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스 무하, 유혹하는 예술가 - 시대를 앞선 발상으로 아르누보 예술을 이끈 선구자의 생애와 작품
로잘린드 오르미스턴 지음, 김경애 옮김 / 씨네21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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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출신의 알폰스 무하는 오늘날 아르누보의 창시자이자 순수미술과 상업주의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체코 미술사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역사화 연작 <슬라브 서사시>를 비롯해 상업 광고 포스터와 장식(상업) 예술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활동한 예술가다. 1860년 체코 서부 보헤미안의 작은 마을 이반치체에서 태어나 20여년간 파리에서 작품 활동을  한 후 프라하에서숨을 거둔 무하의 삶은 그야말로 '무하 스타일'로 대변한다. 그리고 어린시절 고향 모라비아의 통제권을 장악하려는 투쟁을 목격하면서 정서적으로 모라비아 전통문화와 슬라브 애국주의, 종교 활동에 몰두하게 된다. 이러한 성향은 후일 <슬라스 서사시>를 그리는 데에 영향을 미친다. 








 
 
기어다니면서부터 목에 연필을 걸고 다녔다는 무하는 그림을 그릴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보이는 것은 캔버스요, 손에 잡히는 것이 그림 도구였으며, 할머니가 그의 선천적 재능을 지지했다고 하니 그는 화가가 될 운명이었던가 보다. 학교 수업을 제대로 이수하지 못해 학교를 떠난 무하가 아버지의 도움으로 간신히 사무직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었으나 열아홉 살에 지방법원을 그만두고, 우스티 나트 오를리치에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푼돈을 받았는데, 무하는 그 시기에 행복을 느꼈다고 한다. 비록 한때일지언정 살면서 그러한 경험이 삶을 윤택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무하를 보면서 새삼 깨닫는다.    



운명을 믿었던 무하는 뜻하지 않은 행운으로 공부할 기회가 생겼고, 후원 덕분에 불족함 없이 미술 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다. 스물아홉 살 되는 해, 후원자는 배움에만 치중하고 있는 무하를 자극하기 위해 후원을 중단했고, 이로인해 그는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돈 걱정 없는 학생에서 가난한 예술가로 추락한 처지가 되었다. 삽화 의뢰로 기본적인 생활비를 해결한 무하는 친구들의 도움과 마담 샬롯과의 만남으로 인맥을 확장해갔고, 이는 그에게 새로운 시작점이 되었다.   



1891년 3월, 아르맹 콜랭 출판사를 통해 무하의 삽화가 본격적으로 파리에 등장한다.  학계와 대중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으면서 로리외가 인쇄한 달력의 석판화 시리즈를 그리는데, 12개 별자리 삽화는 르네상스에 초점을 두고 풍부한 우화적 내용을 담고 있다. 작품이 발간된 후 각계 및 일반 대중에게 널리 보급되는데, 이로써 무하는 삽화가로 탄탄한 입지를 다지게 됨과 동시에 '무하 스타일'을 각인시킨다. 이후 포스터 삽화를 시작으로 다방면에서 능력을 발휘한 무하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고 '무하 스타일'은 그 자체로 브랜드명이 됐다.









1890년대는 색 재현의 발전으로 소비자 대상 출판물이 크게 증가했고, 아르누보 스타일에 대한 대중의 관심 덕분에 예술가들이 만든 석판 인쇄물이 대중적인 출판물 자주 등장했다. 다색 석판인쇄 분야가 발전하면서 포스터 재생산은 광고 등 대중매체의 주요 형태가 되었고, 이로인해 예술가에 대한 대중 인식의 폭을 넓힐수 있었다. 이 즈음에 무하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무하의 감각과 시대가 잘 맞아떨어진 것도 어떤 면에서는 운도 따랐다는 생각이 든다.  



