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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너머 한 시간
헤르만 헤세 지음, 신동화 옮김 / 엘리 / 2025년 12월
평점 :
이 산문집은 헤르만 헤세가 무명일 때 쓴, 그야말로 초기작 중의 초기작이다. 청년 헤세의 글을 만날 수 있는 귀한 문헌이라고 할 수 있겠다.
1941년 재간에 부친 헤세가 직접 쓴 서문과 함께 아홉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에세이와 소설을 넘나드는 듯한 이야기기들은 작가가 그려내는 환상적이고 낭만적이며 한편으로는 고독의 정서가 가득 채워져 있다.
고대 그리스, 아름다운 숲과 왕국, 연인의 사랑과 이별, 이제 인생을 시작하는 청춘, 영혼의 해방을 갈구하는 사람 등 현실과 꿈을 오가는 그의 글은 우리네 삶을 빗대어 이야기하는 것으로 읽힌다. 치열한 현실 안에서도 때로는 고독 속으로 침잠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척박한 삶 속에서도 심미적 삶의 태도를 잃지 않아야함을 말한다.
이 책은 이야기의 줄거리를 찾는다기보다는 읽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움을 누린다. 특히 헤세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적은 분량의 책에서 그동안 우리가 읽어왔던 그의 문학적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데미안』부터 『유리알 유희』에 이르기까지, 온전하지 않더라도 헤세의 글과 정서를 느끼게 될 것이며 일평생 일관되게 이어온 그의 삶의 태도기 이미 젊은 시절에 시작되었음을 짐작케한다.
사위가 고즈넉한 혼자만의 시간에 읽기를 추천한다. 아마도 정취가 한결 더해질 것이다.
찬한란 햇빛 속의 이삭 여문 들판! 누렇고 붉은 빛깔들의 홍수, 부단한 빛의 충만함, 깊은 곳에서는 불그레하게 밝고, 가장자리에서는 찬란한 물결과 쉼 없이 변화하는 색으로 생동한다. 평온과 충족으로 가득한 끝없는 광경, 행복과 아름다움의 샘, 원초적 화려함을 지니고 자연 그대로이며 그 자체로 완결되고 되찾을 수 없는 모든 것이 모인 보물. 이 모든 게 내 가슴속에 가라앉아, 빈방을 전부 발견하고, 채우고 또 채우고, 마치 깊은 호수에서 나오는 물줄기처럼 넘쳐흐른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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