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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의 기다림 ㅣ 숙맥 8
정진홍 외 지음 / 푸른사상 / 2014년 12월
평점 :
일흔이 넘은 선생들께서 모여 만든 수필
동인을 운영한다.
그 이름이 숙맥이다.
벌써 여덟 번째인 이 동인집의 제목은
길 위에서의 기다림이다.
그 중 정진홍 선생님의 「걸음.
길.
그리고……」를 읽게 되었다는 것은 일종의 행운이다.
이 글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정진홍 선생님은 길을 걸으면 걸음의
수를 세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수를 셀 수 없게
되었다.
그때 비로소 자신을 지탱해온 것이 걸음의 수가
아니라 걸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걸음의 수는 길의 것이지 ‘나’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걸음은 자신의 것이며 비록 걸음의 수를 잊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걸음은 지속된다.
걸음의 수가 길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걸음이 길을
완성한다.
‘나’의 걸음이 아니면 길은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늘그막에 깨닫게
되었다고 선생은 겸손히 말하고 있다.
그리고 더 큰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치밀한 삶의 방책’이었던 숫자가 자리를 비켜주자 그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산사의 탑 그림자의 색깔과
무게”
또는 “꽤 긴 산길을 올라 많은 걸음 끝에 닿았던 그곳에서의 조금은 피곤했던
휴식”이 이제와서 더 분명하게 살아난다고 말하고 있다.
여든을 앞둔 선생의 말이 설사 거짓이더라도 나는
믿으리라.
이 글의 전문은
이렇다.
전략(길을 걸을 때 걸음걸이를 세는 것이 버릇이라는
내용의 글을 썼고 그 글의 전문을 인용하고 있음)
이 글을 쓴 지 무척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저는 길을
걷습니다.
즐겨 걷습니다.
그리고 문을 나서면 나도 모르게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하나,
둘,
셋……
하고 걸음을 세기 시작합니다.
예나 이제나 그 버릇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저는 풀턴의 그림에서 꽤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달라진 것도 없지
않습니다.
실은 바로 그 달라진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인데,
이렇게 서두가 길어졌습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 글을 쓴 뒤에 집을 또 한 차례
옮겼습니다.
같은 동네라서 이전의 전철역을 여전히
이용합니다.
그런데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아직 이전처럼 집에서
전철까지의 걸음을 정확히 센 적이 없습니다.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왜 그런지요.
틀림없이 집에서 나설 때면 걸음을 세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전철역에 이르면 그 걸음 수가 딱 멈춰
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되질 않습니다.
걷다 보면,
그러니까 걸음을 세다 보면,
어느 틈에 저는 제가 세던 걸음 수를 까맣게
잊습니다.
마치 한 움큼 움켜쥔 모래가 주먹에서 나도 모르게
새어 나가듯이 그러게 숫자가 모두 제풀에 사라집니다.
어떤 날은 저도 제가 그런 것이 하도 이상해서
의도적으로 끝까지 수를 세리라 다짐을 하고 열 단위로 오른손 손가락을 접고,
다시 백 단위로 왼손 손가락을 접으면서 걸어 보기도
했습니다.
한데 그렇게 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 저는 제가 센 숫자들이 모두
사라진 빈주먹만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숫자가 수를 세는 저를 배신하고 스스로 저에게서
달아난 것인지,
아니면 수를 세다 수에 묻혀 제가 사라진 저를
의식을 못한 것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제가 수를 끝까지 세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비록 걸음을 세는 수는 잃어버려도 저는 여전히 걷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걸음 수의 상실이 걸음의 상실은
아니었습니다.
그 걸음이 쌓은 수가 당연히 없지 않습니다만 그
수를 세는 기억이,
그러니까 그 숫자가,
저를 제가 이르려는 곳에 옮겨 놓은 것은
아닙니다.
제가 거기 이르러 ‘이제 다 걸었다!’고 하는 것을 확인하기까지 저를 ‘살게 한 것’은 걸음이지 걸음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세던 수를 잃었다거나 잊은 것이 제 걸음
걷기를 조금도 훼손한 것은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저로 하여금 걸음을 셈하는 걷기에서 벗어나
셈과는 상관없는 진정한,
그리고 참으로 순수하다고 해야
할,
그런 걸음을 걷게 한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저는 이제야 비로소
‘걸음마’를 하기 시작한 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슬프게도 너무 늦은 터득이긴
한데,
그래도 아직 ‘해가 지기 이전의 오늘 이 시간’에 그런 생각을 한 제가 스스로 기특하기 짝이
없습니다.
‘길’을 걷는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온갖 길이 제 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선택은 늘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어떤 길 위에 들어서야 비로소 사람살이를
지탱하는 것이 삶인데 선택을 회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뜻밖에 쉬운 길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외롭고 싫고 아픈 길도 왜 그리 자주
만났었는지요.
게다가 간판들은 어찌 그리
현란했는지요.
유혹은 가끔 있는 감춰진 함정이 아니라 그대로
드러난 일상이었습니다.
어쩌면 걸음을 세는 일은 그 선택과 그
힘듦과 그 유혹을 밀쳐 낼 수 있는 제 유일한 방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제 경험이 저도 모르게 저로 하여금 그러한
‘전략’을 구사하게 한 것이라고 해야 옳을 터인데,
하긴 이러한 생각은 걸음 세기를 잃은 지금 그
잊음을 정당화하기 위한 가난한 변명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이 그런 것으로
바뀝니다.
알 수 없지만 그야말로 ‘경험적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중요한 것은
‘길’이 아니었습니다.
‘걸음’이었습니다.
길이 걸음으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걸음이 길을 내고
길을 채웠습니다.
길이 준 것이었다면 길의 길이를 짐작할 걸음의 수를
세야 하겠지만 걸음이 준 것이라면 길은 걸음이 빚는 만큼의 길이만을 가질 것인데 그 걸음을 굳이 셀 필요가 없습니다.
걸음 자체의 완성이 길의 완성일
것이니까요.
그래서 이제는 ‘길’을 걷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걸음’을 걷는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관성처럼 문을 나서면서
하나,
둘,
셋……하며 걸음을 셉니다.
그런데 무든 숫자를 잊었다고 하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저는 길의 끝에 있음을 확인합니다.
숫자와 상관없이 걸음의 끝은 길의
완성입니다.
달력 넘기는 일이 서글프던 때가 없지
않았습니다.
숫자의 확인은 바른 삶의
방편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제는 제 나이 헤아리기도
힘듭니다.
자식들이 몇 살인지는 벌써
잊었습니다.
연대기도 그렇습니다.
그 뚜렷하던 숫자들이 흩어진 구름처럼 이미
몽롱해졌습니다.
그런데 언제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그날,
거기 머물던 이를테면 산사의 탑 그림자의 색깔과
무게가 뚜렷합니다.
꽤 긴 산길을 올라 많은 걸음 끝에 닿았던
그곳에서의 조금은 피곤했던 휴식이 바로 지금인 듯 뚜렷합니다.
숫자가 기억을 안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차츰 저는 숫자로부터 놓여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치밀한 삶의 방책이 이제는 효력을 다했다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서술의 논리를 펄쩍 건너뛰어
‘이제는 나도 꽤 자유로워진 것 같아!’
하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 저를 보고 키득거리실
분들의 표정들이 그려져 서둘러 그런 발언은 삼가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습니다(14~1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