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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제1차 세계대전 - 유럽의 종말과 새로운 세계의 탄생 ㅣ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세계대전 1
A. J. P. 테일러 지음, 유영수 옮김 / 페이퍼로드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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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의 주민들은 남슬라브족으로 세르비아인이나 크로아티아인이었는데, 많은 이들이 세르비아와의 합병 대신 합스부르크가(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데 대해 분개했다. 민족주의 청년들은 암살 음모를 꾸미고 1914년 6월 28일, 육군 검열을 하기 위해 사라예보에서 행진을 하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를 암살했다. 이 사건은 앞으로 벌어질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됐다.
당시 국제 정세는, 독일과 영국은 우호적인 관계였고 독일의 실업가들은 경제만으로도 유럽의 강대국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전쟁을 원치 않았다. 더구나 영국과 프랑스의 사람들은 독일보다는 러시아를 더 염려했다. 전반적인 상황은 독일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즉 의도적으로 전쟁을 도발하겠다고 결정할만한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강대국이지만 쇠퇴를 시작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이를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이전부터 세르비아를 다루는 데 어려움을 겼었던 제국의 통치자들은 이를 빌미로 삼았다. 거기에 독일이 러시아가 개입할 경우 오스트리아의 뒷배가 되주겠다고 약속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 정부가 사라예보 사건에 관련있다는 증거를 찾으려 했으나 실패하자, 오스트리아는 굴욕을 주겠다는 의도로 세르비아와 관계를 단절하고 전쟁을 선포했지만 어디까지나 외교적 술책이었다. 여기에 러시아가 현실적인 안보와 교역, 생존의 문제를 들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강력한 위협으로 대응했다. 실제로 전쟁의 의사는 없었음에도 자국의 위신 지키기와 오해로 동원까지 들먹이며 서로에게 위협만했던 러시아와 독일. 결국 동원과 전쟁을 하나로 묶어 실행하는 독일이 동원을 진행한 러시아에게 최후통첩을 보냈고, 이를 러시아가 거부하자 8월 1일, 독일은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틀 뒤에는 프랑스에까지 전쟁을 선포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전쟁이 시작됐다.
독일은 프랑스로 가기 위해 벨기에 정부에 통과를 요구했고, 벨기에가 이를 거부하자 영국도 끌어들여졌다. 영국은 '약소국 벨기'의 중립과 독립이라는 명분과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전쟁'이라는 이상으로 참전했다. 영국은 독일에 전쟁을 선포한 유일한 연합국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혼란을 야기시킨 장본인인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독일에 떠밀려서 마지못해 8월6일이 되어서야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한다. 그러나 세르비아를 침공하고 두 달 여만에 밀려났고, 오히려 세르비아가 남부 헝가리에 쳐들어왔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마지못해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관계를 끊었다.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만장일치로 전쟁에 찬성했고, 백만 단위의 병력을 동원했으며, 그들 모두가 이 전쟁이 침략이 아닌 자신의 존재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규모 군대의 식량 보급은 중요하지만 쉽지 않다. 현지에서 해결하기에도, 본국에서 보급을 받기에도 어렵다. 승리를 구축하기 위해 조직된 대규모 군대가 그 거대한 규모로 인해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게 된 것이다. 이후로 전쟁은 교착상태로 4년간 이어진다.
신속하게 속도전으로 끝날 거라 예상했던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 이어졌다. 대체로의 국가들이 아무 준비도 없이 시작했고 물자 부족을 겪고 있으며 총포와 포탄은 무한정 필요했다. 이러한 이유로 산업과 경제 시스템에 변화가 왔고, 복지와 생활 유지와 매점매석, 부정 축재, 난민 발생 등 사회적 문제가 야기했다. 이와같은 혼란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대한 대체적인 열정은 여전히 존재했다. 전쟁 전에 있었던 파업, 여성참정권 집회 운동, 민족 분쟁 등이 사라졌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각 국가는 자국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무도 전쟁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의심하지 않았고 독일인들은 이기기 위해, 연합국은 지지 않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의 분명한 목표가 없었다. 이 전쟁의 시작으로 국제관계의 양상이 바뀌었는데,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진정한 적이 되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무기들이 개발된다. 독가스를 만들어냈고 항공기 수준도 정찰기에서 전투기로, 생산량도 늘어났다. 특히 독일의 유보트(잠수함)은 전함의 보조적인 역할에서 강력한 공격성을 갖추게 되었다. 영국의 루시타니아호를 침몰시킨 것이, 미국이 연합국 편으로 참전하게 하는 최고의 프로파간다가 된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그 자체로 전쟁 목적을 만들어냈다는 점이 확인되고 있었다.
