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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통 ㅣ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9
정용준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5월
평점 :
인하
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슬픔도 분노도 느끼지 못하도록 훈련했다. 그 감정이 지나고 나서야 자신이 슬펐다는 것을, 외로웠다는 것을, 화가 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
동아
실망이 두려워 소망을 갖지 않고, 헤어짐이 두려워 만남을 피하는 사람. 만나면 또 만나고 싶은 끝없는 개미지옥이 지긋지긋한 사람. 소망을 품자마자 시작되는 결핍과 초조가 지레 두려워 혼자 있기를 택하는 사람. 그래서 상대가 누가됐든 그들이 떠나기 전에 먼저 다 떠나보내는 사람. 그러나 외로움에, 외로움을 달리는 일에, 감정을 숨기고 진심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말을 꼬아하는 것에, 지쳤다.
얻기도 전에 잃을 것을 두려워하고, 기쁨을 온전히 느껴볼 새도 없이 불행을 두려워한다. 사랑이 오면 그 사랑이 떠날까 불안하고, 좋은 글을 쓰지 못할 바에도 안 쓰는 것을 택하는 비겁함이 수치스러워 회피하는 사람.

'겨울통'은 한 번 걸리면 환부가 사라지는 병이다. 전신 겨울통에 걸리면 온몸이, 부분 겨울통에 걸리면 신체의 일부가 녹듯이 사라지고 만다. 하지에 발병하고 동지에 녹아내리는 병病.
한순간에 눈독듯 사라진다는 것, 어쩌면 단절이 자연스러워진 세상에서 사라짐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입을 닫아버린 아이에게서 말言을 끄집어내는 것, 누군가의 웃음에 동화되고 그를 위해 애쓰는 것, 상대의 안심에 안도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사랑이리라.
기적을 바라며 발버둥치는 인하의 노력이 무모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랑 때문이다. 동아에 대한 사랑, 그리고 돌아오리라는 믿음. 독자는 어느새 인하와 함께 마음을 맞추며 그를 응원하게 된다. 문득, 상대에게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드러날 수밖에 없으니까.
사실 정용준 작가의 소설을 대부분 좋아하지만 그중 가장 애정하는 작품이 있다. 그 소설만큼이나 『겨울통』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소설의 결말, 저절로 지어지는 미소. 눈밭에서 사랑하는 이와 포옹하며 상큼한 에이드 한 잔을 마시는 기분이 이러하려나.
※ 도서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