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렐류드 - 찬란한 추억의 정원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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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에 비견할 만큼 단편에 탁월한 캐서린 맨스필드의 단편선집이다.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가든파티>와 미완의 <6년 뒤>를 포함한 열여섯 편이 실려 있다.









아버지를 두려워하지만 한편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 소녀, 부잣집 남자를 기대하며 고급 창부가 된 자신을 상상하는 바이올라, 잘생긴 용모를 가진 남자의 프러포즈를 꿈꾸지만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처한 현실에 파묻힌 기분으로 사는 베럴, 마차를 타고 집을 떠나는 상상을 하는 린다, 고령에도 주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딸의 살림과 육아를 도맡아 하는 페어필드 부인, 어머니를 여의고 낯선 할아버지 집으로 가기 위해 배에 몸을 싣는 어린 페넬레, 죽음을 통해 인생의 기적을 확인한 로라,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신데렐라가 되는 꿈을 꾸지만 눈을 뜨면 녹록치 않은 현실로 돌아오는 모자 가게 점원 로저벨, 일평생 아버지의 권위에 주눅들어 살았던 두 자매  등 각 소설들마다 가부장제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결혼을 통한 경제적 신분 상승 및 화려한 삶에 대한 욕구와 한계를 뛰어넘어 자유를 꿈꾸는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들, 그리고 새로운 삶 앞에서 두려움을 극복하고자(극복해야만) 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딜 피클>에서 6년 만에 우연히 재회한 (한때 연이이었던) 두 남녀가 추억하는 어느 오후의 기억은 전혀 다르다. 그들이 공유한 기억의 파편에 실려 있는 감정도 다르다. 마지막 그 한마디! 기억의 진실 여부를 떠나서 이런 남자, 나도 별로일세... . 당시의 부부 관계와 결혼 생활을 비둘기 암컷과 수컷으로 비유하면서 압축적으로 명쾌하게 보여 준 <비둘기 씨와 비둘기 부인>이 있다면, <레지널드 피콕 씨의 하루>는 권태에 빠진 기혼 남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락가락 하는 마음>에서는 궁핍한 생활과 자괴감에 넌더리가 나 엉뚱한 생각을 하지만, 작은 소동으로 자신감을 얻은 여성이 등장한다. 그러나 잊지 마시라, 현실에서의 강간 위험은 그토록 쉽게 벗어날 수 없음을. 이외에도 일평생 아버지의 그늘에서 살다가 그의 죽음으로 마치 보호자를 잃은 어린애처럼 매사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매 등 우리가 주변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사건과 인물들의 이야기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그동안 <가든파티>를 가장 좋아했던 이유는 읽을 때마다 여러 생각이 복합적으로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연코 표제작 <프렐류드>를 꼽는다. 이 소설에는 여성의 사회적 문제들을 다각적으로 고스란히 담고 있다. 제인 오스틴이나 버지니아 울프가 각각의 작품들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ㅡ가정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전무하고, 가사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임신을 강요 당하고 가정 내 결정권이 없는 등의 문제점들ㅡ를 한 작품에 여러 여성들을 통해 간결하게 녹여냈다. 남편의 실내 슬리퍼보다 우선 순위에서 밀리는 딸들, 허약한 아내의 건강은 염두에 두지 않고 식탁에 미리 마련해둔 태어나지도 않은 아들의 자리,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한 후 행복을 강요하는 가장.  


위에서 언급한 것들이 귀결하는 바는 결국 여성에게 부재한 경제력이다. 오늘날 여성의 경제 활동 비율이 상승했다고는 하지만 전 연령대를 아울렀을 때 남성의 경제 활동에 비하면 현격히 낮은 수준이다. 하물며 19~20세기의 여성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나. 다방면으로 재주가 뛰어남에도 허영과 독립의 욕구를 오가며 타인을 하찮게 여기고 낮잡아 대하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올리려 드는 베럴의 낮은 자존감도 연장선에 있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프렐류드>에서 눈에 들어오는 인물은 페어필드 부인인데, 어쩌면 작가는 가장 나이어린 키지어부터 로티, 이저벨, 베럴, 린다까지 결국 이들이 도달하는 삶의 모습은 페어필드 부인이라고 말하고자 했던 건 아닐까. 물론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여성의 삶을 폄훼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삶이 여성 본인이 원했는지, 그전에 선택의 기회가 있었는지, 그러한 여건이 가능했는지를 따져봐야할 것이다. 어린 딸 키지어에게 알로에가 백 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는 말을 하면서 짓는 린다의 미소의 의미는 무엇이며, 곧 꽃을 피울 것 같은 알로에는 린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 그들이 거울 안에서 발견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이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 소설에서 행복한 사람은 가장 스탠리 뿐이고, 퍽퍽한 그들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유일한 사람은 페어필드 부인이다.



