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의 크기
이희영 지음 / 허블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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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한 살 단설우, 인원감축을 명분으로 권고사직을 당한 날, 위로는 커녕 결혼 얘기가 오간 연인으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는다. 이야기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소설을 읽다보면 쇼펜하우어, 소포클레스, 에밀 시오랑이 떠오른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존재하는 것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더 평화롭다고 했던 그들. 뭔가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뒤돌아보면 남은 것이 없는 삶 (또는 어느 시절). 작가의 글처럼 세월은 때때로 거대한 파도가 되어 애써 붙잡은 것들을 단번에 쓸어가 버린다. 한 원장이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 얼굴이 점수로만 보였다는 것처럼 우리 역시 모든 것을 수치화하며 살아가고, '돈=성공'이라는 하나의 공식만을을 바라보며 반쯤 미쳐 사는 세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소설은 시종일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잘 사는 삶이라는 게 어떤 거냐고.  





 



소설의 제목에서 '안'은 '아니'의 준말로써 부사다.
단설우는 "행복하지 않다고 모두 불행한 건 아니잖아요. 다만 안 행복할 뿐이지. 소설을 읽으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주인공이 '안 행복의 안'을 조금씩 줄여가고 있다는 느낌. 행복하지도 않지만, 완전한 불행으로 곤두박질치지도 않는 삶. 그저 안 행복의 안이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는 그 과정 말이에요. (p163)" 라고 말한다. 그녀의 말처럼 그 반복을 견디는 게 삶이고, 완벽하게 '안'이 사라지는 삶은 없지 않은가.  


설우가 만났던 사람들 중 선자 할머니가 기억에 남는다. 일평생 살기 위해서 쓸모 있는 일만 했다는 선자 할머니. 사회는 쓸모 있는 사람을 원하고, 우리는 자신의 쓸모에서 존재감과 정체성을 확인한다. 선자 할머니가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무용한 일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배워봤자 제대로 써먹지도 못할 무용한 것들을 배우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것이 죄책감이 아닌 진짜 삶이라는 설우의 말. 그들의 마음과 생각이 너무 짐작이 되어서 명치 끝이 찡했다.


우리는 배움과 경험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혹은 타인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우리가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상실과 허무, 좌절과 상처, 고통과 두려움, 침묵과 인내 등 대부분 자기 본인의 일천한 경험에 불과한, 지엽적인 앎일 뿐이다.  어차피 세상 누구도 온전히 모든 것을 알 수도 없거니와 완벽한 삶을 살아내지도 못한다.  



설우에게만 빛으로 보이고 들리는 조照는 설우의 또다른 자아로 읽힌다(소설에서는 태아 상태에서 죽은 쌍둥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을 삼키는, 그게 더 편해서 혹은 세상사가 심드렁해서 순하게 보이는 설우. 가슴에 담아두고만 있을뿐 차마 밖으로 드러내거나 발설하지 못하는 그녀를 대신해 내뱉어주는 또다른 자아. 그렇기 때문에 설우가 서른한 살이 되어도 여전히 어려운 대상은 조가 아닌 그녀 자신이 아닐까. 


서점 주인의 친구, 설우의 귀에만 들리는 조. 이 두 존재는 그들에게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유에서든 두 사람은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았으니까.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모쪼록 설우와 서점 주인이 재회할 날을, 무심한 듯 인사를 주고 받으며 나란히 국숫집이나 미진 샌드위치 가게로 들어가는 날이 오면 좋겠다. 그렇게 그들이 죽음보다는 삶에 더, 훨씬 더 가까워지면 좋겠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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