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암실문고
브라이언 무어 지음, 고유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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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한테도 이해와 공감을 얻지 못했던 40대 여성 주디스 헌에 대한 이야기다.  


이 소설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외로움이다. 주디스는 남겨지고 혼자가 되는 것에 익숙하다. 타인의 시선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자신이 대화를 이끌어가야 하며, 상대에게 호감을 주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말 한 마디, 몸짓 하나에도 온통 신경을 집중한다. 그렇다고해서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는다. 그녀는 곧이 곧대로 듣고, 자기만의 상상에 빠져들고, 혼자 결론 짓는다. 


읽는 내내 주디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외모가 뛰어나지 않다, 특출난 재능과 지참금이 없다, 지극히 평범하고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다 등등의 이유로 주디스 헌은 폄하된다. 어처구니 없게만 보이는 혼자만의 상상과 자기혐오를 반복하는 주디스의 독백을 읽으면서 그녀의 외로움이 얼마나 깊은지 마음이 아팠다.  


주디스는 일평생 그녀의 삶을 좌지우지 했던 이모를 원망하지만, 그녀 역시 이모의 일생을 닮아간다. 다른점이라면 주디스는 제 삶의 억울함을 토해낼 대상이 조카가 아니라 술이었다는 것뿐. 







 
등장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당시 아일랜드 사회의 단면을 짐작할 수 있다.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이민자 신분으로 삼십 년간 미국 생활을 했으나 금의환향은 고사하고 장애를 안고 귀향한 제임스 매든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같은 성공에 대한 꿈, 미국의 화려함, 그리고 어리석은 탐욕과 쾌락을 욕망한다. 또한  미국에서 아일랜드 이민자로 차별을 받았던 처지에 있었음에도 아일랜드로 돌아와서는 유색 인종을 비하한다.  


라이스 부인은 서른 살이 넘은 아들을 '아기'라고 부르면서 일거수일투족을 참견하고 제재하면서 모든 수발을 들어주고 있는데, 그것이 아들을 무기력하고 무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버나드 또한 그러한 엄마에게 저항하지 않고 순종하면서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먹고, 자고, 하녀를 희롱하고, 거짓말까지 꾸며내 모사를 꾸미는 게 전부다.  


열여섯 살 하녀 메리는 하숙집에서 가장 약자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인 아들과 주인 동생의 희롱과 강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서도 오히려 자신을 탓하는 모습은 현재에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들과 같은 결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사이사이 가난한 아일랜드 경제 사정과 빈부 격차, 여성 문제, 종교 등 인물들의 정황과 사건들을 통해 19세기 이후부터 꾸준히 대두되었던 사회 문제들을 간접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  


ㅡ 


이 소설은 한편의 코미디극 같기도 하다.  


주디스는 오닐 부부가 절친이라고 믿지만, 정작 오닐 가족은 주디스가 일요일 오후마다 꼬박꼬박 찾아오는 것이 마뜩치 않고 불편하다. 그녀가 올 시간이면 네 식구가 너나할것 없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하려고 한다. 누군가 그녀를 맡아야 한다는 모종의 책임감은 오닐네 가족에게 짜증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주디스는 오닐네 가족이 자신한테 관심도 없고, 그녀의 방문을 유쾌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교양이라는 허위 뒤에서 각자의 진심을 숨기고 있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잘못의 원인을 서로에게 떠넘기고 꼬리에 꼬리를 물듯 상대의 치부를 까발리는 자들의 모습은 시쳇말로 웃픈 소동극처럼 보인다.  


육체적 욕망을 억누르고 기독교적 신념으로 순결을 지키며, 폭력적이고 인색한 이모를 헌식적으로 돌보았지만, 세상은 위선의 허울 뒤에서 죄악과 부패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 법도, 신도 이러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도대체 도덕과 종교와 법은 왜 존재하는가? 충실한 카톨릭 신자로서 살아온 주디스는 신은 없다고 단정한다. 