짧게나마 <가든파티>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 내용은 각설하고) 다른 가족들과 달리 로라가 가든파티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조문 바구니를 남은 음식으로 채우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이유는 사망한 가난한 젊은 마부와 그의 가족이 이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나마 셰리던 부인이 마지못해 조문 바구니를 만들자고 한 이유는 그저 불편한 감정을 씻어내기 위해서다. 조시는 조문을 갈 로라의 드레스가 망가질 것을 걱정하고, 셰리던 씨와 아들 로리는 그저 관망할 뿐이다. 하층민의 젊은 마부의 죽음은 이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고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죽은 젊은이의 시신을 본 로라에게 잠을 자듯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 평화롭게 느껴졌다. 그녀는 같은 시각에 한쪽에서 요란한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사이, 다른 한쪽에서는 죽음을 관통해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는 기적이 일어났음에 대해 생각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죽음을 통해 삶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혹은 어떤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가. 후반부에 나타나는 로라의 각성은 읽을 때마다 여러 생각이 들게 한다.



사실 이번 단편선집에 실린 작품들은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이 마음에 들어온다. 내가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 글들은 19세기를 전후한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갈수록 교묘해지는 성폭력의 위험을 비롯해 현재 사회의 모습과 대입해서 읽어도 큰 괴리가 없다. 결코 가벼이 다룰 수 없는 시대성을 간결하면서도 위트있게 담아낸 작가가 단편의 대가라 불릴만한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사족
아주 짧지만 임팩있는 <독일인들과의 식사>. 그 테이블에 앉아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피곤해.




257.
아무리 그렇더라도, 우울에 집착하거나 추억에 매달리려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삶이 더없이 슬프게 느껴진다는 것을 고백할게요.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어요. 질병이나 가난이나 죽음처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슬픔을 뜻하는 게 아니에요. 아니, 이건 달라요. 이것은 우리가 내쉬는 숨결처럼 어딘가 깊은, 아주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요, 아무리 열심히 일해서 몸을 피곤하게 해도 잠깐 움직임을 멈춘 순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것의 존재를 느껴요.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느끼는지 자주 궁금해요. 영영 알 수 없겠죠. 그렇지만 그 달콤하고 명랑한 노랫소리 아래 결국 이런 것이, 슬픔이 존재한다는 게 놀랍지 않나요? 아, 무엇이었을까요, 내가 들은 그것은.
('카나리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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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할 권리 - 우리는 어디쯤에 있는가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문정 옮김 / 효형출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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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그들은 말하지 않을 것이다. 시대는 어두웠다고.
하지만 당신들은 왜 침묵했습니까?
(베르톨트 브레히트)  



쿠오드리베트 웹사이트에 올라온 조르조 아감벤의 글들을 엮은 책으로 이탈리아에서도 출간되지 않은 글들이다. 전작인 <얼굴 없는 인간>을 먼저 읽었어야 하는데, 지금의 담론에 대한 비판을 읽고 싶어서 <저항할 권리>를 우선 펼쳤다.   


책의 시작에서 저자와 역자가 주고받은 서한과 편집자주는 서문을 대신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편집자가, '인류가 모두 레밍이 되어 절벽을 향하고 있'다는 표현은 지난 만 2년 동안 우리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표현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에 관련한 내용은 본문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저자는 팬데믹 사태를 전쟁에 비유하는 각국 정부가 국민의 자유를 강도 높게 제한하는 예외상태를 정당화하고 있는데, 이로써 권력과 전쟁 간의 유대 관계는 더욱 긴밀하고 실질적이 됐음을, 이는 과거 역사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우리가 '정상 상태'에서 추구했던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단순히 이 제재가 삶을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식이라고 믿게 될 것임을 짚는다.  


