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우의 집 - 개정판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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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 원과 은철의 관점으로 진행하는 소설은 1970년대 삼악동 삼벌레고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삼벌레고개는 등고선에 따라 계급을 나타내듯 살림살이가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데, 원과 은철은 그중에서도 계급의 중간에 위치한 중턱의 우물집에서 산다. 어느 봄날, 은철의 우물집 바깥채에 원의 네 식구가 세입자로 들어오고 원과 은철은 단짝이 되어 스파이 놀이를 하며 동네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전쟁 이후 5.16쿠데타를 거쳐 인혁당 사건과 국가비상사태 선언이라는 정치적 상황, 중동 특수라는 경제적 붐이 일어나면서 세상은 흑과 백의 논리로만 정의되었고, 이에 따라 이념과 가진자와 못 가진 자로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이 구분되었다.


일곱 살 은철과 원에게 있어서 딱지를 뺏어간 형 금철과 10원을 꿔간 후 갚지 않는 언니 영은 나쁜 사람이다. 그런데 두 아이는 자기들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들 역시 똑같이 나이를 먹기 때문에 손위 형제와의 나이차를 좁히지 못한다는 것이 억울하다. 형제들의 나이의 차를 줄일 수 없는 것처럼 아랫동네와 중간동네, 윗동네의 격차는 줄어들지 못한다.

작은 동네 안에서도 온갖 인간군상은 다 드러난다. 이사온 첫날부터 부동산 계약서에 거침없이 서명하는 새댁 효경은 뭔가 배운 티가 나는 사람으로 동네 여자들의 질투를 일으킨다. 보험외판원 성계희로부터 정보를 얻어 점을 봐주는 보살 임말숙, 수학자라고는 하지만 직업이 불분명한 고성한, 구멍가게를 하는 통장 박가네, 그들의 집에서 일하며 정보원(?) 역할을 톡톡히 하는 가정부들, 남편이 사우디 노동자로 근무하면서 보내는 돈으로 신세 편하게 살고 있어 동네 사람의 부러움을 받고 있는 사우디댁, 간첩인지 대학생인지 종잡을 수가 없는 청년, 안덕규의 집을 수시로 찾아오는 수상한 사람들. 그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언제나 그랬듯 이웃으로 계모임을 이어가고, 소소한 반찬을 나누고, 뜬소문을 수다거리로 삼아 살아갔을 것이다.


어느날 금철의 객기어린 장난으로 은철의 무릎이 부서지는 사고가 일어난다. 장애를 안고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순분이 믄득 떠올린 것은 사실 확인없이 안덕규의 누나를 놓고 동네 여자들과 험담을 한 자신의 모습이었다. 부끄러움에 대한 각성이다. 그리고 안덕규는 자신의 외모를 바꾸기 위해 혀로 잇몸을 문질렀던 영과 화가 난다고 밥그릇을 뒤엎은 원에게 부끄러운 짓에 대한 엄격한 벌을 내린다. 우리가 짚어야할 부끄러움은 과연 무엇일까?


간첩의 누명을 쓰고 끌려간 덕규는 아이들의 이름처럼 결국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시신을 통해 남편이 극단의 고통으로 자살까지 시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효경은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아이들을 위해 스스로를 고립시켜 딸들과 단절한다. 여기에서 눈여겨 봐야하는 것은 순분과 효경의 연대다. '간첩과 그 가족이 살고' 있으며 '장애아'가 사는 우물집은 이제 스스럼없이 드나들어도 되는, 계모임의 계주가 사는 이웃이 아닌 불편한 존재로 전락한다. 은철이 걷는 연습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사람은 원이고, 엄마 대신 살림을 도맡은 영의 곁에서 말없이 위로가 되어 준 사람은 금철이다. 또한 효경이 잠깐 정신이 돌아왔을 때 도움을 요청한사람은 순분이다. 이 연대가 덕규의 죽음과 은철, 원의 장애를 막지는 못했다하더라도, 우리가 연대를 해 나가야하는 까닭은 효경이 삶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처럼 마지막까지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줄 수있기 때문일 것이다.


