다. 마디와 마디가 막혔으니 밤처럼 어두울 밖에……. ‘밤이 깊긴 하지만, 그 어둠이 위험하다가거나 무서울 것 같지는 않다. 그 어둠은 까맣지 않고 푸를 것이다. ‘푸른 기차의 밤이니 말이다. 이제 기차가 출발한다.

그런데 목적지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아차 그걸 말하는 깜빡하다니! (쯧쯧) 사실을 말하자면 일부러 그 말을 안했다. 기차가 출발했으니 이제 말할 수 있겠다. 자그마치 백년이다. (출발 전에 말했다면 당신은 이 기차에서 내렸을는지 모른다.) 대나무가 백년이 지나면 꽃을 피운다는 속설이 있다. 그렇다면 이 여행은 우리가 아는 식의 여행, 일상에서 잠시 벗어났다 돌아오는 그런 여행하고는 거리가 멀다. 시인은 대나무가 자라 대나무 꽃을 피울 때까지 즉 대나무의 일생 전체를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기서 조금 더 의미를 밀고 나갈 수도 있겠다. 여행이 대나무의 일생이라면, ‘대나무는 무엇일까?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고 꼿꼿한 이 대나무를 시인 서정춘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대나무의 일생이란 곧 시인의 삶을 의미하지 않을까, (시인이 의도했던 그렇지 않던 말이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고향을 떠나 거의 마흔 해를 타지에서 살아온 그의 삶, 그 고단하고 지난했을 삶을 칸칸마다 밤이 깊다고 말했던 것은 아닐까, 그 삶이 그렇게 절망적이지만은 않은 푸른 삶이었을 것인데, 그렇게 푸른 삶’, 어떤 꿈을 간직한 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시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니 대꽃을 피우는 마을이란 시인의 고향이기도 하겠지만, 시인의 시가 만개할 어떤 시기가 아닐까. 고향을 떠나온 시인의 삶 전체가 여행이기도 할 것이며, 홀로 고학하며 시를 써온 시인의 시적 이력 전체가 여행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맑고 푸른 시를 읽고 나니, ‘, 그 시 참 좋네라는 생각이 든다.

 

3. , 이미지!

이 말을 해두는 것이 좋겠다. 청출어람이라 했던가! 이미지는 언어에서 나왔지만, 언어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인식과 우리의 빈약한 지식과 앎을 초과하여 작동한다. 이미지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을 간직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사실 그동안 문학을 공부하는 일에 회의를 품고 있었다. 문학은 그 모든 지위를 영상에게 빼앗기고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그런 문학을 공부하는 일이 죽은 자식의 불알을 만지는 것처럼 허망하게 느껴졌다. 이미지적 충격을 원한다면 영화를 보면 될 것이고, 지적 충격을 원한다면 철학을 공부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 이미지가 나를 끌어올렸다. 언어가 만드는 이미지는 영상과 같은 직접적 이미지가 범접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 또한 언어가 만드는 이미지는 언어에서 나왔음에도 언어를 뛰어넘어 언어가 나아가지 못하는 지점을 점유한다. 철학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날아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언어가 만드는 이미지는 때로 영화보다 강렬하며 철학보다 똑똑하다. 이러한 이미지로 하여 다시 문학을 믿기로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장남자 시코쿠>>로 한국시의 물줄기를 자신 쪽으로 틀어버린 바 있는 황병승은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후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생활고에 치이다 보니 시에만 집중할 수 없었죠.”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가 아직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시인의 말은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도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는 다른 언어가 한 번도 발 딛지 못한 최초의 영역에 언어를 펼쳐 새로운 길을 놓은 시를 썼고, 새로울 것이란 더 이상 없을 법도 한 이 지난한 인간의 역사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미지를 길어 올렸다. 그는 그의 시와 더불어 시간도 공간도 없는 영역, 어떤 찬란한, 침범 불가능한 곳을 점유한, 이 비루한 세상과 분리된 시라는 세상에 접어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될만큼 터무니 없이 좋은 시를 쓰는 사람이었다. 생활고라는 말이 그와 연결되어 있으리라고는 정말이지 전혀 생각조차 못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측면에서 충격을 받았다.

 

, 그런데도 삶은 끝나지 않는구나!’가 그 하나라면

 

, 그러고도 살아남아 삶의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 써야 하는구나!’가 나머지 하나였다.

 

먼저의 당혹스러움이 죽음을 향한 것이라면 나중의 것은 이 시인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이 당혹감 혹은 원망은 그를 비롯한 인간의 삶 전체로 뻗어나갔다. 그러니까 이 시인의 별 말 아닌 말 덕분에 나는 추잡스러운 삶을 생각했고 또 광폭한 죽음의 민낯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죽음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 찾아오는 법이 없다. 죽음은 삶의 대척점에서 삶과 완전히 무관하며 그 삶에 포섭된 하잘 것 없는 인간의 기대, 바람, 기원 따위와도 관계없이, 어떤 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서, 자신이 원할 때 자신의 법에 따라, 심지어 자살을 선택할 때조차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그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며, 아무 때고 삶 편으로 스민다는 것, 삶에서 죽음 편으로 결코 들어설 수 없이 오직 죽음 쪽에서 삶 쪽으로만 스민다는 것.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4-12-13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황병승의 시보다도 이 글이 더 좋은걸요.
황병승의 시들은 제겐 어려워요. 김소연의 시조차 소화하지 못하는 제가
황병승을 접수할 수 있을리가 있을까요.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도 모르고 철학도 모르는 인간의 강렬한 제스처!이 책을 사느니 당신의 만원을 찢고 냉장고를 버려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