그는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잠정적 환자가 되고, 마치 종교가 세상을 지배했던 시대의 세례처럼 백신 접종자에게만 정체성이 부여되는 사태를 심각하게 우려한다. 왜냐하면 이 정체성조차 어떠한 결정권 없이, 결정을 강요받고 실행해야하는 의무만 남기 때문이다. 또한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사회적 활동에서 배제해 시민들 간 차별을 조장하는 역할을 하는 것과 동시에 졸지에 감시자 입장으로 만들어버린다.  


얼굴은 인간이 교류하는 모든 것의 바탕으로서 자신을 개방하고 타인을 인식하기에 정치적 요건이 된다. 그런데 모든 장소에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림으로써 국가는 자발적으로 모든 정치적 차원을 지워버렸다고 얘기하는 저자. 이는 정치적 동물인 인간의 생명 상실을 의미하고, 죽음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님을 짚는다(지난 2년 동안 코로나 사망자와 유가족들에게는 애도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음을 떠올려 보라). 얼굴을 지우고 죽은 자들을 흔적없이 제거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조장하는 것은 독재에 가까운 통치체제를 위한 필수 장치다. 모든 것을 지우고 접촉도 없는 사회는 그야말로 유령 사회일 뿐임을, 또한 민주주의 퇴보를 넘어 야만적 행위임을, 저자는 일갈한다.  


저자는 이탈리아에서 도입된 [그린 패스(우리나라의 접종 확인증과 같다)]가 시민들의 이동에 대한 세밀하고 무제한적 통제라고 비판하는데, 나는 우리나라의 접종 확인증보다 한때 확진자 동선을 공개했던 일이 떠올랐다. 지금은 개인 정보 노출과 인권에 반한다는 항의로 사라졌지만, 개인 사찰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시민의 자유를 크게 훼손한다는 점에서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생각해보면 정부가 작정하면 얼마든지 국민을 감시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어서 씁쓸하기 이를 데 없었다.   


2021년 10월, 조르조 아감벤이 이탈리아 상원 헌법위원회에서 그린 패스와 관련해 연설한 내용을 보면 백신 미접종자에 대한 차별은 팬데믹 자체보다 더 비정상적임을 지적하면서 그에 대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어도 책임을 공식적으로 부인하는 정부를 비판한다(대부분 모든 국가들의 공통적으로 해당된다). 이 연설의 핵심은 백신의 '의학적' 문제가 아닌 그린 패스의 '정치적' 문제에 대한 언급이다. 접종자와 미접종자를 구분한 새로운 시민 계급의 형성 및 시민의 이동 제한과 동선 추적을 통해 통제 사회로의 진입에 대한 우려를 강하게 얘기한다. 


다양한 의견의 제시 및 수렴, 극단적 이견이 마주할 수 없는 사회야말로 전체주의에 근접한다. 정부 체제에 저항하는, 혹은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을 배제함으로써 우리도 모르는 사이 유사 전체주의의 길로 들어서는 건 아닌지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반론을 제기할 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반론에 대한 명분 중 대부분은 아마도 공공의 이익과 다수자 보호에 있지 않을까 싶다(저자가 말한 보건 공포). 저자의 의견에 대체로 동의 공감하는 나조차도 한두 가지 쯤은 고민이 된다. 그럼에도 이 책을 권하고 싶은 이유는 종식에 가까운 팬데믹에 대한 반추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권력자들에 의해 언제든지, 얼마든지 정치적 프레임을 통해 법질서의 기본 원칙이 무너지고,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할 수 있음을 각성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탁월한 명령 수행자로 전락하게 될지의 여부는 우리에게 달렸다. 이 책을 팬데믹 시대에 국한해서 읽지 않기를 바란다.    




사족. 
1. 저자가 발췌한, 시몬 베유가 1940년에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독재에 대해 쓴 글은 팬데믹 시대를 맞은 우리의 모습과 놀랍도록 아주 흡사하다.
2. 책의 마지막에 교사 알렉산드로 라 포르테차가 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글이 인상적이다. 그린 패스의 차별을 받아들인다면 종교, 민족, 피부색, 성적 취향 역시 차별의 도구가 될 것이기에, 그렇다면 선생으로서 학생들에게 가르칠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된다는 그의 말이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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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티샤 콜롱바니 저자, 임미경 역자 / 밝은세상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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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어디에도 피난처가 없다면 자신이 바로 피난처이자 쉼터가 되어야 한다. 