ㅡ 


주디스는 버나드와 말다툼을 하면서 이번 생은 사후에 판별될 공덕을 쌓기 위해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고 말하지만, 이 고되고 외로운 십자가에 주디스 본인도 얼마나 분노했던가. 


자괴감에 치를 떨며 괴로워하는 주디스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 그녀는 혼자 말하고, 혼자 듣는다. 고해성사를 핑계로 자신의 처지를 늘어놓는 그녀의 말을 사제조차 들어주지 않는다. 주디스는 신에게 말한다. 어서 계시를 보여달라고.  


퇴거를 통보받고 방 안에서 홀로 흐느끼며 현실과는 다른 일상과 훗날 자신의 장례식을 상상하는 주디스의 모습은 너무나 쓸쓸하게 느껴진다. 죽어서만이라도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했던 주디스의 처절한 독백이, 그리고 주디스에게 어디로 가야되는지를 묻는 택시 기사의 물음에 어디로 가야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 대답을 못하는 주디스의 모습이, 나는 마냥 슬펐다. 


술에 취한 상태로 택시를 타고 마치 순례하듯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는 주디스의 모습은 재산과 마땅한 직업이 없고, 가정이라는 울타리도 없는 중년의 비혼 여성을 넘어서 어느 한 곳에 안정된 삶의 거처를 마련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도시 유목민이 된 우리네 모습과 겹쳐졌다. 


결국 그녀가 도달한 곳.
주디스는 마지막까지 이모의 그늘에서도, 신에게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담담하게 읊조리는 그녀의 한 마디는 왜이리 아련한지.


ㅡ 


1955년에 쓰여진 가난하고 외로운 비혼 여성에 대한 이야기에 이토록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주디스 헌이라는 캐릭터가 조금 극단적으로 읽힐 수 있으나 기실 우리는 점점 더 주디스 헌의 삶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금에 있어 출산은 고사하고 결혼도 꺼린다. 의료 기술의 발달로 수명은 연장되어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으나 실질 노동 인구는 줄어들어 노인 복지가 더 나아질지는 미지수다. 핵가족 시대에서 1인 가구 시대로 접어들어 노인 부양과 노년층 빈곤 및 고독사는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또한 우울증과 극단적 선택, 조기 퇴직과 실업 등 소설에서 보여지는 사회적 문제는 세월이 지날수록 더 크고 넓고 깊게 심각해지고 있다. 


요양원으로 보내진 에디 마리넌. 그녀의 모습이 그다지 낯설지 않은 이유, 알 것 같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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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소설
앙투안 로랭 지음, 김정은 옮김 / 하빌리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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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학에서 스릴러 소설 찾기가 쉽지 않은데 작품성, 대중성을 모두 잡은 작품으라고 하니 자못 궁금하다. 미셸 우엘벡의 작품들과 견줄만할 정도로 가치가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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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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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누구요?"
"우린 사람이오."

(p137) 
 


선문답같은 등장인물의 대화와 부조리극으로 오래 전부터 유명한 이 작품은 한 번만 읽기에는 부족하다. 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읽으면 읽을수록 눈에 보이는 것들이 많아지는 작품이다. 이번까지 세번째 읽는다.  


50여년간 실체도 명확하지 않은 고도Godot라는 인물을 기다리는 두 남자. 에스트라공은 이만 떠나자고 하고, 블라디미르는 고도를 기다리겠다고 한다. 그들의 하루는 단조롭기 그지없다. 한 그루의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를 입씨름하고, 서로의 불만을 토로하고, 목을 매려다가 실패하고, 소년에게서 내일의 다짐을 받고, 고도를 기다릴 뿐. 이것이 반복되는 그들의 매일이다. 







베케트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를 통해 일상의 단조로움, 의미없는 행위, 현대인이 갖는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극도의 개인주의로 깊어지는 외로움을 얘기하고 있다. 


제 발이 잘못됐는데도 구두 탓만 하는 게 인간이라고 말하는 블라디미르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뉘우친다는 에스트라공의 말은 획일화된 현대사회의 틀 안에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을 밀어넣지 못해 도태되는 인간의 모습을 자조한다.  


