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길산 1 - 특별합본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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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선생의 작품은 어지간하면 거의 다 읽었지만 정작 최고의 작품이라고 불리는 <장길산>은 읽지 못했다. 당시 박경리 선생의 <토지>를 완독한 후 진이 빠져 있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지금까지 왔다. 
 
대하소설인만큼 등장인물의 수나 면면이 만만치 않다. 인물마다 생동감이 넘치고 그들의 관계는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말의 아름다움 또한 놓칠 수 없다. 초반에 자주 등장하는 재인패들의 소리, 광대와 무당의 잡가, 서낭굿, 옥내에서 흘러나오는 서글픈 노래와 푸념들은 가슴에 깊게 들어온다. 한마디로 문장 하나하나 버릴 게 없다. 
 
총 1001페이지인 합본호 1권은 대장정의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긴 여정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갈 등장인물들의 소개를 마치고 본격적인 이야기는 2권부터가 아닐까 싶다. 길산의 첫 번째 시련이라고 할 수 있는 감옥 생활은 결기만 가득했던 스물네 살의 청년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백성들의 피나는 사연을 알게 되고 자기가 얼마나 무력하고 어리석은가를 깨달으며 틀을 깨고 나오는 과정의 시작이다. 
 
소설에서는 이미 사회의 심각한 문제를 짚고 있다. 양반을 뒷배로 둔 상인들의 매점매석, 고위층부터 말단 관리에 이르기까지 줄줄이 이어진 횡령과 비리와 부정부패, 신분을 사고파는 공명첩, 먹고 살 길이 막막해 농사짓는 양인이 제 발로 광대가 되고 돈이면 죄의 경중에 상관없이 무죄 방면되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제대로 한 판 놀아보자는 광대 길산의 몸짓은 이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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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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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부터 짐수레꾼으로 일한 할아버지는 읽고 쓰는 일을 배울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가족 중 누군가가 책 혹은 신문에 빠져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흙으로 지은 초가집에 살았던 가난한 조부모는 아버지가 학교에 가는 대신 농사 일을 거들기를 바랐고, 아버지는 수업에 빠졌다. 할아버지는 열두 살 아들을 초등 교육 수료증 준비반에 넣는 대신 자신이 일하는 농장에 집어넣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아버지를 더 이상 먹여 살릴 수는 없었기에.  
 
아버지는 할아버지처럼 이른 아침부터 농장에서 일을 하고 그 대가로 의식주를 해결했고 약간의 돈을 받았다. 이불도 없이 외양간 짚더미 위에서 잠을 자며 이제는 갈 수 없는 부모님 댁을 생각했다. 전쟁의 시대, 아버지는 군대를 통해 세상에 진입했다. 제대 후에는 건실한 공장 노동자가 되었고 매주 돈을 저축했으며 같은 공장 노동자인 어머니와 결혼했으며 더 나은 삶을 위해 상인을 꿈꿨고 대출을 받아 기반을 이뤘다. 반은 장사꾼으로, 반은 노동자로 살고 있는 그에게는 무엇보다 먹고 사는 게 중요했고, 살아 남는 건 더 중요했다. 삶은 결핍의 연속이었고 교양과 예술은 사치였다. 아버지는 가난해도, 자식이 죽어도, 전쟁이 나도,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작가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삶이다. 굳이 나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유년 시절 전쟁을 겪었거나 전쟁 직후에 유년 시절을 보낸 부모님들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소위 엘리트라고 불리는 특권 계층 혹은 기득권층이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했고 배우지 못했으며 삶의 질보다는 생존이 더 우선했다. 아버지 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그들의 자식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고투하며 살아냈기에 이 책은 원제목처럼 '자리La Place'가 더 적절할지도 모를 일이다.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부끄럽지 않게 살았노라고 자부하지만 막상 시간이 흘러 다음 세대에 자리를 물려줄 때가 오면 배우지 못했던 것이, 자신의 무지가, 문득 부끄러워진다. 이 정도면 괜찮게 살고 있다고 여겼는데,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기에 자신의 부모와는 다르게 아낌없이 뒷바라지를 한 자식이 고상한 언어를 쓰지 않는다고 무시하며 더이상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을 말하지 않을 때 오는 서글픔, 당신이 번 돈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위해 쓰는 비용을 아까워하는 모습은, 왠지 익숙하다. 대학에 보내 교사가 된 자식과 번듯한 집안에서 자란 엘리트 사위를 맞이하는 자신의 모습은 왜 이리 초라한가. 그럼에도 아버지가 커다란 자부심과 만족을 느끼며 뿌듯해 하는 순간은 그토록 진입하고 싶었던 세상에 자식이 존재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때다.  
 
