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철학사 - 상 - 고대와 중세 서양 철학사 - 상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지음, 강성위 옮김 / 이문출판사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 스토아학파에 대한 선행연구자의 물음: 스토아학파에게 '자유'는 어떻게 가능한가?

  스토아학파는 운명론자이면서 개인의 자유를 주장한다. 운명과 자유는 상충할 수밖에 없다. 운명은 이겨낼 수 없고, 제지할 수 없고, 방향을 돌릴 수 없는 원인이다. 운명이라는 거대한 원리에 맞추어 가는 삶, 이것이 현자의 삶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현자의 삶은 운명의 굴레에 갇힌 비주체적이며 수동적인 삶일 뿐이다. 스토아학파 혹은 그들의 가치의 실행자인 현자에게 자유가 성립될 수 있는 여지는 어디에 있는가?

2. 힐스베르그의 대답: 간단히 요약하자면 운명이 정해준 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곧 자유.

  스토아학파는 자유를 달리 해석함으로써 이런 모순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자유는 현실에 있어서는, 필연성과 일치된다는 것이다. 오직 어리석은 사람만이 꼭 있지 않으면 안될 것을, 그것과는 다른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현자는 사건의 법칙()을 자기 자신의 법칙()이라고 본다. 현자는 다른 것을 조금도 기대하지 않고, 운명을 긍정한다. 한 가지의 다른 의지는 자의(恣意)이며, 이 자의는 정욕과 무질서의 격정이 넘쳐흐르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욕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자유롭지가 못하며, 자기의 충동의 노예이다. 그는 바로 병든 사람이다. 그러나 철학을 통해 이성이 지배를 하게되어 건강해진 현인은, 운명의 필연성에 짓눌려 괴로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꺼이 맞아들인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완전히 스토아학파의 궤도를 따르면서, 키케로가 말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영혼의 의약인 철학은, 인간이 자기의 육체적인 성장과 성숙을 당연하고 자연적인 것이라고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운명이 정해준 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게끔 인간을 유도해 나간다.

 

3. 해소되지 않는 것들 혹은 부연해야 할 것들

  스토아학파는 운명을 말하면서 어떻게 자유를 말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 나름의 답을 내린 힐스베르그의 결론은 이렇다. 모든 운명을 긍정하며 운명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자유며, 이 자유를 괴로워하지 않는 자가 현자라는 것. 이것으로 만족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스토아학파의 윤리의 핵심 개념은 힐스베르그 스스로도 지적하였듯이 오이케이시스(Oikeiosis)이기 때문이다. 오이케이시스는 윤리적인 규범을 외부에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내면에서 끌어내는 것을 뜻한다. 전용(자기 것으로 삼음, Zueigung)’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플라톤의 오이케이온(Oikeion=)도 아니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평균적 또는 보편적으로 이상화된 인간의 본성도 아니다. 이것보다 더 직접적인 차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는 외부에서 왔거나, 인간의 평균적인 것이기 때문에 윤리적 규범의 목록이 존재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규범이 있기 때문에 그 규범을 지키면 윤리적이다. 이에 반해 스토아학파에게는 규범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윤리적 규범을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내면에서 찾는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처럼 외부에서 어떤 규범을 가져올 수 없다. 또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개인이 가진 윤리성을 등질화하거나 평균화할 수 없다.

  스토아학파에게 개인의 윤리는 개인의 내면에 존재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윤리가 이미 전제되어 있다. 스토아학파는 운명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운명을 개인이 알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운명이 주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운명을 찾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몫인 것이다. 운명을 알지 못하는 개인은 운명을 찾아야 한다. 그 속에서 절대적 자유가 생긴다. 이 자유는 윤리나 도덕에 지배받는 자유가 아니라 그러한 모든 것을 뚫고 날아오르는 자유다. 새로운 윤리와 도덕을 창조하는 자유다.

  운명은 주어져 있지만 인간은 운명을 알지 못하므로 운명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운명은 '나'의 내부에 내부에 각인되어 있다. '나'를 끝까지 밀고 나갈 때 비로소 운명은 발견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나'를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일까? 그것을 알 수 없다. 그 알 수 없는 곳까지 밀고나가는 일이 이것이 자유며, 스토아학파의 윤리다.

  이렇게 비유할 수도 있겠다. <심청전(沈淸傳)>의 주인공은 심청이다. 여기에서 은 성씨로 쓰일 때는 이지만, 평소에는 잠기다라는 뜻으로 쓰이며 으로 읽힌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라는 시집에 나오는 그 침묵에도 이 한자를 쓴다. 침묵은 말 없음에 잠기는 것결국 잠잠한 상태를 뜻한다.) ‘심청에는 두 가지를 지칭한다. 심봉사의 딸이라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맑은 물에 잠기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다라는 말은 동어반복 밖에 되지 않는다. “맑은 물에 빠질 소녀는 맑은 물에 빠졌다.” (심청=맑은 물에 잠길 소녀 / 인당수=연못 같이 맑은 물) 심청은 이름 속에 자신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심청은 자신의 이러한 운명을 알지 못한다. 심청이 인당수에 빠진 것은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 혹은 자유 속에서 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심청은 효녀이기 이전에 현자인 셈이다.

  이 개념[오이케이시스(Oikeiosis)]의 근본적인 동기는, 윤리적인 규점을 인간의 본성의 근원적인 충동 즉 감각적으로 스스로를 지각하는 데서 출발해서 자아에게 향하는 충동에서 이끌어내려는 경향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로 발전해나가는, 이런 자기 자신에 대한 지각에 있어서는, 우리들은 자아를 우리들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 다음에는 여기서부터 오이케이오시스가 가족, 정치 공동체 그리고 마침내는 전인류에게로 퍼져나간다. 즉 자아와 사회에 있어서 자아의 확장을 가능케 해주고 보장해주는 모든 것과, 이로운 것은 재촉하고 해로운 것은 멀리하는, 이런 모든 것으로 퍼져나간다. 따라서 오이케이오시스란 자기 것으로 삼음(Zueigung)’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아학파는 윤리학과 윤리학의 가치들을 이렇게 근거지우는 것과는 반대로 텔로스를 로고스에만 한정하기 때문에 역시 이런 점에서도 그 테두리가 소망하던 이상으로써 채워지지를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즉 스토아학파가 말하고 있는 인간의 본성은 플라톤의 윤리학이 말하고 있는 그런 오이케이온(Oikeion=아카톤 <>)도 아니고, 또 꼭같이 이상화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의 본성도 아니며 감각적인 자기지각에서 충동적으로 생긴오이케이오시스임이 분명하다(<<서양철학사>>, 1992, 318).

  객관적으로 올바른 일을 한다고는 하더라도, 우연이나 경향 때문에 행위하다가 객관적으로 올바른 일을 한 사람은 아직도 완전한 윤리를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니다. 이러한 완전한 윤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로 당연히 있어야 한다(Seinsollendes)’고 하는 관점에서, 즉 의무 자체를 위해서 특별히 선을 행하는 자이다(<<서양철학사>>, 1992,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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