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 호모 루덴스를 위한 철학사
정낙림 지음 / 책세상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은 3부로 구성된다.

1부는 고대의 놀이적 사유 유형을 헤라클레이토스와 플라톤을 통해 살펴본다.

2부는 놀이의 근대적 사유 유형을 칸트, 실러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3부는 놀이의 현대적 사유 유형을 탐색해 본다.

 

[정리]


<들어가기> 

놀이는 인간의 본성 (노동과 놀이의 차이)

1) 노동은 기본적으로 외적 강요가 전제되고, 놀이는 생존을 위한 물질적 보상보다는 개인의 명예이다.

2) 노동은 자신의 먹적이나 의도를 대상에 실현하는 인간의 행위이다. 그러나 놀이는 놀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예술가의 행위는 놀이의 본질을 실현하는 대표적인 사례)

3) 노동은 효율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결과의 예츨 가능성이 중요하다. 놀이는 결과를 예측하기가 어렵다.

4) 놀이의 열광은 꿈과 상상력의 산물이다.

5) 놀이는 사회적 활동이다.


철학자들이 놀이에서 발견한 가치

1) 놀이에서 중요한 것은 주체나 중심이 아니라 놀이하는 과정 자체이다.

2) 놀이는 존재와 생상에 관한 전통 형이상학의 좌표를 전도한다.

3) 놀이에 담긴 생성과 우연, 순가의 속성은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의 뿌리가 된다.'


<1부 놀이의 고대적 사유 유형>

헤라클레이토스가 정의한 단편 B52는 관점에 따라 번역이 달라져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대립자들의 배후에 대림과 조화를 가능하게 하는 내재적 법칙이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이것을 로고스라 일컫는다.) 여러 의견을 종합해 보면 '삶은 하나의 규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진행되지 않는 놀아움의 연속이다. 삶의 놀라움은 아이가 놀이에서 왕이 되고 왕국의 통치권자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둔하고 어리석은 어른들을 비판한다. 플라톤은 놀이가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윤리적으로 매우 부정적으로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세 살부터 여섯 살까지 유아의 영혼에 적절한 교육 수단임을 인정한다. 아이들이 법을 지키는 놀이를 하게 되면 준법적이고 진지한 사람으로 성장하지만, 반대로 범을 지키지 않는 놀이에 익숙한 아이들은 결코 그런 사람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놀이와 관련한 고대 철학자의 이해는 플라통이 전형적으로 잘 보여주며,그가 놀이를 대하는 태도는 이후 오랫동안 서양 철학사를 지배한다.

p31

무슨 일에서든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는 바로 그걸 어릴 적 부터 줄곧 수련해야만 하는데, 이는 그일에 적합한 각각의 것들로 놀이를 할 때나 진지하게 임할 때나 그리해야만 한다고 저는 주장합니다. (플라톤)


 

<2부 근대 철학에서의 놀이 이해>

칸트가 파악하는 놀이는 우연적이며 특수하고, 그 자체로 어떠한 법칙에 종속되어 있지도 않으며, 어떠한 목적도 지향하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서 법칙과 목적을 담아내는 활동이다. 여기에서 많은 철학자들은 칸트의 놀이 개념이 인식능력, 즉 상상력과 지성, 상상력과 이성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기 때문에 놀이가 수단적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비판한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능력인 취미는 상상력과 지성의 조화와 일치에서 된다. 또한 칸트는 놀이개념의 속성이 목적에서 자유롭고 어떠한 의도나 강제로부터도 자유롭다고 설명한다.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롭고 우연적 일치를 놀이라고 한다.

놀이는 상상력이 지닌 잡다함과 무질서를 지서의 규칙에 일치시킴으로써 미적 판단의 보편성을 가능하게 한다.

p127

칸트에 따르면 훈육이 필요한 이유는 태어날 때부터 안고 있는 인간의 '방종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성벽 탓이다. 즉 방종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선호는 인간이 버려야만 할 본능이며, 이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은 '이성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게 하는 것이다.

즉 칸트에서 인간의 방종으로서의 자유는 동물적 야만성의 핵심이다.

칸트는 교육적인 측면에서 놀이는 엄격하게 제한되어야하며 수단이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칸트는 일과 놀이의 가치를 분명히 구분한다.

p129

일을 하면서 전심전력하여 몰두하는 것 자체는 우리에게 즐거운 것도 아니고 편안한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어던 목적을 위해서 일을 실행에 옮긴다. 반면에 놀이를 하면서 전심전력하여 몰두하는 것 자체는 어떠한 목적도 지향하지 않ㅇ으며 우리에게 즐겁고 편안한 것이다.