연인의 죽음으로 상실감과 고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레나는 즉흥적으로 인도로 향하고 그곳에서 파도에 휩쓸려 죽을 뻔한 그녀를 구해준 열 살 소녀 랄리타와 불가촉민 여성 자경단 '레드 브리게이드' 단원들과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초목과 꽃에 손이 닿으면 식물이 시들어버린다는 불가촉민. 그들과 접촉한 행위만으로도 온갖 모욕과 배척과 폭력을 감수해야 하고, 신분 계급 사회에서 인간계에 속하지 않는 그들에게 있어(특히 여성) 운명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요 저주다. 불가촉민 여성 을 대상으로 하는 성폭행은 장소와 나이, 일가 친척부터 길거리의 행인까지 가해자의 신분을 불문한다. 오죽하면 레드 브리게이드 단장 프리티는 달리트 여성 강간을 국민스포츠와 다름 없다고 말할까. 


달리트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종하고 이름을 바꾸기도 하지만 구습과 전통은 버리지 못하는 불가촉민 계급. 딸이 강간을 당해도 부모는 분노하기는 커녕 가해자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한다. 경찰, 정부, 가정, 그 어디에서도 보호받을 수 없는 수천 명의 여자아이들은 집을 나와 매음 조직에 납치되어 평생 매를 맞으며 성노예의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강요된 조혼으로 매매되는 물품 취급을 받으며 어느 집 가장의 소유물이 될 뿐이다. 달리트 마을의 여성은 나이와 관계없이 전투적인 삶을 살아간다. 


레나는 자나키의 조혼을 통해 달리트 마을에서 교육을 하기 위해 넘어야 할 장애물은 빈곤이 아니라 오랜 관습과 전통임을 깨닫는다. 레나는 자신이 랄리타의 삶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줬다고 믿었지만, 랄리타의 자리를 대신한 다른 아이(소년 다부)의 삶을 희생시킨 꼴이었다. 사슬처럼 이어진 고통의 고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인류 문명과 불교의 발상지이자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에 대한 인권 말살과 폭력을 자행하는 인도의 두 얼굴. 과연 이 두 얼굴이 인도만의 얘기겠나. 


ㅡ 


레나가 랄리타에게 남다른 감정을 갖고 책임감을 느끼며 도움을 주려고 하는 이유가 오직 연민 때문일까. 랄리타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은 단순한 연민에서라기보다 레나 자신이 살아가야할 이유가 되어주었을 것이고, 나아가 교사로서의 열정을 다시 지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마하발리푸람 마을의 학교 설립은 레나에게 있어 생존을 위한 절박하고 유일한 길이었을 터다. 


무엇보다 레나, 랄리타, 프리티는 서로 공통된 아픔이 있다. 동일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며 평생을 함께 할 줄 알았던 연인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으로 삶의 의지를 놓아버린 레나, 엄마를 잃고 인도 북부에 있는 아빠에게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바람인 랄리타, 강요된 조혼 후 1년 뒤 출산 도중 언니가 사망한 충격과 슬픔을 안고 사는 프리티. 사실은 그들 뿐만 아니라 불가촉민 여성들, 더 나아가 인도 대부분의 여성들은 상실감을 안고 산다. 강요된 자아 상실을. 


레나와 프리티와 랄리타가 이룬 새로운 가족의 형태. 우리는 혈연이 아니더라도 서로에 대한 측은지심과 공감과 이해로 가족이 될 수 있음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이를 실현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적지 않다. 제도적인 부분을 비롯해 많은 문제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그들을 바라보는 여전한 '낯선 시선'이 아닐런지. 