전쟁은 대규모 산업이 되었다. 총포와 포탄의 생산량은 상상 못할 정도였고, 해양 전투가 수상에서 잠수로 전환되면서 잠수함 건조 체제로 바뀌었다. 영국은 1916년 5월에 병역을 의무화하면서 산업 현장의 노동력에 구멍이 생기자 물가와 환율의 안정이 깨졌다. 정부의 화폐 발행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식량 가격은 상승했다. 독일은 굶주림을 피해 군대에 복무했고, 농민들은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가축을 시장에 내다팔면서 물자가 부족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를 제외하면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정부에 협조했고, 노동자들은 임금이 올라 조용했다.
전쟁은 어느쪽에게도 낙관적이지 않았다. 각국의 정부도 국내적인 위협을 느끼지 않았고, 위협을 느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독일의 통제에 묶여 있어 독자적인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정치가들은 약속했던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 못할 경우 자신들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것만을 염려했다. 1916년, 독일과 연합국에서 각각 강화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독일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의해, 연합국은 전쟁 승리를 염원하는 영국에 의해 진척이 어려웠다. 그들은 각자 강한 자신감을 내보이며 승리를 확신했다. 독일과 연합국(사실상 영국)은 안보를 강화해 또다른 전쟁이 없게 하자는 동일한 목적으로 싸웠다. 그런데 오로지 승리만이 확실한 안보를 보장한다고 여겼고, 또 다른 전쟁의 가능성을 확실하게 제거하기 위해, 그들은 계속해서 전쟁을 수행했다.
1917년을 기점으로 이전 유럽의 역사는 종료되었다. 이제부터는 세계사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 중심에는 윌슨과 레닌이 있었다.
1월 31일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즉각적으로 개시한다고 발표했고, 2월 2일 윌슨 대통령은 독일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응답하듯 독일 잠수함들이 바로 미국 선박들을 침몰시키면서 4월 6일 미국은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자국의 안보가 위험에 처한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미국은 오로지 도덕적인 입장으로 전쟁에 임할 수 밖에 없었다. 구리, 면화, 밀 등 대서양 건너로 대량 공급되었고, 공장들은 영국과 프랑스의 주문량을 소화하기 위해 연장 가동을 했다. 경제가 활황을 맞았고, 미국은 번영을 지속하고 부유한 미국인들을 더욱 부유해지도록 하기 위해 전쟁에 참전했다. 미국에게는 육군도, 군수 공장도, 전자도, 항공기도 없었지만, 연합국에 엄청난 규모의 신용 공제를 해줄 수 있었다.
여름이 되자 강화 논의가 재등장했지만 서로가 전리품이 없는 강화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을 입이 아닌 몸으로 감수해야하는 아래 계층 사람들은 승리가 꼭 필요한지에 대한 물음표를 찍기 시작했다. 혹독한 겨울과 경제적 상황은 불만을 야기시켰다. 파업과 수병들의 시위 등 독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러시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쟁을 통해 돈을 벌고 있는 상류층 사람들은 전쟁이 계속 되기를 원했고, 보통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기를 바랐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왕조가 종말을 맞았다. 소비에트라 이름 붙은 노동자 군인 대표자 회의로 실권이 넘어갔다. 이 기구에 의해 자유주의 정치인들로 구성된 임시 정부가 세워졌다. 그런데 4월 16일, 망명 중이던 레닌이 돌아왔다. 뒤이어 그의 동지이자 뛰어난 웅변가인 트로츠키 역시 미국에서 귀국했다. 그들은 참전을 반대했다.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해 정부가 볼셰비키의 수중에 들어갔다. 의장이 된 레닌은 사회주의 건설을 선언했으며 전쟁의 휴전을 제안하며 소비에트 의회에서 평화령을 낭독했다. 이에 독일은 휴전에 합의할 의향이 있었던 반면 오히려 서유럽은 당황스러워했다. 최고전쟁위원회가 11월 29일에 열렸고 영국은 최종적으로 볼셰비키의 제안에 분명하게 거절했다. 연합국이 전면 휴전 제안을 거절하자 볼셰비키들은 단독 강화 협상을 진행했다. 12월 15일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 휴전이 조인되었고, 브레스트 리토프스크에서 강화 협상이 이루어졌다. 이제 러시아는 전쟁에서 떨어져나갔다. 독일과 영국을 포함한 유럽은 볼셰비키가 몰고 올 파장까지 걱정해야할 지경이 되었다.
1918년 3월, 독일은 연합국의 봉쇄로 식량과 산업 원자재가 심각하게 부족했고, 미국군이 점점 더 많이 프랑스로 오고 있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삐걱대고 있었다. 시간은 독일인들 편에 있지 않았다. 독일의 루덴도르프는 강화를 통한 종전은 정치적 파멸을 불러올 수 있었기에 전쟁에서 승리해야 했다. 독일에게는 전차도, 보병을 수송할 기계화된 수단도 없었다. 그렇다고 병력에서 수적인 우위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독일은 5월 내내 병력을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6월 3일까지 마른 강에 도달했지만 프랑스 방어선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더하여 스페인 인플루엔자 전염병이 육군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강타해 많은 사람이 죽고 민간인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독일은 전투에서 계속되는 성공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잡지 못했다. 8월에 영국의 공격으로 시작한 전투는 9월까지 이어졌고, 독일의 방어선이 뚫린 곳은 없었지만 후퇴한 독일군의 사기는 떨어졌고,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 9월, 독일의 루덴도르프가 휴전을 주장했다.