칸트의 놀이 개념은 아이들의 신체단련과 휴식의 방편 이상의 의미가 없다. 칸느의 이러한 놀이개념은 근대적 사유 틀 속에 있으며 그 한계도 분명하다. 칸트에 이론에 대해 니체는 비판한다. 니체는 칸트가 놓친 예술가의 창작과정에 시선을 집중하고, 세계와 예술가의 관계 맺음을 놀이로 설명한다. 또한 우리의 사고란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는 매우 정교하게 서로 얽힌 놀이일 뿐이라고 말하다. 더불어 실러는 말한다.

p159

인간은 오로지 아름다움과 더불어 놀이해야 하며, 오직 아름다움과 더불어서만 놀이해야 한다. 간략하게 말하면, 인간은 오직 그가 그 말의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일 경우에만 놀이하며, 놀이할 경우에만 온전한 인간이다.

곧 놀이(충동)은 인간성의 전체성 회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3부 현대철학에서의 놀이 이해>

현대에 놀이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심 개념으로 자리 잡는다.

디지털 시대의 놀이는 더욱 빛난다,. 디지털 문화에서 중심은 끊임없이 생서되고 이동하며 사멸한다. "모든 것은 흐른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언명은 디지털 시대의 정신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현대의 놀이와 곤련한 철학적 이해는 니체에서 출발한다. 니체는 놀이를 철학의 제한적이 영역으로 수용하고 설명하는 여느 철학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모든 철학적 주장을 놀이로 설명한다.

니체는 세계를 '스스로 분만하는 에술작품'이라고, 더 극단적으로는 '세계 자체가 예술'이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예술은 더 이상 연주회나 전람회에 갇혀 있기를 거부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생성, 우연, 순간, 차이, 웃음, 춤 등에 가치를 둔다. 이러한 가지의

바탕에는 놀이의 정신이 있다.

p205

아이의 놀이가 잘 보여주듯이 자기 극복은 낡은 서판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순간과 우연의 긍정에서, 그리고 모든 순간에 자기를 뛰어넘어 창조하는 행위에서 현실화 한다. 놀이하는 아이의 '새로운 출발'은 세계사의 새로운 시작, 가치의 전도, 즉 니힐리즘 국복의 출발을 뜻한다.

p207

니체 놀이철학의 극치는 '힘을 향한 의지' '영원회귀' '운명애' 등과 같은 그의 핵심 사유를 놀이로 설명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때 놀이는 세계와 삶에 대한 가치를 전면적으로 전환하는 동시에 니힐리즘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는 등대 구실을 한다. 니체의 놀이철학은

우리에게 순간과 우연의 긍정을, 그리고 운명의 사랑을 알려준다. 니체는 문화의 건강함은 바로 놀이를 받아들이는 감수성에 따른다고 본다.

가다머는 놀이와 예술을 같은 선상에서 놓고 있는데, 놀이와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에서 공통적으로 더 본질적인 것, 즉 주체를 놀이하는 사람이 아니고, 놀이하는 사람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표현은 미적 존재의 본질에 속하고, 이 표현은 놀이이며, 관객은 놀이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작과 끝 (목적)이 아니라 경과 또는 진행됨이다. 가다며가 볼 때 동물의 놀이든 인간의 놀이든 모두 자기펴현이다. 특히 인간의 놀이는 '무엇에 대한' 표현이면서 동시에 '누구를 위한' 표현일 수도 있는데, 이러한 놀이가 바로 예술놀이이다.

핑크의 실존 범주로서의 놀이를 살펴보면 놀이는 다른 실존 범주인 죽음, 노동, 지배, 사랑과 같은 무게를 지닌다.  핑크는 놀이를 '놀이세계'라는 개념으로 통합한다. 놀이는 재미를 추구하고, 의미가 있으며, 공동체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규칙이 있고 도구가 용된다. 따라서 놀이세계는 현실세계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p294

놀이는 의무, 진지함, 목적, 의미에서 일탈하는 것으로 보이고 선.악의 경계마저 모호하게 하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지만, 삶의 통일성을 위해 빠질 수 없는 실존 범주이다. 그래서 핑크는 놀이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진지함을 놀이하며, 진정성을 놀이하며, 현실성을 놀이한다.