레나의 도전을 희망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까닭은 랄리타와 프리티를 비롯한 수많은 '그녀'들이 레나와 함께 걸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제 그들과 발맞춰 걸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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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바디 - 모든 몸의 자유를 향한 투쟁과 실패의 연대기
올리비아 랭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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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 거대한 기만이 숨겨져 있다."
(빌헬름 라이히)



이 책은 올리비아 랭이 프로이트의 가장 뛰어난 제자였고 전 생애를 몸과 자유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바친 분석가이자 사상가 빌헬름 라이히를 안내자로 삼아 20세기를 관통하면서 같은 세기를 살아온 사상가, 활동가, 예술가들의 삶을 통해 우리의 몸을 이해하고 고찰한다.   


라이히의 삶에서 올리비아 랭을 매료시킨 점은 그가 질병과 성, 저항과 감옥 등 몸의 여러 다른 측면들을 한데 끌어모으는 연결자 역할을 한 방식이었다. 자유가 의미하는 것, 자유의 보호나 축소에서 국가의 역할, 몸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혹은 부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자유 획득의 가능성 등에 대한 논제는 보이지 않는 통제와 처벌의 시스템을 폭로함과 동시에 대중이 각성하는 역할을 한다. 








 
라이히가 빈에서 치료하는 환자들 중에는 노동계급이 많았는데, 그들의 사연을 통해 정신적 불안은 어린 시절에 겪은 결과만이 아니라 가난과 열악한 주거 환경, 가정폭력, 실업 등 사회적 요소들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이히의 연구 주제는 '몸을 수치감의 대상물이 아니라 변화를 요구하고 달성할 수 있게 할 연대감과 힘의 연원으로 바꾸고 싶다는 욕구'였다. '성 정치학', '성 혁명'이라는 용어를 만든 빌헬름 라이히. 페미니스트 앤드리아 드워킨에 따르면, 그는 '성 해방론자 가운데 강간을 진심으로 혐오한 유일한 남성'이었다.   


스승인 프로이트가 인간의 정신에 촛점을 맞췄다면 제자인 라이히의 관심은 인간의 정신과 기억을 담는 몸이었다. 성에 있어서 급진적인 견해를 구축한 프로이트도 동성애 욕구를 미성숙과 일탈이라는 기준에서 보았다. 라이히는 인간이 좌절하고, 수치를 느끼고, 욕망을 부정적으로 주입받고 억제 당하며, 자유롭고 안전한 표현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미성숙한 상태로 계속 살아갈 것이라고 보았으며, 그에 반해 성적으로 만족한 인간은 불안에서 해방된다고 정의했다. 그는 의무가 아닌 욕망의 성적 접촉을 통해 인간이 편안해지기를 바랐다.  


라이히가 진정 하고 싶었던 것은 '원인'을 다루는 것이었다. 당시 정신치료의 문제점은 정신 질환과 사회 및 정치에서 파생하는 사회적 문제를 별개로 놓았는데, 라이히는 성이 사회를 개조하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 라이히는 피임 도구와 피임 안내 팸플릿을 나눠주고, 무료 클리닉을 개설하고 성교육을 제공하며, 낙태할 권리를 포함한 여성해방운동 캠페인을 벌였다. 


ㅡ 


1970년대에 여성해방은 (가정)폭력과 학대, 강간, 원치 않은 임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강간 혹은 이를 동반한 살인 사건이 벌어지면 언론은 해당 지역 강간 통계 자료 등 객관적이고 실질적인 보도를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를 두고 음란한 서술들을 이어나간다. 이는 비단 1970년대 뿐만이 아니다. 현재에도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불필요한 피해자의 과거 사생활까지 예사로 들춰내고 있지 않나. 더욱이 개인 방송까지 보편화된 지금에는 그 정도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특히 가정(데이트) 폭력은 지극히 사적이고 고립된다는 점에서 위험도가 더 높다.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피해를 호소해도 개인적이라는 이유로 나서기를 꺼린다. 피해자들이 가장 크게 공포를 느끼는 까닭은 자신이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폭력 이후 진정한 참상은 몸 속에, 그리고 정신에 여전히 남아있는 피해의 흔적이다. 


올리비아 랭은 자유liberty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엇나간 의미들에 대해 해부하면서 마음대로 행동할 자유는 행동의 대상이 된 몸들에게 지옥이 될 수 있음을, 지금까지 벌어졌던 성폭력 사건과 사드 후작을 데려와 엄중히 경고한다. 절대적 자유는 에덴보다 폭력과 학대의 수용소와 더 가깝다고. 성이 상품화된 현재의 세태는, 자연적인 성적 특질이 온화할 것이라고 믿었던 라이히가 무덤에서 뛰쳐나올 일일지도 모르겠다. 