토우란 흙으로 만든 사람이나 동물의 상을 일컫는다. 폭력적 강요와 억압, 인권을 상실한 시대에 인간성을 지킬 수 없었던, 셀 수 없이 수많은 사람이 토우로 살아야했던 그 시대, 우리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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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로 산다는 것 - 워킹푸어의 시대, 우리가 짓고 싶은 세계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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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에서 태어나 러시아에서 자라고 한국에서 공부한 후 노르웨이에서 정착한 한국 국적일 가진 학자 박노자가 바라본 대한민국의 현실을 함께 들여다본다. 
 
한국에서 부재한 보편적 2인칭 대명사를 들어 급級의 사회를 지적한다. 2인칭 대명사는 기득권층과 하층민을 극단적으로 나누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급'이 구분되면 관계의 친소와 말의 높낮이를 맞추고, 이를 처세의 기본 기술로 익혀 살아간다. 심지어 죽음에도 급이 있다. 가난한 독거 노인의 죽음, 비정규직 노동자의 산재 사망, 3D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 등 '급'이 없는 이들의 죽음에는 애도는 고사하고 이름조차 거명되지 않는다. 저자는 한국 사회의 각종 갑질에 질려 모국을 떠나는 이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직적 서열을 완화할 수 있는 길은 권력의 분산과 정책적 평준화다. 서열의 세습과 신분 피라미드를 당연시 여겨서는 안되며 대학 평준화, 의료 공공화, 재분배 시스템을 통한 재산 격차의 억제 등을 적극적으로 시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최악의 독약은 권력이다. 권력은 타자와 관련된 결정을 내리고 이를 타자에게 합법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뜻한다. '권력'이라는 단어 안에도 불평등을 내재하고 있다. 권력을 아예 없앨수는 없더라도 권력을 최소화하고 분산시켜 견제해야 한다. 
 
 
일을 해서 돈을 버는 모든 사람은 모두 노동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자'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대다수다. 인공지능 시대를 논하면서 대한민국 사회는 여전히 학벌로 서열을 정하는 극단적 학벌위주의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모든 국민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는다. 개인 각자가 노후를 책임져야 하는 나라에서 자식의 학벌을 위해 경제력을 쏟아붓고, 이것이 부담스러우면 아이를 낳지 않는다. 출산율을 높이고 싶다면, 출산 및 양육지원금보다 사회 구성원의 일생이 오로지 성적과 취업만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인프라를 만드는 것, 여성 노동을 포함한 모든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지 않는 사회 의식이 우선해야할 일이다. 
 
종종 '자국민'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자국민이란 제 나라 백성, 즉 해당 나라의 국적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다른 민족보다 해외 국적을 취득하고 해당 나라에서 살고 있는 해외 이민자에 더 호의적이다. 민족적 정서를 기반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를 넘어선 순혈주의를 우려하는 것이며, 정작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둘러보면 좋겠다. 
 
극우 언론들은 사회적 '질시'에 기대어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여론을 형성한다.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메커니즘에는 무한하고 영구적인 '경쟁'을 기반한다. 여기에는 '공정'이 사라진 평가만을 인정한다. 수 년간 같은 자리에서 저임금 착취를 당하며 업무를 배우고 경력을 쌓아도 '시험 절차'에 따르지 않으면 '부정의'가 된다. 청소년기에 아무런 경험도 없이 잔인한 무한 경쟁 속에 던져져 오로지 시험으로 평가만 받아온 세대의 질시와 절망을 이용하는 것이다. 발표는 있어도 토론은 없는 교실과 강의실에서 연대의 개념도, 경험도 없는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남을 끌어내리는 것 뿐이다. 같은 사회 안에서 공존해야 하는 구성원끼리도 이럴진대, 하물며 난민이나 기후 문제에 있어서 협력이 가능하겠는가. 
 