포스터를 비롯한 무하의 작품들을 보면 단순히 아름답다거나 화려하게 그려낸 것이 아니라 작품의 성격이나 용도에 따라, 인물에 대한 상징적인 것들, 그리고 그의 재치와 위트, 센스가 그림 안에서 드러난다. 예를 들어 1896년 <동백꽃 여인> 포스터의 경우 여주인공의 연약함, 슬픔, 아픔을 인물 뿐만이 아니라 포스터 상단에 가시로 뒤엉킨 두 개의 심장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이 포스터는 배우 사라 베르나르가 무척 아끼는 작품 중 하나라고 한다). 무하의 포스터를 보면 예술을 상업성에 제대로 접목시켰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무하가 추구하는 상징주의와 신비주의 등이 그의 그림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공연 포스터는 말할 것도 없고 샴페인, 제과, 식품, 담배 등 상품 홍보 및 포장용 그림, 달력, 엽서 등 다양한 소모품들이 예술로서의 가치를 안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진한 빨간색, 금색, 갈색을 주로 사용하는 그의 그림은 화려함과 고풍스러움을 모두 보여주는데, 언뜻 그의 화려함은 클림트를 연상시키곤하지만 클림트의 그림보다는 명암이 짙고 친근함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사라 베르나르의 50세 생일에 그린 기념 포스터가 그렇다.  
 









저자는 무하가 운명을 믿었다고 했는데, 그의 생애를 따라가다보니 그가 믿은 건 자기 자신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해냈고,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았다. 공산정권의 억압에서도 무하의 작품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이 투쟁했다는 사실과 현재에도 체코 곳곳에 '무하 스타일'이 존재하고 있음은 이런저런 논란과 관계없이 충분한 가치가 있음을 방증한다.  




이 책 최고의 장점은 알폰스 무하의 작품과 작품 세계,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 그리고 비하인드 스토리 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점이다. 무하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1893년부터 1903년까지 한 작품 한 작품, 마치 도슨트의 해설을 들으며 그림을 보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알폰스 무하를 애정하는 독자라면 더할나위 없는 책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 지극히 사적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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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류 인구
엘리자베스 문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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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떠나 힘겹게 터를 닦아 40년째 살아온 콜로니 3245.12를 떠나 이주하라고 통보를 받은 개척민들. 그들은 심스 컴퍼니의 피고용인으로서 사업권을 잃은 컴퍼니가 정착민들에게 떠나라고 하면 떠날 수 밖에 없는 처지다. 칠순의 오필리아가 늙어서 쓸모가 없다는 이유로 이주비용을 대지 않겠다는 컴퍼니. 노령으로 공식적인 직업은 없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살림 정도, 더이상 출산을 할 수 었으니 노동력을 생산해 내지도 못하는 오필리아가 컴퍼니 입장에서는 무쓸모 존재다. 오필리아는 몰래 콜로니에 남기로 결심한다.  





 




주인공 오필리아는 시대가 요구하는 젊음, 생산성, 효율성, 남성성이 강조된 강한 힘과는 거리가 아주 먼 인물로 사회 구성원으로서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한 늙은 여성이다. 이렇게 보잘 것 없다고 여겼던 인물이 자유와 고독을 향해 과감한 모험을 단행한다. 컴퍼니에 의해 콜로니 생존인력을 전부 소개疏開시킨 행성에 홀로 남은 오필리아. 일생을 통틀어 처음 혼자가 된 그녀는 자신이 만든 비즈와 망토만을 두른 채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비어 있는 집들과 센터, 창고 등을 탐색하며 혼자만의 즐거움을 느낀다. 일흔의 나이에 처음 가져 본 자유. 오필리아의 일탈이 없었다면 평생동안 알지 못했을 그 자유를, 또다른 행성으로 강제 이주당한 이주민들은 죽을 때까지 느껴보지 못할 것이다. 규정을 어기지 않는 한. 어쩌면 '자유'라는 단어조차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오필리아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여성들에게 조언자 역할을 해왔다. 개척민 1세대로서 경험을 나누고, 갈등을 중재하며, 교육과 돌봄의 역량을 발휘하지만 이를 가치있게 여기는 사람들은 드물다. 이러한 오필리아의 능력은 괴동물이라 불리는 외계생명체의 등장에서부터 빛을 발한다. 또다른 이주민의 셔틀을 파괴하고 외모가 다른 괴동물의 출현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오필리아는 그들을 적敵의 위치에 놓지 않고 일단 대화를 시도한다. 이는 소설 중반 이후에 등장하는 조사단(학자)들이 외계생명체를 연구 대상으로만 지정하는 것과도 다르다. 오필리아는 이후 괴동물들에게 언어를 가르치고, 기술을 나누며, 출산과 갓 태어난 괴동물을 돌본다. 이러한 능력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지지하는 존재는 인간이 아닌 외계생명체다. 
 