ㅡ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이 정치와 무관하다고 주장했고, 라이히는 정치성을 요구한다고 믿었다. 라이히가 개업 초기에 만난 환자들은 정신분석학이 다룰 수 없는 사회적.경제적 문제로 고통받는 약자들이었다. 


1950년대에 시행된 마녀사냥은 실질적으로 역사에 남은 기록보다 훨씬 많다. 동성애란 선천적으로 전복적이며 부도덕하고 개인주의자라는 믿음 아래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명분으로 억압 당했다. 동성애혐오증은 각 분야에 침투했고, 그들을 정신질환자 및 범죄자로 몰아갔다. 편견은 오히려 법에 의해 보호되었고 젠더의 전형성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비폭력 평화주의자 베이어드 러스틴의 정신과 신념어린 활동이 그가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인정받지 않는 것처럼 정치는 이를 적극적으로 악용하는데(이와 유사한 사례는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이로써 라이히의 '성은 정치적이다'라는 주장이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저자는 흑인해방운동가 맬컴 엑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을 거부한 양심적 병역거부자이자 비폭력 평화주의자 베이어드 러스틴 등 인종주의자들로 인해 몸이 감옥이 된 사람들 통해 우리가 억압에 저항해야 하는 이유를 얘기한다. 또한 라이히의 저작과 그가 쓴 대부분의 글을 국가적 차원에서 허가해 소각한 점, 페미니즘 행위예술가였던 멘디에타의 죽음 뒤에 숨겨진 진실이 무엇이든 인종주의와 성차별에 대한 혐오와 폭력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종주의에서 시작된 혐오와 증오 폭력은 몸뚱이를 부풀려 여성, 동성애, 빈민, 난민, 장애까지 이어져 반복적으로 되풀이된다.   



이 책에서 언급된 케이트 밀렛, 앤드리아 드워킨, 앤절라 카터, 애그니스 마틴 등은 라이히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거나 혹은 유사점이 있다. 올리비아 랭을 비롯해 그에 의해 발언되고 있는 인물(카터, 드워킨 등)들의 말이 폐부를 찌르듯 콕콕 박힌다. 작가가 서문의 마지막에서 '자유로운 몸'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며 촉구하는 문장에서 지칭하는 '그'는 비단 빌헬름 라이히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수많은 이들을 지칭한다고 생각한다.    


올리비아 랭은 지난 20세기가 페미니즘에서 게이 해방으로, 민권운동으로, 몸에 기초한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권리를 얻으려는 투쟁이었다고 진단한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원하는 곳에서 일하고 살며, 폭력이나 죽음의 위험 없이 안전하게 일상을 유지하고, 자신의 몸을 방해받지 않고 손상되지 않은 채 자유를 얻기까지 엄청난 희생을 치렀으나 현 상태가 영구히 보장되지 않는다. 일부분은 이미 사라져 과거로 회기가 진행 중이다.  


애커와 손택의 투병에 대한 내용을 읽으면서 '보편적 의료보험이 시행되지 않는 한 생존은 각 개인의 삶의 의지가 아니라 지불 능력에 달려 있다'라는 말에 공감했다. 오바마가 바꾸어 놓은 의료 시스템을 트럼프가 되돌렸다. 지금 우리 정부가 시도하고 있는 일련의 변화 역시 많은 부분에서 우려가 된다.


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전투적으로 살아왔던 한 사람의 사상과 노력이 모두에게 공감받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빌헬름 라이히의 생애 이력 이전에 그가 한평생 추구했던 성이 갖는 정치성과 이를 악용하는 프레임, 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폭력, 성을 초월한 인류애와 자유를 이해해야할 것이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이 책의 인물들을 따라갈 때마다 가슴께를 누르는 듯한 무거움이 없지 않았다. 이 무게가 점점 가벼워지기를 바람하며 '에브리_바디'의 자유를 응원한다.