 
이는 '아버지'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개인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한 세대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모습이다. 물리적인 전쟁이 아닐 뿐 세상은 우리를 늘 치열한 전쟁터 속으로 내몰고, 우리의 부모들은 그 안에서 가족과 삶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은가. 작가는 개인적인 서사를 데려와 인간의 한 생애를 '기억'과 '자리'로써 사실적으로 건조하게 써내려갔다. 책의 마지막, 작가는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고 있는 옛 제자와 우연히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부분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기억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자신의 기억을 얼마나 사실대로 기억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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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알드 달 베스트 단편 1
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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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최고 이야기꾼 로알드 달의 베스트단편집 중 첫 번째 책 <맛>이다. 이 단편집에는 제 꾀에 제가 넘어가고, 제 발등 제가 찍는 인물들이 주를 이룬다. 농부들을 시골 무지랭이로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여성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우둔한 외모를 우습게 여겼던 아내 등은 크고 작게 제대로 뜨거운 '맛'을 본다.  
 
내기에 정신팔려 판돈으로 딸을 거는 남자, 교양인을 자처하지만 사기꾼에 불과한 미식가, 욕심에 눈이 멀어 제 신체가 다 잘려나가는 줄도 모르고 벗어날 줄 모르는 사람들, 자기의 물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타인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인간의 탐욕.  
 
인간의 어두운 면을 유쾌하게 혹은 공포스럽게 때로는 재치있게, 그러면서도 깔끔하고 단호한 결말은 과연 최고의 이야기꾼임을 새삼 감탄하게 만든다. 이 즐거운 기대감을 안고 2권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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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죄자
레이미 지음, 박소정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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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를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들은 단 한 치의 허술함없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팽팽하게 긴장감이 유지된다. 특히 소설의 마지막에 드러나는 또 하나의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700쪽이 넘는 분량을 하루만에 읽었으니 몰입도는 말할 것도 없다.

한밤중에 여자를 차로 유인해 강간 살해 후 시신까지 훼손해 유기하는 잔혹한 살인 사건이 연달아 일어난다. 범인이 체포되어 사형당해 끝난 줄 알았던 연쇄 살인 사건은 2년 후, 동일범의 소행으로 짐작되는 유사 사건이 발생한다. 강압수사로 애꿎은 남자가 사형되고, 진범이 사라진 그 진실을 아는 사람은 진범을 포함해 단 두 사람 뿐이다.

소설 초반에 이미 진범을 노출시킨 작가가 이 소설에서 의도하는 바는 무엇일까?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작가는 오로지 '죄'에 집중한다. 개인의 어긋난 사랑으로 복수를 위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엽기적인 살인을 벌인 자만이 죄인일까? 명예와 자존심 때문에 사건을 은폐하고 무고한 시민을 사형장으로 보내버린 경찰, 범인을 잡기 위해 관련 없는 사람들을 범죄에 개입시키고 형사 처벌이 불가능해진 범죄자를 국가 대신 처벌하겠다고 나선 남자, 심지어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스스로를 살인범의 제물로 삼는 여성. 각자가 가진 정의실현을 명분으로 행한 '죄'다.