30대 이하, 경제적 계급이 중하층인 남성들이 분노하고 있다. 그 분노는 초과 경쟁 사회에서 자신들을 '인간 병기'로 만든 신자유주의가 아닌 여가부에 돈을 들이는 좌파 정권과 페미니즘을 향하고 있다. 그들에게 페미니즘은 '절대악'에 해당한다. 한국 남성의 기본적인 정체성은 경제력을 바탕으로하는 '가족' 부양자'다. 그런데 현재 30대 이하 세대는 남성의 정체성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어 그 분노를 엉뚱한 방향으로 표출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경제적 고립이라는 상황을 악화시켰다면 이를 상대로 투쟁하고 이에 저항하는 정당을 지지해야함에도 불구하고 화살은 오히려 사회적 약자를 향하고 있다. 이는 '남성'이라는 특권의 상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회가 여성의 모든 노동에 값을 지불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양성평등은 불가능했다. 저자는 국가와 자본에게 새로운 병역 대상자와 노동자들이 필요하다면 육아 노동을 둘러싼 조건부터 본질적으로 달라져야함을 말한다. 
 
저자가 정의하는 '괜찮은 사회'란 사회적 적응을 거부하는 기인들이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관용의 사회다. 관습이나 혹은 법으로 정해져 있는 않은 사회적 잣대에 맞춰 살지 않아도 최소한의 먹고 사는 일에 불편함이 없으며 정서적으로 고립되지 않는 사회를 의미한다. 
 

저자는 한국 교육과 교육조차 자본주의에 잠식당한 현실을 지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의 역할은 더이상 '키움'이 아니다. 학교는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고 미래의 노동자를 육성하는 공간이 되었다. 단선적 신분 상승에 입각한 성적위주의 '공부'에 모든 것을 쏟는 대한민국의 공부 세태를 짚으며 오로지 입시를 위해 모든 욕구를 배제해야 하는 것은 개인의 낭비이며 사회적 낭비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성공 신화를 다루는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로로 자리매김한지는 오래다. 오로지 경제적 성공을 목표로 무한 경쟁의 굴레에 거침없이 제 몸을 던져넣는 세상에서 배려, 연대는 멸종 위기 단어가 됐다. 인생 목표가 '부자'인 사회, 이대로 괜찮을까? 
 
대학이 취업의 관문이 된 사회에서 이르면 초등학교부터 입시 위주의 공부를 해오고,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을 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으로 정해진 현주소에서 대안적 인생이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온 가족이 수능이라는 시험에 인생을 걸 듯 한다. 자본주의가 유입되고 산업화를 진행하면서 대학은 대놓고 산학협력 체제를 구축했다. 대학은 더 이상 지성의 전당도 아니고 학문을 연구하는 곳도 아니다. 개성과 재능에 상관없이 취업이 잘 되는 학과를 선택하고, 대학 입학 후 전공이 무색하게 곧바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보직과 상관없이 대졸 증명서를 요구하거나 업무 능력과는 별개로 학력으로 보수를 책정하는 현재 우리의 모습을 스스로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저자는 '공'의 영역이지만 사유화된 한국의 대학들의 평준화가 시급함을 말한다. 한국처럼 학벌이 모든 사회생활의 중심 즉 사회적 존재의 중심이 되는 사회는 드물다. 학벌 피라미드 문제가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동안에는 교육 정상화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12년 입시 지옥을 타파하자면 학벌 위계 질서 자체에 대한 철저한 파괴가 필요하다. 교육 혁명이 절실하다. 