421.
우리의 과거는 우리와 함께 남아 있고, 우리 몸에 자리 잡고 있으며, 우리는 싫건 좋건 간에 대상 세계 속에서 다른 인간 수십억 명과 함께 현실의 자원을 공유하면서 살아간다. 각각의 사적인 몸에 허용된 행동이나 존재 양식에 구체적이고 고통스럽게 제약을 가하는 힘들의 그리드로부터 당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강철 상자는 없다. 도피는 없고숨을 수 있는 장소도 없다. 세계에 복종하거나 세계를 바꿔라. 내게 그 사실을 가르친 것이 라이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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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부수는 말 - 왜곡되고 둔갑되는 권력의 언어를 해체하기
이라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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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아름다움은 고통을 통해 우리 몸속에 들어온다." 

(시몬 베유) 
 



노동, 시간, 노화, 몸, 여성, 장애, 세대, 인권, 퀴어, 혐오, (여성)노동, 동물, 지방, 권력, 지구, 공존 등 다각적인 방면에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왜곡된 언어와 권력자들이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둔갑된 권력 언어들에 대해 면밀하게 해체하며 이 언어들이 어떻게 사회에 작용하는지 신랄하게 비판한다.  






 




지극히 사적인 육체의 고통에 대해 '창작을 출산에 빗대 은유하는 것이 정당한가'를 시작으로 우리의 고통이 정치 및 사회와 무관하지 않음과 여성에게 무언으로 강요하는 출산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와 성착취 및 성폭력에 대해 짚는다. 이 지점에서 정치는 차별과 혐오, 여성의 '몸'을 악용하며 성소수자를 포함한 성의 대립을 의도적으로 조성한다. 이는 선거철만 되면 여실히 드러난다. 인권 이전에 성으로 분리시켜 그 프레임 안에서 평등하다는 속임수를 교묘하게 이용한다.  


특히 20대 남성이 주목해야할 점은 여성이 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걸핏하면 혐오와 젠더 갈등을 들먹이며 (성소수자를 포함한) 성차별을 은폐하면서 동시에 정치적 제물로 던져진 '여성'을 적대시하고 대립과 갈등을 반복하도록 이를 조장하는 자들에 맞춰 춤을 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들에게 시급한 사회적 문제, 즉 높은 학비, 거주 불안, 저임금 일자리 등을 '함께' 연대해 해결 방안을 촉구해야 한다. (이렇게 써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는데, 나 스스로 고개를 갸우뚱 하는 중이다. 연대 이전에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중략) 


ㅡ 


현재 우리 사회에서 소수 엘리트 특권 의식은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고 있다. 학령기에 접어든 순간부터 대학 입시는 시작되고, 더 나은 학벌을 얻기 위해 반수와 재수는 필수라는 우스갯말까지 생겨났다. 노동환경의 많은 문제점은 사회적 의제가 되기보다는 개인의 능력 여부에 촛점이 맞춰져 노동은 왜곡되었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위계 인식은 점점 더 강화되어 사회학적 상식에 반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으며, (육체)노동은 공부(엄밀히 말하면 성적)를 못한 데에 대한 죗값처럼 여겨지는 게 현실이다. 


우리가 수시로 접하는, 노동 현장에서 발생하는 참혹한 사건 사고들이 여전한 까닭은 공부의 위계에 대한 의구심을 갖지 않기 때문일 터다. 저자의 말처럼 이 의구심을 확대하고 고민하지 않는다면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안고 있는 고통의 언어를 듣지 못할 것이다. 이 고통의 언어에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노동은 어떤 형태로든 생존을 위한 행위다. 노동 해방에 관해 말하기보다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 먼저이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며 최선을 다해 안전한 노동으로 만들 것인가를 논의해야 한다는 작가의 지적에 적극 동의한다. 


ㅡ 


계층 간의 시간 권력 차이는 더욱 심회되었다. 특히 시간에 쫓기고 종속당하는  플랫폼 노동 환경에서의 인간은 고립된 채 데이터만 연결되어 있다. 즉 기업 입장에서 플랫폼 노동은 노동자들의 소통과 연대를 막을 수 있는 최적의 형태다. 신호위반과 과속을 일삼는 라이더를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은 플랫폼 노동자들이 배달 속도와 음식이 아니라 편파적이고 기만적인 구조다. 배달 성공률과 고객 만족도를 저장하는 데이터에 그들의 상처와 고통은 기록되지 않는다. 시간이 갖는 불평등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각종 앱에서 제공하는 소요 시간의 기준에 장애인, 소아(를 동반한 성인), 노인은 해당하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간과했던 나 자신에게 놀라는 중이다. 


