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한 페이지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12
에밀 졸라 지음, 이미혜 옮김 / 빛소굴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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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의 여덟 번째 작품이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열 살된 병약한 딸 잔을 홀로 키우는 이십대 후반의 엘렌. 늦은 시각, 잔의 발작으로 뜻하지 않게 모녀가 세 들어 사는 방의 집주인이자 이웃에 사는 의사 앙리 드베를의 도움을 받게 된다. 이 만남이 비극의 시작이다.  








소설에서는 극명하게 대조를 보이는 두 인물이 있다. 모녀 관계인 엘렌과 잔이다.
잔은 오르간 소리에도 감정이 흔들릴만큼 신경질적으로 감수성이 예민하고,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면 충동적 성향을 보이고 나아가 때때로 망상 증세까지 나타난다. 이는 그동안 보여졌던 가정 내 폭력과 불안정으로 인해 정서적으로 안전과 사랑이 결핍된 일련의 마카르가家 인물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아델라이드에서 시작된 유전적 요인도 있겠으나 온전한 가정이 주는 정상성과 따뜻함에 대한 동경, 그리고 엄마를 누군가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충돌하는 상황에 따른 환경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어 보인다. 잔이 고열과 발작에 시달리면서도 오직 엘렌과 앙리가 옆에 있기를 고집하는 장면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데, 잔을 진료하고 간호하고 돌보는 과정을 보면 세 사람은 마치 한 가족같다. 그런데 여기에서 행복감을 더 크게 느끼는 사람은 엘렌으로 읽힌다. 이러한 따뜻한 가정은 잔은 물론 엘렌 역시 꿈꾸는 삶이 아니었을까싶다. 어쩌면 엘렌이 소망했던 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엘렌은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이타심과 연민이 강한 사람이다. 그래서 언뜻 집안의 광기가 잔에게만 대물림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엘렌에게도 이와 같은 성향은 곳곳에서 보인다. 차분하고 고요한 성정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예민함과 상대가 원하지 않는 친절을 베풀고 제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충동적 분노는 잔 못지 않다. 쥘리에트의 외도를 알게 된 이후 엘렌은 아픈 딸을 돌보고 바느질이나 하며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살다시피하는 자신의 처지가 지겹고 화가 난다. 앙리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그에 대한 나름의 정당한 명분을 얻었음에도, 상심과 분노가 뒤엉킨 그녀의 감정은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앙리와의 사랑때문이라기보다 앙리같은 완벽한 남자(엘렌의 관점에서)를 남편으로 두고도 젊은 남자와 밀회를 즐기는 쥘리에트에 대한 질투에 가깝다고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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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장면은 엘린이 드베를의 집에서 랑보 씨가 밀어주는 그네를 타며 쾌락을 느끼고 흥분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그녀가 한 아이를 키우는 미망인이라는 현실을 벗어나 짧지만 오롯이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만끽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조차도 앙리가 눈앞에 나타나자 서둘러 그만두고 만다. 사실 우리가 어떤 역할, 혹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만 존재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거기에 사랑이란 감정도 예외는 아닌 것 같고. 


다른 하나는 잔이 엘렌에게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이나 숲이 무엇이냐고 묻는데 엘렌의 대답은 모두 "모르겠다"이다. 그녀가 모르는 것은 18개월째 살고 있는 파리라기보다는 스스로조차 알 수 없었던 공허함이 아니었을까. 특히 소설이 결말로 향해가는 지점에서 쥘리에트가 주도하는 장례 준비 과정과 장례식은 한 소녀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애도의 시간이 아닌, 평소 그들 부인네들이 해왔던 이벤트(예를들면 연극이 다과 모임)처럼 묘사되고 있는 장면에서 상실의 고통을 전혀 공감받지 못하는 엘렌의 외로움이 극대화된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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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녀의 아슬아슬한 사랑이야기임에도 그들의 애틋한 사랑보다 더 두드러졌 것은 한 여자의 고독이었다. 그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한 여인의 몸부림의 대가는 너무 참혹하다. 안정을 되찾고 지난 1년 동안의 자신을 되돌아보며 회한에 젖는 엘렌을 보고 있자니 영화 『데미지』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특별했다고 믿었던 사랑이 결국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상처와 무의미로 남았을 뿐, 별다를 것 없었다는 뉘앙스를 담은 남자 주인공(제레미 아이언스)의 허무 가득한 자조가 여운을 남겼더랬다. 엘렌 역시 비슷한 감상을 남기는데, 소설이 영화와 다른 점이라면 엘렌의 곁에는 라봉 씨가 있고 소설은 낙관적으로 마무리가 된다는 것.   


가정이 있는 남자를 마음에 품고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욕망 속에 스스로를 던져넣고 싶다고 의지를 불태우지만 결국 엘렌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쥘리에트를 차마 놓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에서  엘렌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제2제정 당시 파리의 풍경이나 분위기, 부르주아 사교계의 소소한 단면들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는데, 이때까지 읽었던 에밀 졸라의 작품들 중 가장 부담(?)없이 읽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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