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피트 몬드리안



초등생들에게 몬드리안 그림을 보여주면 제일 먼저 나오는 말이 "저도 이렇게 그릴 수 있어요." 다. 아마 이 말은 내가 아는 초등생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한 말일 것이다.



1908년부터 1912년에 걸쳐 완성된 <나무> 시리즈는 몬드리안의 예술적 진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사물의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자신의 예술 이념을 신조형주의라고 칭한 몬드리안에게 색채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빨강은 인간의 육체는, 노랑은 이성을, 파랑은 영혼을 상징했다. 인간의 조화와 통일을 갈구했던 몬드리안이 지향하는 것은 이분법적 대립이 균형을 이루는 조화였다.



1929년 이후 대공황으로 세계가 지옥이 됐다. 몬드리안은 미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서 미국추상화협회를 만들고, 잭슨 폴락을 발탁하는 등 미국미술에 공헌했다.



몬드리안의 바람은 아직도 요원하지만 인류가 존재하는 한 조화를 향한 발걸음은 계속 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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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134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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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농노제는 1861년에 폐지됐으나 농토를 전혀 혹은 조금 밖에 소유하지 못한 대부분의 농민들은 지주들에게 얽매인 상태에 처해 있어 현실적으로 노예나 다름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농노제 시절보다 더 살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톨스토이는 전근대적이고 야만적이며 잔혹한 토지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동시에 토지를 잃고 수입도 절반으로 줄어듦에따라 농민들에게 토지를 양도하고 농장 경영을 포기하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결심이 확고한 것인지,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지, 과시용은 아닌지 고민하는 네흘류도프에게 자신을 투영한다. 
 


이어서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시중보다 싼 가격에 토지를 임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 못하는 농민들의 모습과 꾸즈민스꼬예보다 더 열악한 빠노보의 참상을 통해 자신의 행위가 정도의 차이일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그리고 과도한 노동을 착취 당하면서도 여전히 굶주리는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인구 증가에 의한 도시집중화와 그로인해 싼값에 팔리는 노동력을 꼬집으며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의 삶과 가난한 민중의 삶은 장소만 다를 뿐 똑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조물주가 하는 것이고 자신은 양심에 따라 조물주의 의지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평온에 이르는 길이라는 네흘류도프의 생각은 톨스토이를 그대로 대변한다.   




 
이 작품에서 독자를 내내 불편하게 하는 부분 중 하나는 청탁이다. 네흘류도프는 청탁을 넣어 마슬로바를 병원 간호 보조로 옮겨주고, 마슬로바로부터 부탁받은 죄수들의 요구를 인맥을 통해 해결하며, 유배 호송 도중 원칙에 반하는 면회를 한다. 일곱 달 동안이나 독방에 갇힌 여자의 무죄를 입증해도 변화가 없다가 청탁 한 번에 석방되는 행태는 당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억압과 착취에 고통받는 민중을 안타까워하며 부와 권력을 독식하는 기득권층의 부패와 부조리를 지적하지만 정작 네흘류도프 본인도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이용하여 특정 대상을 차별하고 있다. 물론 그가 자신의 위치를 선의에 입각해 사용했지만 공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선을 목적으로 한다면 모든 수단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딜레마가 여지없이 따라오는 부분이고, 이는 네흘류도프, 즉 톨스토이 자신의 모순된 점을 반추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여하튼 나는 톨스토이 본인이 귀족으로서 갖는 한계가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톨스토이는 네흘류도프의 이모부와 매형을 비롯한 몇몇 인물을 들어 겉으로는 위엄이 넘치지만 뒤에서는 아첨을 일삼고, 유사시에는 어느 편에라도 설 수 있는 처세술과 신념이라고는 자신의 부와 명예를 지키는 것 뿐인 사회 기득권층을 꼬집는다. 사회와 종교의 부조리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만 자신의 신분이 누리는 혜택을 포기할 수 없어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셀레닌의 방관자적 입장, 비행과 착취를 상위 계층과 비교하면서 자신은 상대적으로 약소하다며 정당성을 주장하는 변호사, 탄원서를 넣기도 전에 네흘류도프의 신분을 감안해 죄수의 유배를 취소시키겠다는 또뽀로프 등을 통해 만연해 있는 비리와 부정부패, 무능함과 부당함, 그리고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넘어서지 못하는 당시 지성인들을 묘사하고 있다. 
 


네흘류도프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끊임없이 제기되는 모순에 혼란스럽다. 박해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박해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야 하고, 법은 도둑질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공장주는 노동자, 지주는 농민을 수탈하며 합법적으로 도둑질을 일삼는다. 정작 몸을 쓰고 일을 하는 사람들은 참혹한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그들을 착복할 뿐 일을 하지 않는 부르주아와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은 그칠 줄을 모른다. 더욱 분개할만한 사실은 민중으로부터 거둬들인 세금을 이용해 민중을 억압한다는 것. 약탈, 살인, 쾌락 등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들과 활개를 치고 다니며 죄수들을 재판하는 사람들은 모두 똑같다. 
 