또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시간의 주체는 남성이다. 나이가 들고 연륜을 쌓은 '어른'의 위치는 대부분 남성이 차지하고 여성의 시간은 무시 당하기 일쑤다. 그렇지 않아도 여성의 취약한 경제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고, 그들에게 '은퇴'란 단어는 해당되지 않는다. 평균 수명은 여성이 더 길지만, 그 긴 노년의 삶을 여성이 더 가난하게 살아간다는 저자의 글이 서글퍼진다. 


ㅡ 


타인의 고통에 공감이 없는 공정은 억울함이 사회적 의제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직 '나', 개인의 억울함에 대한 집착으로 향하게 한다. 억울함을 투쟁으로 전화시키는 사람들은 '나'가 아닌 '우리'의 억울함을 위해 싸운다. 이에 관련한 몇 개의 장章을 읽으면서 점점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부모의 학력과 자본이 그대로 세습되어 한쪽에서는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특혜를 누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기본적인 안전과 인권도 보장받지 못한 채 실습 현장으로 나간다. 한여름 폭염에 에어컨 없는 휴게실에서 숨진 대학교 청소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죽음에 책정되는 목숨값, 21세기 OECD 가입국인 한국에서 소외와 빈곤으로 아사한 모자 등 불법이 아닌 합법적인 불평등이 개인의 도태라고 치부하는 우리 사회는 도대체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오늘날 청년 세대에서 불공평에 대한 분노가 불공정에 대한 분노보다 상대적으로 작다. 저자가 <한국의 능력주의>에서 발췌한, 한국인들은 특권의 불평등에 분노하는 게 아니라 '특권에 접근할 기회의 불평등에 본노'한다는, 그래서 '공정 세대'라는 개념은 특정 계층의 억울함을 특정 세대의 분노로 둔갑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백인, 남성, 대졸자, 이성애자가 주류인 사회적 구조에서 '세대', '인권', '보편적 권리' 는 동등하고 공정한 언어로 사용되고 있을까. 공정이라는 담론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있었는지 돌이켜볼 일이다.  


ㅡ 


이 책은 권력자의 입장에 맞춰 둔갑하고 왜곡되어지는 정치 언어가 남발하는 작금에, 이에 대한 정확한 인지가 부재할 경우 대중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로인해 발생하는 오류와 그릇된 판단을 면밀하게 짚어간다. '선택의 자유'를 명분으로 노동착취를 기득권층의 손에 쥐어주겠다는 정치인의 호언장담, 상호소통의 의지가 없는 지도자, 과도한 자기 신념의 환상에 빠진 권력자 등 그들의 발언은 곧장 정치가 되고, 이 언어가 힘을 얻으면 민주주의는 위협받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자유'라는 사실에 헛웃음이 난다. 권력자의 언어는 설명이나 설득이 아닌 지배의 언어다. 재난과 타인의 고통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권력자들의 망언은 세대를 잇는 증언으로 잠재워야 한다.   


저자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많은 언어들은 '보이는 것'이 곧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만들어졌다고 얘기한다. 나 역시 무심코 쓴 언어들이 의도치 않게 타자를 비하하는 셈이 된 경우가 있었다. 우리 스스로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꾸준히 개선해 나가야함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한국은 우주로 로켓을 쏘아올리는 지구상의 몇 안 되는 국가임에도 장애인은 아직도 이동권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물리학자이며 환경운동가인 반다나 시바는 인간이 두 개의 법에 복종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인권에 관한 법과 지구의 법이다. 우리가 이 두 가지만 온전히 추구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래서 더 이상 이러한 책들을 읽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람한다. 




287.
타자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을 표출할 수 있다는 게 권력이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각이 없고,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앎을 적극적으로 모르려고 하고, 모르지만 판단할 수 있다는 확신이 모이면 바로 죄의식 없이 폭력을 저지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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