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손가락의 시
진은영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이 시에
대한 이광호의 분석은 탁월하며 동시에 아름답다.
그래서 길더라도 여기
옮겨 놓는다.
우선 시인의
손가락에 관해 말해보자.
손가락이란
무엇인가?
손가락은 무엇을
가리키는 의미 행위의 마력을 보유한다.
손가락은 대상에
관한 주체의 감정과 의식을 표현한다.
손가락은
지적하고,
감탄하고,
축복하고,
약속하고,
경고하고,
판정하고,
경멸하고,
망설이고,
침묵한다.
가령
‘침묵’이라는 전언은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는 표현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것은 인식과
판별의 표지이다.
그러니까
손가락은 그것을 ‘소유한’
주체의 의식을
표현하는 신체의 끝이다.
그것은 주체의
중심에서 뻗어나온 의식의 지향점을 가리킨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인가?
시인에게
손가락은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는
지점이다.
손가락은
혹시,
몸과 의식의
중심에서 ‘바깥’을 탈주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긴 손가락의
시]는 시에 관한
시인의 자의식이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다.
시는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쓰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시는 몸으로
쓰는 것이다’라는 말과
다르다.
‘손가락’은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는
것이며,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에
비유된다.
‘손가락-가지’의 비유 관계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몸의 중심에서 ‘다른
것’을 향하는
존재로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
‘가지’는 가장
여리고,
가장 쓸모없는
존재이다.
‘손가락-가지’는 이를테면
몸의 극지(極地)이다.
그러므로
‘손가락’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는 지점에서
‘외부’와 만나려는
욕망과 관련된다.
그 지점이야말로
“시인의 잎들이
피어”나는 생성의
자리이다.
여기서 손가락과
관련된 주체 중심의 상징체계는 전복된다.
손가락은
머리로부터의 명령을 수행하는 신체기관이 아니다.
그것은
‘나 아닌
것’과
소통하고,
‘나 아닌
것’이 되려는
움직임의 일부이다.
그러니,
시인은
‘긴
손가락’을 가진
사람이다(86~88면).
이광호의
말을 요약하자면,
진은영의 시는 자신의
중심이 아니라 자신의 바깥으로 탈주하여 ‘나 아닌 것’과 소통을 꾀한다.
주체의 의식을
벗어나려는 탈중심성과 비의지적이고 무의지적인 시의 추구,
즉 무의미 또는
쉬르레알리즘,
이러한 것이 진은영
시의 경향이다.
이 시의 말미에서
진은영은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라고 썼다.
이것은 진은영 스스로
역시 그러한 시가 가능하며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은 그러한 시들이 담겨져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진은영도
이광호도 모르고 있었던 것은 나의 중심과 아무리 먼 손가락 끝이라 할지라도 그것 역시 나의 일부라는 것이다.
즉
‘나’로부터 탈주하여 ‘나 아닌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녀의 두 번째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은 그 불가능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는 매일매일이 슬프고,
우울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