2019년말에 시작되어 2020년 현재까지 현재진행중인 코로나19사태는 각 나라와 사회 전반에 가려져 있던 진실을 드러나게 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공통적으로 각 국가마다 사회적 격차에 의한 피해 정도는 상당히 컸다. 코로나19 사태로 중산층 이상의 구성원들은 '불편함'을 느끼는 정도였지만, 중소기업 노동자, 불안 노동자, 자영업자 등과 소수자에 해당하는 이민족 외국인들은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다. 이를 통해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본주의가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음이 드러났다. 저자는 이제 전 지구적 차원에서 평등, 생태, 지속성을 지향하는 협동적 체제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4차 산업혁명'과 그에 수반된 긱 이코노미는 안정성도 없고 시민사회에의 소속도 불가능한 완전한 타자가 되어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쓰고 버리는 '부품'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는 새로운 형태의 가난과 개개인의 고독이 만연해졌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장기적인 관계 맺기가 불가능해진 시대가 도래하면서 보장되고 안정감있는 삶이 전무해졌다는 점에서 무산자라고 지칭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이전 시대가 착취로 대변된다면, 21세기 현대 사회는 고립과 소외가 사회적 문제이자 개인의 고통이다. 관계와 연대가 사라진 경쟁만이 남은 세상에서 불안과 가난, 외로움의 무게를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하는 몫으로 남았다. 페미니즘, 외국인 노동자 혐오, 이슬라모포비아 등은 강한 혐오와 소외, 고립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이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수가 공유하는 집단에 들기 위해 '타자 혐오'는 더 강력해진다. 연대을 잃은 자리에 혐오가 들어서는 것이다. 
 
과잉 생산과 과소 소비는 수면 시간 이외의 거의 모든 시간을 식민화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손에서 놓지 않고 이용하는 모든 콘텐츠와 네크워크는 자본의 이윤에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생활이란 개념이 사라진지는 오래고, 사색과 사유는 갈 곳을 잃었으며 거의 대부분이 경제적 측면에서 작동하는 세계는 소설에서 보아왔던 디스토피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저자는 '혁명'을 외친다. 이 혁명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부터 시작하는 혁명이다. '나의 생각이 무엇이냐'라고 자문함으로써 우리는 혁명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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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일기 카프카 전집 6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유선 외 옮김 / 솔출판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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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부터 1923년까지 카프카의 일기를 완역한 책으로써 이십대 중반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카프카가 직접 남긴 기록들을 읽을 수 있다. 총 열두 권과 여행일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만 1909년의 기록은 일기보다는 습작이 대부분이다) 그의 긴 습작과 낙서처럼 써놓은 짧은 문장들, 그리고 일상에서 느꼈던 소소한 감정부터 관계에서 오는 갈등과 스스로 느끼는 문학적 한계 등 카프카의 깊은 고민과 사색들이 전해진다.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카프카는 프라하 독일계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스물네 살에 직장생활을 시작해 일반 보험회사를 거쳐 14년간 근로자 사고 보험국에서 근무했다. 유대계 독일인으로 자수성가한 가부장적 아버지가 카프카에게 갖는 기대로 인해 그는 단호하게 문학만을 고집할 수 없었고, 병색이 짙어진 1922년 전까지 직장생활과 갈수록 쇠락해가는 아버지의 사업까지 신경쓰며 글쓰기를 병행했다. 그의 일기를 읽다보면 그가 얼마나 간절하게 글만 쓰고 싶어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자기의 작품에 만족하기 어려웠던 카프카는 문학과 글쓰기에 대한 열정과 더불어 자신의 재능에 의심을 품으며 허약한 신체에도 불고하고 선뜻 직장 생활을 그만두지 못한다. 어쩌면 가업을 잇고 강한 아들을 기대하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방패 삼아 작가로서의 실패를 더 두려워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글쓰기를 위해 파혼까지 한 것을 보면 카프카가 문학을 대하는 감정이 어떠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카프카는 결혼을 함으로써 확장되는 관계와 그로인해 글쓰기에 받을 영향, 그리고 가장이 되면 직장을 영원히 그만둘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러나 한편으로는 완전한 고립에 대한 두려움과 아내를 통해 가족과의 관계를 개선해 보고 싶은 마음이 혼재하면서 깊은 내적 갈등을 겪지만 결국 그는 글쓰기에 무게를 두어 두 번이나 파혼을 결정한다. 이렇듯 문학과 글쓰기는 카프카에게 있어 절대적인 존재였다. 
 
