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어디에 있나요?
에이드리언 차이콥스키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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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을 잃고 이름이 '찰스'에서 '언un찰스'가 된 시종 로봇 하나가 새 주인을 찾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한다. 그는 대인 봉사에 특화된 정교한 서비스 모델로서 인간을 섬기게끔 설계된 로봇이다. 주인으로 섬길 자의 조건은 오직 하나, 인간이기만하면 된다. 그런데 이 인간 한 명을 발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언찰스가 처음으로 보게 된 장원 밖 세상은 폐허다. 살아 움직이는 것은 거의 없고, 사방은 파괴의 흔적과 오염물질과 쓰레기산으로 둘러싸야 있다. 지구의 모든 지역은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쇠퇴했고, 사회적 붕괴를 맞이했다. 인류는 이제 선도 악도 남아 있지 않다. 인간은 사라지고,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존재했던 로봇들만 남았다. 세상은 종말을 맞았는데 로봇들은 그들대로 취업난으로 경쟁 중이다. 마치 인간이 그래왔던 것처럼, 그들 역시 누군가는 살아남고 누군가는 도태되어 사장된다. 그리고 인류가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그 잘못된 길을, 로봇들은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타자를 적대시하고, 승리를 위해 경쟁자를 짓밟고, 폭력에 광분하며, 아무런 명분 없이 전쟁 그 자체가 목적인 전쟁을 자행하는 파괴적인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   


로봇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자신이 로봇임을 반복적으로 각성하는 기계 언찰스. 감정에 충실하고 직감이 뛰어나며 존재의 의미에 집착하는 인간 여성 더 윙크. 전혀 다른 특성과 기질을 가진 두 개체의 동행. 만약 로봇에게 스스로의 미래를 선택할 의지와 자율권이 있고, 생각을 통해 판단을 하고, 감정을 느끼며 타자를 향한 연민의 손을 내밀 줄 안다면, 그는 로봇일까, 사람일까. 점점 더 정교하고 인간에 가까운 AI를 만들겠다는 인간의 열망은 혁명일까, 파국일까.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인간이 설계한 AI가 정의를 지키기 위해 인간을 단죄하는 세상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는가. 갈수록 진화해가는 AI 앞에서 우리는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가. 


소설은 인류 종말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장원이나 수도원과 비슷하게 그려지는 도서관, 성직자처럼 느껴지는 사서 로봇 등 중세 시대를 연상케 한다.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류사를 빗대어 지금의 우리 모습을 은유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자의식과 자율, 지식과 기록, 권리와 의무, 사유와 고독, 이타와 연대, 이기와 탐욕, 폭력과 파괴, 기억과 망각, 신神과 종교, 신을 자처하며 군과 사법부를 장악해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는 정부, 정의正義의 정의定義, 종단에는 이르러야할 공존 등 소설은 로봇을 통해 인간을 반추하고 있다. SF소설이지만 철학소설로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의미있게 읽힌 지점은 언찰스와 더 윙크의 '연결'이다. 그 둘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끊임없이 소통을 하는데, 그들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좀처럼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한다. 그럼에도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다. 더 윙크는 진실을, 언찰스는 자신을 받아줄 인간 주인을 찾기 위해 하염없이 헤매지만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하는데, 그와중에도 서로에게 대화를 시도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상대를 이해하는 것보다, 이해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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