블라디미르는 구세주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당시 같이 못박힌 두 도둑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 현장에 있었던 네 사람 중 단 한 사람만이 구원받은 도둑의 얘기를 썼는데, 후세 사람들은 오직 그 사람의 기록만 믿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에스트라공은 간단히 대답한다. 사람들이 다 바보라서 그렇다는 것. 이는 너나할것 없이 모두 하나의 방향으로 달려갈 때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리고 누가 정해놓았는지 알 수 없는 기준선에 도달하기 위해 자아쯤은 놓아버리며 안전을 명분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권리를 헐값에 팔아버리고 이후에 찾아오는 자괴감에 우울해지는 우리네 모습을 그대로 투영한다.  


럭키에게 욕설과 폭력을 행사하는 포조에게 인간으로서 창피하고 파렴치한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주인으로부터 겨우 얻어먹는 럭키의 뼈다귀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뜯는 에스트라공의 모습에서, 버림받지 않기 위해 자아를 버리면서까지 복종하는 럭키에게서, 부조리의 한 단면을 보게 된다. 쓰임이 다하면 버려지는 소모품처럼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그들의 대화를 읽자니 인생의 공허와 외로움을 새삼 느낀다.  


2막에서 에스트라공은 혼자 있을 때가 낫다고, 그들은 차라리 헤어지는 게 낫다고 말하면서도 블라디미르와 붙어다닌다. 이러한 모습은 버림받을 게 무서워 폭력을 감수하는 1막에서의 럭키와 닮아 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왜 고도를 기다리는지, 무엇을 염원하는지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ㅡ 


1막과 2막의 차이를 보자면 일단 나무. 1막에서 묘사된 나무에는 마치 죽은 것처럼 잎이 전혀 없는데 2막 시작에서는 나무에 잎이 달려 있다. 두 번째는 검정색이었다가 흐릿하게 바랜 구두의 색깔. 이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기억하는 어제는 사실 훨씬 이전이었음을 암시하면서, 그들이 긴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서 고도를 기다려왔음을 얘기하고, 원을 그리듯 끊임없이 모자를 돌려쓰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단조롭고 반복적인 삶에 한 점 의혹과 변화를 시도하지 않은 채 인생이란 죽는 날까지 각자의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믿는 우리에게 본질적인 삶의 근본이란 무엇인지를 고찰하게끔 한다.  


앞이 안 보이는 포조가 누구냐고 묻자 블라디미르는 그들이 사람이라고 답한다. 여기에서 '사람'은 여러 의미로 이해된다. 현대인이 (럭키로 대변하는) 짐승과는 달리 '사람답게' 살고 있는지, 혹은 사회적 약자를 '사람으로서 인정'하고 있는지, 아니면 시와 노래와 춤과 연민의 '인간성'을 잃지 않았는지, 이것이 베케트가 독자와 관객에게 던진 질문이 아닐까. 



흥미로운 점은 세상이,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그렇다고, 베케트가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스트라공, 블라디미르, 럭키가 어떤 잘못을 해서도 아니고, 그들의 운명이나 시대가 유난스러운 것도 아니다. 세상은, 그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개개인의 인생은, 시대를 초월해 누구나 예외없이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떠나자고 말만 할뿐 정작 떠나지 못하는 에스트라공과 기약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가 같은 장소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과는 반대로 포조와 럭키는 비록 앞을 못보고 말을 못할 지언정 길을 떠난다. 새로운 길을 떠난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안주한다고 해서 행복을 장담받을 수도 없다.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가다가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데서 넘어진다면 일어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떠나면 된다는 포조의 말에서 앞선 질문의 답을 대신할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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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약국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1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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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2
도시엔 사라져가는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싶다. 


작가는 춘천에서 자라 현재 원주에서 약국을 운영 중이다. 나는 춘천은 비교적 구석구석 다녀봤지만, 원주는 백운산과 치악산을 가본 것이 전부다. 그래서 작가가 책에서 춘천 가는 길의 휴게소를 언급했을 때 '음... 가평휴게소쯤이겠군.', 또는 명동 거리와 소양호라는 단어를 읽었을 때 고개를 주억거렸다면, 약국에서 바라본 원주 시내의 풍경은 도무지 그려지지가 않았다. 원주 시내를 가 볼 핑계가 생긴 셈이다. 