우리는 노동과 토쟁을 놀이하며, 사랑과 죽음을 놀이한다. 심지어 우리는 놀이조차 놀이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활동의 전 과정을 '언어놀이'라고 일컫는다. 간의 삶이란 직간접으로 언어를 배개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삶의 조건과 과정도 언어놀이의 형식을 취한다고 주장한다. 어놀이에서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하나의 규칙을 그저 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맥락을 이해하고 생한다는 의미이다. 즉, 놀이의 규칙은 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시작되고, 수정되고, 변한다. 그래서 놀이의 규칙은 삶의 양식의 한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p329

이간이 언어를 습득하고 사용한다는 것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질서, 그리고 공동체의 규범을 배우고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것은 문화의 뿌리가 언어놀이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뜻한다. (...) 언어의 의미는 언어놀이를 통해서 획득되며, 언어놀이는 인간 삶의 형식 속에서 이루어진다. 결국 문화는 삶의 형식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언어놀이의 산물이다.


<4부 탈현대와 놀이의 질주 - 현대예술과 놀이>

예술과 관련하여 니체가 주목한 것은 '도취'이다. 인간이 자신이 바라는 것을 구현하고자 할 때, 언제나 도취가 함께한다. 도취가 없다면 인간은 감흥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니체는 예술생리학에서 예술은 천부적으로 비범한 천재가 작품을 구현함으로써 감상자에게 감동을 준다는 칸트식의 근대적 예술관을 거부한다. 예술생리학에서 예술은 장르, 재로, 양식에 따라 구분되지 않는다. 근대에 예술은 대부분의 인간을 관람자와 소비자의 지위로 묶어두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수용자의 위치에 머물렀다.

p357

예술생리학은 예술을 도취와 힘을 향한 의지의 차원에서 정의 내림으로써 예술을 확장한다, 자신의 힘을 극대화하는 유.무형의 활동 자체를 예술로 본다면, 이론적으로 모든 인간은 예술가가 되고 모든 것은 예술이 되는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즉 니체에게 예술가란 '자기 자신을 조형하는 자'이다. (...) 인간 개개인에게 잠자고 있는 창조의 능력을 일꺠움으로써, 외부에서 주어진 가치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치의 주체임을 확인 시킨다. 세계를 자신의 눈으로 인식하고, 자신의 힘을 세계에 투사하여 세계를 자신의 방식으로 조형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삶의 과정이자 예술 창작의 과정이다. 삶을 예술작품을 창작하듯 살아가는 것, 이것이 니체가 궁극적으로 희망하는 삶이다.

플럭서스 운동의 특징은 360쪽의 선언문에 잘 드러나 있다.

부르주아적 질병의 세계, 즉 '지식인적인' 전문적이고 상업화한 문화를 제거하라, 죽은 예술,모방, 인공예술, 추상예술, 환상주의 예술, 수학예술의 세계를 제거하라!/ 예술에서 혁명적인 흐름과 조류를 촉진하라. 살아있는 예술, 반-예술을 촉진하라. 비평가, 딜레탕트를, 전문가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이해될 수 있는 비예술실재를 촉진하라./문화적.사회적. 정치적 혁명가들의 핵심집단을 통일된 전선과 행동으로 융합하라.

플럭서스는 삶에서 소외되는 예술활동 일체를 부정한다. 예술활동의 과정 자체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플럭서스는 실험과 창조의 놀이로 파악한다. 플럭서스가 추구하는 바는 모두 놀이의 정신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오늘날 우리의 관심을 끄는 디지털 예술의 유형은 바이오 기술을 웅용한 터치스크린과 관객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 기술을 적극 활용한다. 이는 작품과 관람자의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디지털 예술의 특징은 이러한 고전적 예술작품의 원본성과 물질성의 개념을 해체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예술행위는 온갖 절망스럽고 부정적인 삶에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을 조형하는 것, 자신을 조형한다는 것은 자기를 긍정하고 동시에 자기를 국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술과 삶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책을 덮으면서...

결국 인간의 본질은 놀이에서 시작해서 사는 동안 다양한 형태로 놀이를 바탕으로 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그 놀이에는 언어를 기본으로 철학,예술까지 즐거움과 호기심을 탐닉하는 놀이를 추구하는 심리로 발전을 거듭한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고 있는 교육 등 지식의 축적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을 다른 각도로 바꾼다면 좀더 긍정적이고 효율적으로 전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아직도 현대미술이나 여러 디지털 예술들은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가슴으로 느끼는 감흥까지는 아직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내가 단순 관람자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든다.


책을 읽는동안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었고, 반복 기술되는 부분이 있어서 지루한 면도 없지 않았지만 니체와 비트겐슈타인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일면 반갑기도 했다.

과다한 배움에 지친, 혹은 강요에 의한 지식 축적에 지치신 분들 일독해 보시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