당시 제국의 제3도시에 해당했던 프라하는 독일어를 사용했는데, 주류사회에서 사용하는 독일어가 아닌 소수언어로써 독일어를 사용했다. 카프카는 서부 유대인으로서 유럽에 동화된 즉 자신들을 '유대인'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유럽의 제국 시민으로 인식한 유대인 집단에서 성장했다. 이후 시오니스트인 막스 브로트와 교류하면서 민족성에 대해 각성하면서 그에 따라오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그의 작품에서 꾸준하게 비쳐진다. 어린시절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정서를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에서 온전한 유럽인으로도, 유대인으로도 소속감을 가지지 못했던 카프카는 핍박받는 유대 민족에서 가족 구성원과 직장 구성원으로서 아웃사이더 입장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에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다. 글을 쓰는 카프카와 보험국에서 근무하는 법률 자문인 카프카, 유대인 카프카와 유럽인 카프카. 지금이라면 고민할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군소 전쟁과 1차대전을 배경으로 남성성을 강요받는 사회에서 유약하고 예민하며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핍박받는 민족성까지 깨달으면서 느꼈을 혼란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아버지와의 관계가 나빴던만큼 카프카는 가족 안에서 안정을 느끼지 못했음을 일기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글쓰기에 대해서 가족 내 누구에게도 적극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고, 약한 체력으로 신체적 한계를 느끼는 것도 부족해 정서적 지지도 받지 못했던 카프카의 고독과 외로움이 크게 다가온다. 어쩌면 카프카가 시오니스트 막스에게 영향을 받고, 민족적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던 이유는 가족 내에서 안정된 관계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린시절부터 긍정적 관계에 대한 경험의 부재와 두려움으로 대상화된 아버지 상이 그에게 몇 번의 파혼을 감행하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굳이 일기가 아니더라도 카프카의 작품에는 유독 아버지들이 많이 등장하고 그들은 주인공에게 결정적, 그것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는 <변신> <선고> 등 수많은 작품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반면 주인공의 친구로 등장하는 이들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일기에는 친구 막스를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는 표현을 했을 정도로 그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눈에 띈다. 개인적인 짐작이지만 카프카와는 다르게 결혼해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막스에게서 질투와 더불어 대리만족을 느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카프카가 보험국 법률자문으로 일하면서 주로 상대하는 이들은 하층민이었다. 열악한 조건과 차별 속에서 인격적 모욕을 견뎌내며 도덕적 가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환경에서 일하지만 빈부 격차는 좁혀지지 않는다. 다른 의미에서 소수자였던 카프카는 이들에게 깊이 이입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일기에서는 보통의 20대가 느꼈을 젊음의 활기도 적게나마 느껴진다. 친구와 여행을 하고, 음악을 즐기고, 이성에게 호기심을 가진 그의 글에서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고뇌를 잠시나마 내려놓는 모습은 독자인 나조차도 안도하게 한다. 신뢰했던 펠리체 바우어와 두 번의 파혼, 율리에 보리첵과 약혼 후 1년 만에 또 파혼, 꽤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빠져든 열여덟 소녀와의 사랑, 기혼녀 밀레나와의 교감, 그리고 도라 디아만트와의 짧은 동거. 자신의 일기를 막스가 아닌 밀레나에게 넘기고, 도라 디아만트에게는 아직 출판되지 않은 모든 작품을 불태우라고 한 카프카. 
 
일기를 읽다보면 그의 작품 세계가 이토록 난해한 까닭을 전부 헤아릴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1913년 5월 24일의 일기에는 아버지 앞에서 <화부>를 낭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전의 내용들을 떠올려보면 아버지가 카프카의 작품 낭독을 들었다는 것과 아버지를 그토록 두려워하면서도 그 앞에서 자신의 작품을 낭독했다는 사실은 의외다. 어쩌면 카프카는 직장을 그만두고 글쓰기에 몰입하고 싶었던 것 이상으로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아버지는 아들이 사업보다는 문학에 더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더 못마땅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1년 내내 옆에 끼고 읽어야 할 책을 보름만에 읽어 스스로 아쉽다. 한동안은 책장에들어가지 못하고 책상 한 켠에 자리해 수시로 들춰볼 것 같다. 그의 깊은 고뇌와 사색과 더불어 이번 겨울을 보내게 될 것을 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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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에
수잰 레드펀 지음,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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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갈등이 잦은 가정 문제를 풀어보고자 핀의 가족은 단합 스키 여행을 떠난다. 결혼을 앞둔 오브리를 제외한 핀의 일가족과 핀의 친구인 모린, 엄마와 친자매처럼 지내는 캐런 이모의 가족, 열 명이 동행한다.