버섯, 새, 고래, 거북, 문어, 나무, 외국인 이주민, 그리고 그들과 주류로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 야생 동물이 인간 세상에 들어오기까지 혹은 혐오동물로 전락하기까지, 그리고 동물실험을 비롯한 동물학대, 이주 노동자, 군 의문사, 존엄사, 노화, 자연의 순리와 생명의 순환, 생동성, 그리고 각각의 생명체들이 갖는 생의 경이로움 등 에세이를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잠시 머물다 흘러갔다. 


내가 줄줄이 늘어놓은 단어들만 보면 상당히 심각한 글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은 제법 묵직하고 심오한 현상들이 우리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고 있음을 얘기하고 있다. 약국을 드나드는 이웃들에게서, 극지방뿐 아니라 동네마다 하나쯤은 있는 뒷산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친구와 나누듯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작가가 발췌한 소설과 시와 옛 문헌의 일부들, 그리고 소소하지만 늘 바쁜 일상에서 잠시 갖는 철학적 사유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어려운 철학이 아닌 우리의 삶 속, 찰라의 순간에 떠오르는 그 수많은 생각들이야말로 철학이 아니랴. 


지난 주말에 엄마와 밥을 먹으면서 내가 알고 있는 엄마 친구들의 안부를 물었더랬다. 북가좌동(책에서 이 동네 이름이 나와 불현듯 떠오른 아줌마)에서 경영식집을 하던 친구분은? "걔 죽은 지가 언젠데." 절친 숙이 아줌마는? "절교했다." 노인들이 무슨 절교냐고 했더니 절교할 때는 노인이 아니었다나... .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나는 그렇게 나도 모르는 새에 잠깐 알았다가 잊어버린 이들을 하나둘씩 떠올렸다. 


도시에서 사라져가는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싶다는 작가.
에세이를 다 읽은 후 이전에 읽었던 그의 몇몇 소설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작가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 소리없이 사라져 간 이야기들을 쓴 거였구나... 라는 것을.




사족
마토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신시아 라일런트의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라는 책이 생각났다. 그림책 속 할머니는 자신이 죽으면 혼자 남겨질 강아지가 안쓰러워 마당에 들어선 길강아지를 선뜻 들이지 못한다. 누군가 노년에 반려 동물을 키우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노년에 반려동물의 죽음을 감당하는 것도, 동물을 혼자 남겨두는 것도 두렵다는 이유에서다. 마토의 이야기를 읽으니 사실 반려동물을 들이기가 더 조심스러워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그들과 어떻게 마음을 주고 받아야할지, 이미 많은 죽음을 보아온 내가 또 하나의 죽음을 보탤 용기가 있을지(물론 인생사,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사고나 질병없이 순리대로 산대면야), 잘 모르겠다. 



p107
아세트아미노펜 300밀리그램과 카페인 30밀리그램을 먹어서 나아지는 것이 몸의 통증만일까? 마음이 아플 때도 누군가는 진통제를 먹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기엔 내가 너무 어렸던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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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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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 청년의 군 입대 성장기 혹은 연애소설이라고 단순하게 정리하기에는 이 소설은 너무나 영리하고 나름 복잡하다. 역사적 사건을 풍자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소설 속에서 반란의 주동자이자 실존 인물인 뿌가쵸프를 미워할 수 없게 묘사한 소설의 마지막에는 '~카더라'로 끝내면서 교묘하게 한 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인다. 
(현대 소설에서 이러한 방식을 사용한 몇몇 작품들이 있는데 제목이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에 의해 어느 연대의 중사로 등록된 뻬뜨루샤는 열일곱 살이 되어서 마침내 군 입대를 하기에 이른다. 군복무를 하게 되어 뻬쩨르부르그에서의 화려한 삶과 자유를 상상하면서 기뻐했는데, 그의 희망에 찬 상상은 보기좋게 날아갔다. 아버지는 아들을 제대로 사람 만들어보겠다는 취지에서 오렌부르그로 보내버린다. 하지만 뻬뜨루샤의 낙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아버지의 옛 동료인 안드레이 장군은 오랜 친구의 뜻을 존중해 그의 아들을 끼르기즈 까이사쯔끼 초원에 접경한 외딴 요새인 벨로고르스끄로 배속시킨다. 산 넘어 산이다. 만사 포기한 뻬뜨루샤의 군 입대는 시작부터 좌충우돌이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변곡점을 찍게 될 결정적 인물을 외딴 요새에서 만나게 된다.  