그러나 누구도 섣불리 그들을 비난할 수 없다. 거대 공권력 앞에서 법 체계에 무지한 보통의 사람들은 얼마나 나약하며, 또한 우리는 명분과 실리와 사회적 체면 때문에 많은 것들을 외면하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정도의 차이일 뿐 그들의 모습이 우리 내면 어딘가에 숨어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작가가 다음 세상의 희망이라고 가리키는 웨이중과 웨샤오후이를 통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어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들에 고군분투할 만한 세상'이라고 말한다. 그 고군분투할 만한 세상을 만들 사람은 바로 사실과 진실을 외면하면 안되는, 보통의 우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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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스 로마사 3 - 한니발 전쟁기 리비우스 로마사 3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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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전쟁기에서 한니발에게 결정적 힘을 실어주었던 칸나이 전투에서 대패를 한 로마는 이 즈음 공석인 원로원 의원 적임자조차 마땅치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는 라틴 공동체에서 두 명의 의원을 선출하자는 제안을 하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만리우스는 원로원 회의장에서 라틴인이 보이면 자신의 손으로 죽여버릴거라고 소리쳤다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동맹국도 아닌 변방 출신의 황제가 배출된 것을 알게 된다면 그는 뭐라고 했을까?  
 
 2.
로마는 집정관 임기 1년, 전쟁 지휘관을 1년에 한번씩 바꾼다. 전시에는 현명하다고 볼 수는 없는데,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시스템이 유지되는 이유는 지도자가 무언가를 결정할 때 '로마'라는 대전제를 우선하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개인의 사적인 감정을 보류하고 공동체적 공유 의식을 발동함으로써 자신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정학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읽혀졌다.

3.
스키피오는, 아프리카 카르타고 침공 목표는 한니발을 이탈리아에서 끌어내고, 전장을 아프리카로 옮거 전쟁을 종결짓는 것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로마 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아프리카에서의 전투는 로마에게 승리를 안겼으며, 한니발은 이 전투의 완패로, 전쟁에서도 완패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아홉 살에 떠나 36년 만에 돌아온 조국에서 그가 한 일은 젊은 스키피오에게 항복 사절단을 보내는 일이었다. 스키피오가 제시한 조건은 카르타고 입장에서는 굴욕적이었다. 평화 협정은 이루어졌고 17년간의 기나긴 전쟁은 종결됐다. 화려한 개선식을 거행하며 귀국한 스피키오는 '스피키오 아프리카누스'로 불린다. 한니발의 씁쓸한 웃음은 미래를 예견했던 것일까.  
 
시간이 흐르고, 후에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정복 당시 협정이 아닌 전쟁으로 종결짓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고 하는데, 그는 몰랐을 것이다. 어차피 50여년 뒤에 카르타고는 소멸할 것이라는 사실을. 더이상 카르타고라는 명칭은 존재하지 않고 '속주 아프리카'로 남게 될 것이라는 사실 또한.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한니발이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할 수 밖에없었던 이유는, 카르타고 군에게는 충성심은 말할 것도 없고 급료 외에는 싸움에서 이겨야할 절실한 이유가 없었던 외인부대였던 반면 적지에서 패배하면 죽음 뿐이고 더하며 국가의 존망이 달린 전쟁임을 인식한 주인의식과 충성심으로 다져진 정규군임을 감안한다면 승부는 이미 결정되어진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4.
그 유명한 리비우스 로마사에 대해서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 승자의 기록이니만큼 한니발에 대한 서술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감안하고 읽어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투스 리비우스가 말하는 한니발의 훌륭한 점은, 고국에서 먼 적의 영토에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싸우면서 많은 흥망성쇠를 겪으며 온갖 국적의 천민들이 뒤범벅되어 언어, 관습, 예절, 종교가 다른 잡다한 무리를 굳게 결속시키고 내부 반란이 없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라고 적어놓았다. 티투스 리비우스가 쓴 기록을 토대로 짐작해보자면 한니발은 장수로써는 더할나위 없으나 정치가나 책략가로서는 부족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싶다. 그에게 책사 노릇을 할 만한 인물이 있었다면, 그래서 그가 자책했던 것처럼 칸나이 승리 이후 로마로 진군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결국 전투는 잘 하지만, 정치를 바탕으로 하는 전쟁에는 미숙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저자가 다른 몇 권의 로마사를 읽었지만 가독성은 가장 좋았다. 개인적으로 소설 읽듯이 술술 읽힌다는 게 리비우스 로마사의 가장 큰 장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몇 권의 책을 함께 펼쳐놓고 읽으니 기원전 로마 시대를 살았던 역사가와 근현대 역사가가 쓴 로마서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는데, 이를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4권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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