산장에 도착한 직후 저녁을 먹으러 가는 도중 예상치 못한 일로 사고를 당하고, 캠핑카는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산 아래로 추락한다. 핀은 그자리에서 즉사하고 아빠 잭은 중상이며 다들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날이 밝으려면 적어도 열두시간을 버텨야하는데, 한겨울 밤의 추위가 두려움보다 크다. 더구나 저녁 식사를 하려고 나선 길이다보니 방한복을 제대로 챙겨입지 않았다. 아침까지 기다리자는 의견과 얼어죽기 전에 길을 나서야한다는 의견이 나뉘면서 핀의 언니 클로이와 그의 남자친구 밴스가 떠난다.


날이 밝자 엄마 앤과 카일은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현장을 떠나고, 아빠 잭이 여전히 의식을 찾지 못하는 사이 캐런 이모의 남편 잭은 오즈를 불러내 앤을 찾아오라고 회유한 후 그의 장갑을 가로챈다. 밥의 간교로 오즈는 강아지 빙고를 데리고 엄마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고 이제 캠핑카에는 캐런 이모 일가족과 의식이 없는 잭, 그리고 모린, 다섯 명뿐이다.


다행히 앤과 카일이 도로를 찾아내 캠핑카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구조된다. 캠핑카를 떠났던 클로이와 밴스도 순차적으로 구조되지만, 결국 오즈는 발견되지 못했다. 잭의 의식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으며, 클로이의 손발가락은 모두 잘릴 지경이고, 모의 발도 동상으로 온전치 않다. 오직 캐런 가족만 건강한 상태로 귀가했고, 심지어 밥은 위기 상황에서 조난자들을 보호한 영웅이 되었다.


잭은 의식이 돌아온 후 앤이 클로이를 붙잡지 않은 것과 오즈를 두고 캠핑카를 떠났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서로 친구 이상의 감정을 공유하는 듯한 밥만이 앤의 숨통이 되어준다. 앤이 오즈를 사지로 내몬 장본인이 밥이라는 사실을 알면 그녀는 밥에게 위로 받았던 모든 순간들을 용납할 수 있을까? 두 딸과 아들을 잃은 앤의 삶에는 생기가 꺼진 딸, 분노만 남은 남편, 죽은 아들이 사랑했던 강아지 빙고, 그리고 죄책감만이 남았다.


어느 순간부터 사건의 진실은 왜곡되고 각자 조각난 사실의 파편만 쥐고 있어, 그들의 기억은 조금씩 어긋난다. 이에 모린은 진실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 자신이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사건의 조각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소설은 사고 현장에서 즉사한 주인공 핀의 영혼이 화자가 되어 살아남은 자들을 지켜보며 스토리를 전개해 나간다. 외견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보이는 보통의 가족들을 통해 가족이라는 공동체 뿐만 아니라 개개인 또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짚어낸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 도덕성과 죄책감의 딜레마가 처한 입장에 따라 관점이 달라질 수 있음을, 그래서 우리가 집단적 관점이 아닌 개인의 관점에서 공감능력을 가져야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핀의 가족 간의 갈등은 사고 이전부터 수면 아래에 고여 있는 상태였다. 아빠 잭은 발달장애를 앓고 있는 오즈를 혼자 돌보다시피하느라 다른 가족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고, 엄마 앤은 가족구성원 안에 발달장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음과 동시에 남편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해 친구의 남편과 부적절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사실 소설에서 추락사고는 등장인물 간의 갈등을 유발시키는 원인이라기보다는 내재해 있던 요소를 겉으로 드러내 해결해 나가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독자로부터 평소 숨겨져 있는 본성을 통해 도덕성의 한계를 고민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기가 닥쳐왔다. 산 아래로 떨어진 캠핑카 안에서 그들의 민낯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남편이 의식을 잃고 동행한 두 딸 중 하나는 즉사했고 하나는 길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앤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눈벽을 쌓고 구조대를 부르기 위해 몸을 움직인다. 오즈를 대하는 밥과 카일의 태도에서도 뚜렷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우연히 길에서 차를 얻어 타 아무런 친분 관계가 없는 카일은 오즈를 위기 사황에서 함께 극복해야할 동료로 여기는데, 오히려 오랜 세월동안 가까운 이웃으로 오즈를 지켜봐온 밥은 그를 바보 혹은 위험 요소로 치부한다. 캐런은 딸 내털리가 충분히 방한이 가능한 복장임에도 불구하고 앤이 죽은 핀의 부츠를 모린에게 주자 원망하며 이후 성인으로서 미성년자인 모린에 대한 사회적 책임까지 망각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미묘한 감정 변화는 시작일 뿐 막상 구조가 끝난 후에는 감당 못할 죄책감이 그들의 일상을 위협한다.