그리고 오필리아가 괴동물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는 것처럼 괴동물 역시 오필리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교감을 통해 알아챈다. 이는 상대의 말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조사단에게 이질감을 느끼면서, 인간이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괴동물보다도 하지 않는다고 씁쓸해 하는 오필리아의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또한 인간과 괴동물들 간에 발생한 갈등의 원인을 찾고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며 이를 중재하는 역할은 깊은 혜안과 연륜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노령의 오필리아다. 현재에도 고령화 시대를 걱정하며 노인들을 돌봄의 대상으로만 여길 뿐 노령 세대의 역할에 관심을 두는 정책은 거의 전무하다. 인터넷 검색으로 우주선도 만들 수 있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는 무한 경쟁, 연애와 위로도 SNS로 가능한 세상에서 정서적 돌봄이나 연륜에 의지한 혜안이 폄하된지는 이미 오래다. 
 



자연의 순리대로 배를 채우기 위해 사냥을 하며 살생을 하는 괴동물과 금전적 손익을 따지며 개척민의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인간들. 일차원적인 비교라고 치부할 수 있으나 돌이켜보면 경제적 식민 시대가 이어지고 있는 지금 세계의 상황과 크게 다르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조사단 사람들이 괴동물의 사회 조직에서의 연대나 관계보다는 어떤 계급 구조를 가졌는지에 관심을 갖고, 지적 수준이 낮은 자생종의 둥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여기며, 파괴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술을 괴동물과 나누지 않겠다는 지구인, 그리고 오필리아가 어린시절 자신의 배움의 열의와 배우는 속도가 빠르자 화를 냈던 부모님을 떠올리면서 괴동물에게 어린 자신을, 지금의 자신에게 괴동물을 대입시키는 모습은, 같은 선상에 있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괴동물들 사회에서 둥지수호자는 새끼들이 모든 것에 관해 최대한 많이 배우기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태세를 갖추기를 바란다. 나쁜 둥지수호자는 새끼들이 계속 같은 것에 만족하게 만들어 그들이 안온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오필리아는 자신이, 그리고 자신의 부모들이 나쁜 둥지수호자였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어린 시절의 호기심과 열의를 복종이라는 틀에 가둬놓고 관습에 맞춰진 삶을 살도록 강요 아닌 강요를 하고 있다. 대다수의 인간은 나쁜 둥지수호자인 셈이다.  
 



필요와 불필요, 쓸모와 무쓸모, 자격과 무자격, 인간과 비인간, 정상과 비정상, 무능과 유능의 기준은 무엇이며 누가 정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각종 차별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정말 괜찮은 것인가? 이해와 존중이 결핍된 사회에서 우리가 이루려는 것, 그리고 가야할 방향을 '늙은 여자' 오필리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 출판사 지원도서, 지극히 사적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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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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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p214
그들은 어른의 삶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나는 내 삶에 의미가 있다는 희미한 분위기라도 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콜럼비아대학 순수예술 석사과정에 있는 대학원생 '나'는 문예창작 합평 수업에서 교수와 동료들에게 혹평을 받던 중 유일하게 다른 의견을 제시하며 지지해주는 빌리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의 합평 제출작을 다시 꼼꼼히 읽어본 후 빌리의 재능을 동경한다. 이 일을 계기로 급속히 가까워진 두 사람. '나'는 바텐더로 일하며 바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빌리에게 자신의 집에서 동거를 제안하고, 거절하는 빌리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이상적일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의 동거는 점점 '나'의 바람과는 다른 모습을 띠어 가고 있었다. 