네흘류도프는 매형 이그나찌 니끼포로비치와의 대화를 통해 현재 법원과 재판은 계급적 이익을 옹호하고 지주 계급에 유리한 현행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행정적 무기일 뿐이며 다만 현재 상태의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도보 이송 도중 일사병으로 사망한 죄수들은, 무더위에 기차역까지 걸어서 이동하는 일상적인 명령서에 서명한 소장, 죄수들의 몸상태를 검진한 교도소 의사,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명령을 이행한 호송 장교 등 직접적으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들에 의해 모두 살해된 것이라고 일갈하면서, 인간에게 계급이 정해져 있으며 존중받지 않아도 괜찮은 인간이 있다는 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조직 안에서 직무와 의무가 인간애를 앞섰으며 사랑과 동정을 상실한 인간은 더없이 두려운 존재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집단 혹은 소수 지배 계층의 이익을 위해 개인(소외 계층)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앞서 저녁 만찬의 장면과 마찬가지로 호송 열차에서, 물건 취급을 받으며 호송되는 죄수와 삼등칸을 이용하는 소시민과 여행을 목적으로 일등칸을 이용하는 귀족의 모습은 또다시 대조를 이룬다.





소설 중반 이후에는 좀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정치범 시몬손은 대학을 중퇴하고 인민주의자가 되어 교사 신분으로 농촌에 뛰어들어 학생들과 농민들에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전파했고, 허위라고 판단한 것은 부정했다. 항상 스스로의 이성을 믿고 이성에 따라 결정했으며, 한번 결정한 일은 실행에 옮겼다. 상류 계급 출신으로 민중 운동에 투신하다가 동료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유배형에 처해진 마리야 빠블로브나는 봉사에 헌신하는 인물로서 마슬로바가 동경하는 대상이다. 유배에 동행하는 네흘류도프를 여행자라고 빈정거리는 정치범 노보드보로프, 농민 계명 운동에 투신해 소비조합과 생산조합을 만들었다가 체포당한 나바또프, 귀족의 청탁에 의해 편의와 혜택을 보는 마슬로바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곤드라찌예프 등 노동의 현장에서 혁명을 꿈꾸는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낸다. 네흘류도프는 이들과 대화하고 관찰하면서 자신이 추구해야할 방향을 짚어간다.  
 


네흘류도프가 호송 대열에 합류한 것은 마슬로바와 결혼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마슬로바가 그의 청혼을 계속 거부하는 와중에 연적이 등장하다. 평소 마리야와 시몬손은 종족 번식이나 성욕은 저급한 것이고 생명체에 대한 봉사가 인간의 고급 기능이라고 여겼다. 마슬로바는, 네흘류도프가 자신에게 청혼한 것은 관용과 지난날의 과오에 의한 의무감이고 시몬손은 자신의 현재 모습 그대로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두 남자 모두 사랑보다는 자신의 신념때문에 그녀와 결혼하려는 것이 전해진다. 시몬손은 네흘류도프에게 마슬로바의 처지를 개선시키고 싶어서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말한다. 네흘류도프는 마슬로바를 구원하는 것이 의무이므로 그녀가 행복하지는 선택을 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두 남자는 왜 자신의 신념을 마슬로바를 통해 이루려는가.  





 
네흘류도프는 석 달 동안 교도소를 드나들고 유배당한 죄수 호송에 동행함으로써 죄수들이 처한 상황을 직시한다. 자연스럽고 도덕적인 인간 생활의 모든 조건으로부터 소외 단절되고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한 그들은 비위생적인 환경에 의해 질병과 무자비한 구타에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무고하게 혹은 경범죄를 저지르고 흉악범들과 뒤섞여 오히려 더 부정적인 환경의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정부와 교도관으로부터 자신들은 온갖 유형의 잔인한 폭행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세뇌되고, 결과적으로 그들이 석방되면 사회에 더욱 악영향을 끼친다. 또한 보통 사람들까지 폭행당하고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는 죄수들의 처우를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보통의 사람들까지 정부의 비정한 방침에 세뇌당하는 꼴이다. 네흘류도프는 교도소가 마치 정부가 민중을 타락과 죄악으로 몰아넣기 위해 고안해 낸 시설과 제도같다고 생각한다. 즉 제도와 권력을 유지하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만한 인물들을 무조건 격리.제거시키는 데에 목적을 둔다는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이 부조리하고 모순덩어리인 세상을 뿌리뽑기 위해 인간이 해야할 것은 '용서'라는 해답을 찾아낸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죄짓지 않은 사람이 없고 따라서 남에게 벌을 주거나 남을 교화할 수 있는 사람도 없으며 무엇보다 사회와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사람들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합법적인 죄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타락상에도 불구하고 서로 동정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가 찾아낸 해답의 근거는 복음서, 신앙에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 대목에서 고통받는 죄수들을 향해 귀는 닫은 채로 복음서의 말씀만 읊어대는 영국인의 모습이 겹쳐졌다.  