잭은 어쩔 수 없었다하더라도 사고를 일으키고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크다. 아이들을 보호하지 않은 앤에 대한 분노 역시 자신을 향한 것이다. 앤은 벼랑에서 카일의 손을 놓으려고 했던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고, 밴스는 잠시나마 클로이를 두고 혼자 길을 떠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헤어나지 못한다. 가장 현명한 인물로 묘사되는 모린 역시 핀의 시신을 마주한 순간, 죽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던 것과 밥의 잘못된 행동을 짐작했지만 차마 나서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있다. 그러나 정작 가장 크게 죄책감을 가질 것으로 여겨졌던 밥과 캐런에게서는 그런 기미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핀은 말한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평범한 일상 안에서는 누군가를 해치거나 위협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그들은 그저 상황에 의해 어쩔 수없는 선택을 한 것 뿐이라고. 그러면서 앤과 모린, 그리고 밥의 가족을 대비시키며 위기 상황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도덕성을 버리지는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꽃은 핀이 죽어서야 알게 되는 가족들의 다른 모습들과 숨겨진 내면이다. 오즈를 외면하는 엄마가 사실은 오즈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 오즈가 세상의 전부인 양 여겼던 아빠가 사고 직후 아주 잠깐이나마 오즈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 이해받지 못하는 엄마의 외로움과 그로인한 외도, 그 외도가 사실은 누구보다 남편의 이해를 원했던 표현이라는 것, 아내의 외도를 알면서 어쩌지 못했던 아빠의 고통,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은 클로이가 정작 간절히 원했던 것은 엄마의 관심과 보호였던 것, 그리고 틈만 나면 핀에게 시비를 거는 내털리의 속내는 핀과 친해지고 싶었다는 사실. 그 모든 진실과 사실들을 살아서는 알 수 없다니.


230.

나는 죽고 난 후에야 사람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지를 알게 되고, 상대방의 좋은 점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냉소주의가 우리들에게 만연해 있음을 깨달았다.



작가는 등장인물 누구에게도 비난의 화살을 돌리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비겁해질 수 있으며, 완벽하게 결백한 사람도 없다. 다만 우리가 왜 인간이고 인간으로서 살아야 하는지는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핀의 입을 빌어 극한 상황과 그 이후에 할 수 있는 일이란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잘못을 인정하고 슬픔을 위로하며 먼저 떠난 이들을 기억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정신과 의사도 클로이의 말문을 열지 못했지만, 클로이가 사고의 아픈 기억을 털어놓음으로써 위로를 받으며 슬픈 감정과 핀에 대한 추억을 공유한 대상이 동생의 친구 모린이었던 것처럼. 그래야만 남아있는 자들의 삶이 아픔으로 얼룩지지 않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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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제2차 세계대전 - 학살과 파괴, 새로운 질서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세계대전 2
A. J. P. 테일러 지음, 유영수 옮김 / 페이퍼로드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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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권력과 국경선이 새롭게 재편되고 자본주의에 기초한 민주주의가 세계에 적용된, 인류의 전환점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은 전쟁사이면서 동시에 첨예한 정치적 논리가 개입된 정치사다.