소설은 중년의 '나'가 1996년부터 97년에 이르기까지 채 2년이 되지 않는 시간 동안 폭풍처럼 지나온 성장통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어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전인 소설 초반부에 나는 이미 이 소설에 훅 이입되어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에게 이입되어 있던 것이겠지만. 어느 집단 혹은 조직에 한 명 쯤은 있을듯한 인물 '나'는 그 시절 내 모습과 많이 흡사하다(심지어 그가 회상하는 그 시기에 나와 주인공의 나이도 비슷하다). 상류층이라고 하기에는 경제 능력이 부족하고, 그러나 가난하다고 할 수 없는, 경제적 이점과 부모의 적당한 관심을 받고 자란, 한마디로 큰 부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크게 부족한 것 없이 자란 부류에 속해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어느 집단이든 제대로 속하지 않은 채 경계에 머무르는 불청객을 자처하고 남들에게 속내를 잘 내보이지 않으며 적당한 선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나는 주인공 화자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나'가 그러한 모습의 스스로를 불편해 한다면, 나는 자발적이었다는 차이는 있지만.  





작가라면 인생에 있어 결핍과 고통이 따라와야 하고 그로인해 남다른 예술적 감성이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나'에게 빌리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작가 지망생이 아닐 수 없다. 제대로 대학을 다니지 않았고, 중서부 소도시 출신으로서 바텐더로 일하며 생계를 근근이 이어가고 심지어 남다른 재능까지 갖춘 빌리는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다. 모든 것을 양보하고 배려하면 영혼의 동반자 관계를 영원히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십 년이 넘는 성장 배경의 차이는 불과 몇 달 만에 두 사람의 사이를 벌려놓는다.  


비록 대고모의 아파트를 불법 전대로 사용하고 있으나 제법 큰 평수의 아파트에 기거하고 학비와 생활비는 아버지로부터 지원받아 경제적 여유가 있는 '나'는, 지적 수준과 예술적 교양을 갖추고 있고 민주당을 지지하며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다. 반면 스스로 생계와 학비를 모두 책임쳐야하고 '나'의 제안이 아니었다면 경제적 이유로 학업을 중단할 위기에 처해 있었으나 출중한 외모와 뛰어난 사교성, 그리고 남다른 예술적 재능을 가진 빌리는 공화당을 지지하고 성소수자를 혐오하며 적당한 처세술을 갖춘, 마초적 성향이 강한 남성이다.    


자기에게 없는 작가적 요건을 두루 갖췄다고 여긴 빌리와 소울메이트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나'의 기대는 시간이 흐를수록 어긋난다. 여러 면에서 비교할수록 커져가는 좌절감과 무엇보다 습작에서 오는 열패감은 '나'의 일탈을 부추기며 일상을 흔드는 지경에 이른다. 사과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여겼던 작은 사건이 그 둘을 갈라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나'는 빌리가 왜 그토록 싸늘해졌는지 납득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차하리만치 빌리에게 벗어나지 못하는 '나'는 스스로를 밑바닥까지 끌어내리고 만다.  




이처럼 전혀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단지 작가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젊은이들의 성장통에 멈추지 않는다. 소도시의 가난한 출신으로서 상류층을 비난하면서도 보수당을 지지하며 사회적 약자층을 혐오하는 빌리의 모습은 우리나라 선거철에서도 볼 수 있다. 사회 기득권층이 주류를 이루는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경제적 약자들이 다수를 이룬다. 진보당이라고 자처하는 정치인들이 복지에 대해 언급하면 세금 인상과 포퓰리즘을 운운하며 목에 핏대를 세우는 계층 또한 이들이다. 부동산세나 가산세 등 자신들에게 전혀 해당 사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또한 빌리가 강한 남성성을 과시하듯 내세우며 소수자들을 비하하고, 더불어 섬세하고 예민한 '나'를 조롱거리로 삼으며 냉소를 던지는 모습 역시 우리 사회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타고난 사교성과 외모와 재능으로 빌리 역시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는 '나'의 말은 어떤가? 심지어 '나'가 자신의 부족하지 않은 경제력에 대해 예술가로서 죄책감을 가졌다면, 빌리는 자신의 타고난 이점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은 맹점이기도 하다. 이렇듯 소설은 두 인물을 통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과 모순을 담아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부분은 소설의 초반부였다. 스무 쪽이 넘어가도록 나는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가 여성이라고 단정했다(그래서 더 이입했었던 것이지도 모르고). 이 무슨 고정관념인가. 두 주인공이 남성인 소설에서 감정선을 이토록 섬세하고 면밀하게 다룬 작품을 그동안 만나본 적이 있었나싶다.  