10월 20일 군사적 휴전에 대한 윌슨의 조건이 받아들여졌다. 독일은 윌슨의 조건을 수용함으로써 전쟁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속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폴란드에 영토를 내주어야 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여전히 '적'으로 대우받을 것이라는 발상은 더더욱 떠올리지 못했다. 여태까지 가장 적은 짐을 지고 가장 조금 싸웠던 미국이 연합국과 적국 모두에 강화의 조건을 부과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내심 바라는 것이 있었지만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이상만 남았을 뿐이었다.
휴전 혹은 종전 선언이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투가 계속이어지고 있는 와중에 미국 내 윌슨의 입지가 무너졌고, 독일 또한 오스만제국, 합스부르크제국 등 동맹국들이 무너지면서 마찬가지 입장에 처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서는 체코슬라바키아와 헝가리가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면서 체코인, 남슬라브인, 폴라드인, 루마니아인들은 연합국에 들어갔다. 독일 내부에서도 혁명이 확산되고 있었다. 독일은 이제 패배가 문제가 아니라 혁명을 막기 위해서 전쟁을 끝내야만 했다. 11월 11일,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다.
1919년 1월 18일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다. 전승국들은 각자 전쟁 동안 쌓인 원한에 대한 보상을 통해 자기 나라의 이익을 챙기기를 바랐다. 안보, 배상, 정의까지 모든 것이 얽혀있었고, 각 국가들은 원하는 형태로 보상을 받고자 했다. 독일은 독일 황제가 제거되고 전투가 종료되면 독일이 평화를 사랑하는 민주적인 국가로 받아들여지리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독일은 안보 문제에 있어서 무장해제되었으나 파리강화회의에서 해결한 독일의 국경은 사실상 독일에게 유리했다. 합스부르크제국이 사라진 후 독일계 오스트리아인들은 독일에 편입되기를 원했지만, 프랑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금지 조항이 조약에 명문화 되었고, 창설을 앞둔 국제 연맹의 동의가 있어야만 병합이 가능했다. 다만 독일은 한 명의 오스트리아인을 얻었는데, 그가 아돌프 히틀러다.
1919년 6월 18일, 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인류에 남긴 것은 무엇일까?
일단 전대미문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물질적인 파괴가 있었지만 오히려 전쟁으로 인한 새로운 산업이 탄생하면서 대부분의 나라들이 1923년 부터는 전쟁 전의 생산량을 넘어섰다. 경제적 자원이 너무 많이 촉진되어 과잉생산이 인류의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 유럽의 생활 수준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높았다. 사실상 전쟁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입은 대상은 인간의 마음이었다.
유럽에는 사유 재산과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되었고, 왕국보다 공화국이 많아졌으며 제국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전승국은 전쟁을 해결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독일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합스부르크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신민들이 민족적 자유를 얻었고, 벨기에가 해방되었으며, 독일의 유럽 지배를 늦추었다. 저자는 제1차 세계대전은 치른 대가는 분명히 과도했지만 오히려 대부분의 전쟁보다 결과가 좋았다고 평한다.
흥미로웠던 몇 가지 사실 중 하나는 전쟁 중 독일의 경제 시스템을 관장해 독일이 전쟁을 수행하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유대계 자본가인 발터 라테나우라는 점이다. 수십 년 후 독일계 아리아인들이 유대민족을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보면, 인간사 참 알 수 없는 일이지싶다.
다른 하나는 터키(오스만 제국)의 합리적이지 못한 참전이었다. 독일 편으로 참전한 터키는 이 전쟁에서 얻을 것이 없었다. 전쟁에 참여해야할만큼 절박한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작해야 지난 한 세기 동안 러시아와 영국이 번갈아 윗사람 노릇을 하는데 진절머리가 났다는 게 그 이유였다. 터키는 한겨울에 보급도 없이 수행된 전투에 10만 병력을 코카서스로 보냈고, 그중 7만 명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군인 조프르, 전쟁에서 무능력한 리더를 만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지의 새삼 깨달았다. 그런데 이 부분은 물리적인 파괴가 있는 전쟁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듯 싶다.
상처 뿐인 승리.
확실한 명분도 없이 시작했고, 허울 뿐인 승리만 남았으며, 그나마 자치국으로 독립한 나라가 있었지만 희생이 너무 컸던, 도대체 왜 시작했는지 아무도 설명해 줄 수 없는 제1차 세계대전.
정의와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평화를 깨뜨리는 전쟁을 일으키는 아이러니.
평화를 지키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영화 속 어벤저스들처럼, 정의를 명분으로 하는 폭력은 정당한가!
그리고 그것은 누구에 의한 명분이며, 누구를 위한 정의와 평화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