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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물리학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3월
평점 :
이야기를 수집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다른 생명체의 기억 속에 들어갈 수 있는 '나' 게오르기가 1913년생인 할아버지의 기억을 좇는 데에서부터 시작하는 소설은 1990년대 불가리아의 현대사와 냉전 시대를 지나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속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시대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인생이 던지는 아이러니.
언어의 본질.
언어 혹은 이름을 잃는 슬픔.
세기가 바뀌어도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전쟁의 참혹함.
시대가 가져다준 비극.
강자(침락자)에 의해 밀려나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조롱, 그리고 모두가 가져야할 연민과 애도의 부재.
생기를 잃고 소멸해가는 것들의 쓸쓸함.
우리의 일상에서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늘 가까이 존재하는 죽음.
자연이 인간에게 전하는 종말론적 메시지.

소설의 중요 모티브는 기억과 공감(이입), 그리고 유기遺棄이다.
특히 미노타우로스를 빗대어 유기, 차별, 학대에 대해 집중적으로 서술한다. 이것은 인간 권리와 존엄의 박탈이다. 더욱이 아이들은 전쟁과 가난에 취약한 존재다. 어른(강자, 권력자)들은 아이들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으며 언어를 허락받지 못한 아이(약자)들은 더 억압당한다. 아이(약자)들은 지속적으로 유기된다. 과거에는 이데올로기와 전쟁과 가난 때문이라면, 현대에는 단절과 고립에 의한 다른 양상의 유기가 더해졌다.
우리가 공감하기를 저어하는 데에는 게오르기가 느끼는 것처럼 타인의 슬픔이 질병처럼 무겁게 다가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무게감을 나눈다는 것이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소설에서 게오르기는 나이가 들면서 이입하는 능력이 점점 약해지고 사라져간다. 이는 우리가 공감하고 배려하며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에 갈수록 인색해지는 것과 닿아 있다. 평등, 연민, 공감, 이입, 연대 등 공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을 '하려들지' 않기에 슬프다.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시대의 통로를 돌아다니면서 그들의 슬픔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게오르기의 그 마음이, 병적인 이입의 능력이 사그라들고 있음에도 그 마음을 지키고자하는 그 애씀이, 지금 우리한테 절실하게 필요한 덕목은 아닐까. 수많은 출구가 도사리고 끊임없이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는, 삶이라는 미궁에서 헤쳐나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서로를 기억하기, 이해하기, 손을 맞잡기.
탄생을 비롯해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들 중 어느 것도 다시 겪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화자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행복했든 불행했든 지나온 시간보다는 내 앞에 놓여 있는 시간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기대하며 살아가고 싶다. 명치가 묵직해지는 부분이 많다. 서럽거나 분노의 슬픔이 아닌, 한 단어로 담아낼 수 없는 흐르는 시냇물같은 슬픔이 이어지는데, 슬픔으로 정화되는 듯한 이 감정이 썩 괜찮다.
출생(프롤로그)에서 시작해 죽음(에필로그)으로 마치는 소설은 그의 이야기이자 나의 이야기이고 모두의 이야기다.
※도서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