그렇다면 소설의 결말은 어떨까. 스물네 살의 '나'는 자신들의 덧없는 청춘을 언젠가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두 사람은 격동같았던 두 해의 청춘을 그리워할까? 책을 덮은 후 여운이 꽤 오랫동안 남아있었고, 며칠이 지난 지금도 책 표지를 보면 그 쓸쓸함이 잔물결처럼 가슴을 툭툭 건드린다. 한 치의 아쉬움이 없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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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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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독 당시 정서적으로 힘들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비교적 초기작에 해당하는 이 작품을 다시 읽음으로써 내가 기억하는 하루키를 만나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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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결정
오가와 요코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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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소멸과 기억의 상실이 당연한 세상(섬)에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소설가가 주인공이라는 아이러니로 시작한다. 소멸하는 대상은 저절로 사라지거나 공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소멸의 순간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스스로 소멸의 대상을 버린다. 그것이 신체의 일부일지라도. 기억 사냥을 하는 비밀 경찰은 혹시라도 남아있을 소멸의 흔적만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소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도 사냥한다. 그들이 기억 사냥을 하는 이유는 지배층 입장에서 모든 것이 차례대로 사라지는 이 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불상사이자 부조리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든 소멸되는 즉시 기억도 사라진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소멸을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페리 할아버지의 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무언가가 소멸되고 더불어 추억과 기억까지 사라지면서 마음의 밀도도 낮아졌기에 균형이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말에 잠시 책을 덮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소멸되지 않았으니 어머니는 기억할 수 있지만, 어머니와의 추억이 깃든 물건은 기억하지 못하기에 그 서글픔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라니... .


어딘가 석연치 않지만 소멸이 당연한 세상의 이치라고 받아들이는 '나'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 계기는 출판사 편집자 R의 고백이다. 어머니처럼 '소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인 R을 도와주기로 결심한 '나'는 아버지의 서고에 은신처를 마련해 주고, 이때 도움을 주었던 페리 할아버지를 포함한 세 사람은 끈끈한 연대를 갖게 된다.


사진을 소멸하려고 하는 '나'를 말리는 R. 그는 '나'에게 기억에 구멍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진을 태우면 안 된다고 하지만, '나'는 사진을 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립지도, 가슴이 욱신거리도 않다고 대답하면서 사진은 그냥 종이 한 장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사진이 무엇인지조차 잊어버린다. 그런데 사진에 깃든 추억을 기억하지 못하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나'의 말처럼 사진은 종이 한 장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물의 소멸이 아닌 추억의 소멸을 더 두려워하는 것일 테고.


어느날 비밀 경찰이 거칠게 가택 수색을 마치고 아무 성과없이 돌아간 뒤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그것이 두려움이 아닌 것은 분명한데 무슨 감정인지 본인도 알지 못하는 그녀에게, R은 마음이 자기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후 지진으로 인해 어머니가 남겨 놓은 물건들을 찾아낸 '나'. 이 물건들로 인해 소멸된 것들을 잠시 기억해내는 듯 하지만 그때 뿐이다. 자연스럽게 희미해지는 망각은 소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소멸은 기억을 뿌리째 뽑아버린다면, 기억은 여운이 남고 설령 없어지더라도 마음이 당시의 감정을 간직한다. 페리 할아버지가 R이 선물한 오르골의 태엽을 감을 때 마다 기대한 새로운 발견이란, 이런 여운이 담긴 마음과 그 마음에 대한 기억의 끈이 아니었을까.