  
네흘류도프는 게으르고 허영에 찬 귀족들이 아닌 신성한 노동의 힘으로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의 세계야말로 진정한 상류사회라고 생각하면서 조합을 만드는 조건으로 농민들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나눠준다. 톨스토이의 생각대로 농사를 짓는 이들이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러나 땅이 재물의 가치를 갖는 순간부터 땅은 더이상 땅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그는 신앙을 기반으로 애초에 땅은 인간이 소유할 수 없음을 주장하지만, 이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나는 네흘류도프의 생각이 철학적이고 이상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쉔보트나 변호사의 말에 일정부분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기 전까지 네흘류도프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선택(시베리아행 결심, 토지와 재산 포기)이 과연 잘한 일인지 의심하고, 그러한 의심에 대한 자책을 반복한다. 이는 톨스토이가 과거 확신하지 못했던 자신의 경험을 투영한 것이고, 사회 상위 계층의 이해와 참여, 그리고 제도적 확립의 어려움에서 오는 고민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적어도 이 소설에서 톨스토이의 공정성은 계급에 국한되어 있다는 느낌이 크다. 
네흘류도프가 정치범들 중에서 가장 호감을 느끼는 여자 죄수가 에밀리야 란쩨바인 이유는 최악의 조건에서 여성다운 살림 능력과 매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몬손은 사상의 활력에서 행동이 나오고 그것으로 행동을 결정하는 남성적인 성격의 인간이고 노보드보로프는 감정에서 비롯된 목표를 실현하거나 감정이 부추긴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사상의 활력을 이용하는 여성적 성격의 소유자라고 썼다. 그리고 마슬로바와의 결혼을 결심한 결정적 이유가 의무이자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주도권(남성, 귀족, 지주)을 쥐고 있는 권력자의 이기적인 횡포로 느껴진다.  
 


시대성의 한계를 감안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지만, 민중의 해방을 주장했던 톨스토이가 현대사회를 지켜봤다면, 그는 잔존하는 민족, 인종, 성 차별에 대해서도 인지했을지 궁금해진다.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가 결혼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마슬로바와 시몬손의 결혼도 단정할 수 없다.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 두 사람 모두 호된 경험을 통해 성장하고 깨우침을 얻었다. 그리고 이제 서른 남짓의 그들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 어떤 선택을 할지 독자는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그야말로 두 주인공에게도, 독자에게도 열린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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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싱 - 백인 행세하기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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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비난하기 전에 욕망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을 들여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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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바실리 칸딘스키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모스크바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박사 과정 재학 중 실태조사 여행에서 물질주의에 물들지 않은 소박한 러시아 민속예술에 눈을 뜨고 이후 모네의 전시회와 바그너의 오페라 등 당대 예술가들의 영향으로 전업작가로 방향을 전환한다.


그림은 소재나 주제에 좌우되는 것이 아닌 영혼의 상태, 정신성을 고양시킬 수 있을 때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독자적인 그림과 이론세계를 만들어갔다.


음악을 듣고 미술로 표현하는 그리기 방식은 요즘에 미술 교육이나 심리 치료에서 많이 활용되지만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술을 인간의 정신(영혼)으로 확장시킨 칸딘스키의 예술 세계는 당시로서는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 예술이 추구해야할 방향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칸딘스키와 말레비치의 다른점도 재미있다. 칸딘스키가 영혼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을 중요시 여기며 인상, 즉흥, 구성의 단계를 나눴다면 말레비치는 인간이 완전히 생략된 순수, 현실의 흔적이 사라진 새로운 세계를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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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카지미르 말레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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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는 나의 안목은 여전히 한참 모자란 듯하다.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을 실물로 본 적이 없으니 그림의 가치를 뭐라 말할 수 없지만 러시아에서는 1조원을 추산한다고 한다. 도대체 왜? 흰 바탕에 검은색 사각형을 그렸을 뿐인데.가난했던 말레비치가 돈을 아끼기 위해 다른 그림 위에 덧그린 그린이어서 갈라진 물감 사이로 밑에 그려진 그림의 색이 조금씩 보인다고 하는데, 책에 실린 사진으로는 아주 살짝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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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한밤중이 지나갔다. 절대주의는 모든 회화를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 속으로 집어넣는다. 검은 사각형은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것의 총합산인 동시에 남은 찌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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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비치의 이 말에서 그 가치를 짐작해봐야할까?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고전적 재현에 대한 거부, 가시적 현상과의 확고한 단절, 비가시적 본질에 대한 철저한 탐고의 선언 등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검은 사각형>을 통해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모든 현실적 요소를 거부했다는 말레비치의 의도를 납득함에도 불구하고 <검은 사각형>은 나에게 여전히 물음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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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 독재가 본격화되면서 1932년 사회주의 리얼리즘 선언으로 아방가르드 예술 전체를 공식적으로 부정 당하고, 아방가르드 리더였던 말레비치는 형식주의자로 낙인 찍혀 고초를 겪다가 불행하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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