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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의 마음 - 도망친 곳에서 발견한 기쁨
정고요 지음 / 엘리 / 2025년 12월
평점 :
에세이, 시, 짧은 소설 등이 담긴 산문집이다. 강릉에서 10년째 살고 있는 저자가 그곳에서의 일상과 산책을 통해 느낀 감상과 깨달음을 잔잔하게 풀어냈다.
불과 얼마 전에 강릉을 다녀왔고, 요 며칠 전에는 속초에서 삼일을 머물렀다. 이때 읽으면 좋겠다싶어서 동행했는데, 읽는 동안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서 의도치 않게 하룻밤 사이에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처음 서너쪽은 이 무슨 뜬구름 잡는 얘기인가싶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마음에 내 마음이 찰떡처럼 붙어버렸다.

「'곁'이란 공간도 '유니콘'과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타인의 옆으로는 쉽게 갈 수 있어도 타인의 곁으로 가기는 쉽지 않다. 타인이 곁을 주지 않으면 우리는 곁에 가지 못한다. 갈 수가 없다. 곁이라는 건, 있는 공간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공간이니까. 옆과는 다르다. 옆에 갈 수는 있다. 그러나 곁은 타인이 우리를 위해 만들어주지 않는 한 더 이상 갈 수 없는 공간이다. 그러니까, 곁이라는 공간은 타인이 우리에게 허락해야 마련되는 공간이다. 한 세계와 한 세계가 만날 때 생기는 틈 같은 것. (p25)」
♣ 나는 종종 친해지기 어렵다는 말을 듣는다. 곁을 좀 내어달라는 말도 듣곤 한다. 그럴때면 가까워지는 데에 시간이 필요한 부류라고 핑계를 대며 양해를 구한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사실 이게 전부는 아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누군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데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기에 의식적으로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에 더 가깝다. 저자의 말처럼 한 사람이 곧 하나의 세계라면, 나는 다른 세계를 만나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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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든 못하든 여전히 하고 싶다는 것, 잘하든 못하든 꾸준히 하는 게 하나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이 나의 피아노에 대한 소박한 자랑이다. (p101)」
♣ 이 대목도 참 반갑더라. 잘하든 못하든 꾸준히 하는 것이라면 피아노, 요가, 독서. 어쩌면 평생 쥐고 살았던 성실함과 인내심이 현재 내가 그럭저럭 살아가는 원동력이었으리라 생각하며 나 스스로를 위무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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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오롯이 나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의 인생은 나와 관계된 사람과 나누어 갖게 된다. 그리고 그만큼 나도 다른 사람의 인생을 나누어 갖는다. 아이러니한 점은 나와 관계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p123)」
♣ 자의식이 생기기 시작하면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말이 늘 입속에 맴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저자가 짚은대로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부모, 친구, 동료 심지어 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나의 삶과 크고 작게 관련이 있다. 그러니 누구도 나만을 위해서 살기란 어렵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선은 어디까지인지 의문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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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스스로 산책자라고 자처하는 만큼 산책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산책이야말로 시간을 두고 한 도시와 천천히 가까워지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는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안다. 오늘 춘천을 다녀왔다. 책을 읽다가 점심도 먹을 겸 육림고개와 중앙시장을 둘러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춘천은 꽤 자주 찾는 곳이지만, 시내 한가운데를 관통해 동네를 산책하는 건 드문 일이다. 내면의 지도를 만들어간다는 말이 새삼 와닿는 하루였다.
※ 도서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