이 소설의 특이점 하나는 액자식 구성이다.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마치 '나'가 쓰는 소설은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듯 두 주인공은 같은 선상에 위치해 있다. '나'가 쓰는 소설의 주인공인 목소리를 잃어가는 타자수는 유일한 소통의 도구인 타자기가 망가진다. 타자 선생은 남은 타자기가 쌓여 있는 교회의 기계실로 그녀를 데려가면서, 메모지와 펜과 고장난 타자기는 무시한 채 그녀에게 새로운 타자기가 마음에 드냐고 묻는다. 타자수는 자신의 고장난 타자기가 내내 마음이 쓰이고, 타자기를 고쳐달라는 몸짓을 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타자기가 고장난 게 아니라고, 네 목소리는 몽땅 이 타자기에 갇혀있으며 그 타자기는 역할을 다하고 봉인된 것이라고, 그래서 그곳은 목소리의 무덤이며 오늘로 네 목소리도 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진 무서운 그의 말. "너는 말할 필요도, 목소리를 낼 필요도 없으며 드디어 넌 나만의 것이 되었다."


'나'가 쓴 소설에서는 목소리가 있는 한 통제는 불가능함을 얘기한다. 목소리도, 타자기도 잃은 채 시계탑에 갇힌 타자수는 어느 순간 자신의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해 깜짝 놀란다. 이후 타자 선생은 그녀를 제 마음대로 다루고, 타자수는 자신을 지배하는 타자 선생의 목소리만 인지할 뿐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제 그녀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것은 그녀 자신이 아닌 타자 선생이다. 이는 존재의 퇴화를 의미한다. 그런데 어느날 갇혀 있는 기계실 문 밖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오고, 안에 있는 타자수는 나가기 위해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 갈등한다. 그러나 바깥 세상으로 나갈 용기가 없는 그녀는 그 발소리의 주인공이 돌아가기만을 바란다. 또다시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뺏으려는 타자 선생이 시계탑으로 찾아오는 횟수가 줄어들고, 이에 타자수는 그의 외면을 두려워한다. 목소리를 잃는 다는 것은 복종과 같은 의미다. 작가가 정작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액자 소설에 담겨있다.


'나'는 소설이 소멸된 후 자신이 쓴 주인공처럼 이직을 하게 되는데, 바로 타자수다. 그러나 소설이 소멸됨으로써 정작 그녀는 자신이 쓴 소설 속 주인공의 직업이 타자수였음을 기억하지 못한다. 언어와 문자가 소멸되면 어떻게 될까라는 의구심도 들기 전에 더한 엔딩이 기다리고 있다. 그동안 절망적 장치로 사용된 아이러니가 마지막에서는 희망으로 전환한다. 살아남은 '기억을 잃지 않는 자들'의 귀환,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다.





이 소설은 우선 기존의 다양한 문학 작품들과 역사적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그리고 유대인을 숨겨주거나 탈출을 도운 시민들을 학살했던 나치와 은신처에서 소멸된 기억과 오른손을 부여잡으며 원고를 쓰는 주인공을 통해 <안네의 일기>를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섬'이라는 제한적 공간은 조지 오웰의 <1984>를, 도서관과 책을 불태우고 강압적으로 기억을 제어하는 지배층은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여타 디스토피아 소설들과 다른 이 소설의 강점은 서정성이다. 황폐하고 거칠어야할 것 같은 공간을 바다, 산, 강, 꽃, 눈 등 자연의 소소한 아름다움으로 채웠다. 그리고 기존의 디스토피아를 다룬 소설들이 짧게나마 디스토피아 이전의 시절을 그렸다면, 이 섬은 원래 그런 곳이다. 그래서 소멸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소멸이 새로운 희망이 된 걸까. 마치 태초에 생명체가 처음 생겨나듯. 소설의 마지막은 희망을 말하는데, 독자의 감정은 더없이 슬프다.
  


이 소설에서 은신처에 숨은 R과 '나'가 벽을 사이에 두고 눈이 오는 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부분과 페리 할아버지의 생일상에 앉아서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가는 부분이 있는데, 나는 두 장면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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