이 책은 단순히 전쟁의 과정만 나열한 것이 아니라 풍부한 사진과 지도를 자료로 첨부하면서 전쟁 내내 흐름을 구체적이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리고 전쟁의 이면에 감춰진 각국의 이권과 지도자가 가진 개인의 이익들까지 들여다보면서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장에서 벌어지는 그 이상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은 소련이 러시아 인접국에 대한 공산주의 지배의 확립은 냉전에 따른 결과로 나온 것이지 냉전을 일으킨 원인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승전국이었음에도 스탈린은 전쟁 이후 인접한 핀란드와 오스트리아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묵인했다. 소련의 정책이 단호했음은 사실이지만 공산주의와는 관계가 없었다는 것과 이를 영국.미국과 지중해 패권을 놓고도 적극적인 요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나치와 일본의 압제에 놓여있었던 민족들을 해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행되었다고는 하지만 민간인 사망과 대량 학살, 엄청난 규모의 도시 파괴, 물적 손실, 난민 발생 등을 놓고 보면 히틀러의 파시즘을 막았다는 것 외에는 그의 가치에 상응하는 어떠한 대의가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영국은 1차대전 때부터 '정의실현'을 명분으로 싸웠지만, 그 과정은 그야말로 강대국의 밥그릇 싸움에 불과하다. 이 전쟁을 통해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무기를 팔고, 힘없는 나라들을 복속해 신탁통치를 시작했으며 그로인한 영향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또한 강대국의 편리와 잇속에 맞춰 약소국가들의 국경선을 정함으로써 생긴 갈등은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그들이 테이블 앞에 앉아 자신의 정치적 위치와 명분으로 입씨름을 하고, 광적인 한 개인의 욕망을 쏟아내고자 전선에서 군인들을 몰아붙인 그 시각에, 수많은 전장의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구상할 권리조차 상실된 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어나갔다. 그 죽음 앞에 정의가 존재하는가.

저자는 드레스덴의 폭격이 전쟁동안 행해진 다른 공격들과 다를 바 없었고 많은 경우들과 비교해서 덜 심했다고 전하면서 독일의 저항이 2월에도 만만치 않았음을 상기시키며 드레스덴의 폭격과 학살에 가까운 이 작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독일의 패색은 짙었고 폭격당시 드레스덴의 직접적인 저항도 없었으며 군인도 아닌 피난민, 민간인들이 사망했다. 저자의 말대로 4년 동안 무차별 폭격은 여론과 정치인들로부터 많은 성원을 받은 영국의 업적이었다. 하지만 드레스덴 폭격을 민간인 사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단초로 보는 것이 아닌, 전쟁 내내 있어왔던 폭격과 다를 바 없다는 시각은 아쉽다.

종전 후, 네 승전 강대국의 국제 재판소가 뉘른베르크에 세워졌고, 괴링을 필두로 21명의 지도자급 독일인들이 전범으로 기소되었으며 일본에서는 고작 일곱 명의 지도자만 교수되었다. 승리한 강대국들은 불변하는 정의의 원칙이 지켜졌다고 생각했다. 과연 그럴까? 저자는 기소된 범죄 증에 많은 범죄가 포로나 인질에 대한 대량 학살, 또는 유대인 학살과 같은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실제하는 범죄였다는 말과 함께 이 대목에서 그렇다면 반평화 범죄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침량전쟁을 준비하고 일으키는 것만이 범죄인가? 전쟁 중 민간인 학살과 드레스덴 폭격이나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 등은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저자는 전쟁이 수반한 모든 학살과 파괴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은 훌륭한 전쟁이었다고 평가했는데, 전쟁 앞에 '훌륭한'이라는 단어가 제 의미를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나간 역사에 대한 후회는 소용이 없다. 다만 역사의 기록이 승리자의 기록으로만 남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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