소설의 중반부까지는 상당히 유머러스하고 유쾌하게 진행이 되는데, 등장인물들의 인연이 후반부에 큰 영향을 미친다.  


소설은 1773년부터 2년에 걸쳐 실제로 일어났던 뿌가쵸프의 농민 폭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앞서 썼듯 실제 사건을 소재로 당시 서민들의 피폐한 삶을 에둘러 서술하는데,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개인의 삶이 지향하는 소박한 만족과 행복이다.  


풍자소설에 가까운 작품은 백성의 처지나 군사력을 따져가며 현실적인 대안없이 그럴싸한 말로 포장해 원론적인 내용만 반복하면서 봉쇄령을 고집하는 러시아군 장교들과 제 말이 맞다고 헐뜯기에 바쁜 까즈끄 장수들의 모습에서 당시 사회 지도층을 꼬집고 있다.   


입대와 함께 화려한 삶을 기대했건만 오지로 발령이 나면서 가득했던 불만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진다. 위기와 고난을 이겨내는 동안 뻬뜨루샤가 열망하는 것은 출세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을 데리고 귀향하는 것. 작가는 한편으로는 정부의 폭정과 농민 폭동으로 피폐해진 서민들의 삶을 서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뻬뜨루샤의 깨달음을 통해 역사라는 거대한 굴레 안에서 미미하게만 느껴지는 민중 한 명 한 명의 삶이 갖는 소중함을 얘기한다.   



요새가 함락되고 사령관과 부관은 살해 당했고, 남은 군사들은 무기를 빼앗긴 채 허수아비가 되었다. 뻬뜨루샤는 무엇을 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조국 수호에 기여해야 하는 군인으로서의 의무도 이행해야 하고, 사랑하는 여인도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뻬뜨루샤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이러한 딜레마는 의외로 쉽게 답을 찾는다. 뻬뜨루샤가 화를 면하게 된 것은 오래 전 눈보라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자에게 대단치 않은 호의를 베푼 덕분이었다.


뿌가쵸프는 안다.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유사시에는 아주 쉽게 그의 목에 칼날을 내밀 것이라는 사실을. 어쩌면 우리는 온갖 핑계를 대며 칼자루를 수시로 바꿔쥐는 쉬바브린이나 폭도들과 비슷하게 처세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죽은 고기를 쪼아먹는 까마귀가 아니기를.   


한마디로 작가는 반복되는 상황을 통해서 인생은 새옹지마이자 역지사지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어떻게 삶을 살아야할지를 고찰하게 한다. 



까자끄 인들은 뻬뜨루샤가 첩자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며 모두들 그를 사형해야 한다고 난리다. 그러나 뿌가쵸프는 눈보라가 친 그날, 뻬뜨루샤가 사준 술 한 잔과 추위를 막을 토끼 가죽 외투를 잊지 않고 (그의 입장에서) 선처를 베푼다. 우리가 살면서 필요한 건 이런 마음이 아닐까. 누군가에게 나눈 선의는 잊되, 받은 선의는 잊지 않는 것. 아마도 우리는 이와 반대로 기억하고 행동하기에 많은 부분에서 무언가 억울해 하고 불만이 커져가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마지막, 뿌가쵸프와 뻬뜨루샤의 시선이 마주치고, 뿌가쵸프가 고개를 끄덕이던 그 순간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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