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계
마리아 페르난다 암푸에로 지음, 임도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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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개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우리나라 번역본으로는 처음 만나는 작가이지 싶은데, 작품들 면면이 상당히 독특하다. 실린 소설들 중 서너 작품을 제외하면 모두 1인칭(한 작품은 2인칭)으로 서술하고, 대체로 화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각각의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냄새'다. 피 냄새, 먼지 냄새, 오래된 것에서 나는 묵은 냄새, 낡은 집 냄새, 늙음의 냄새, 소독약 냄새, 형언할 수 없는 역겨운 혹은 전율하게 만드는 냄새. 이 냄새들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폭력을 대변한다. 그리고 소설에서 폭력을 행하는 주체는 이름이 없이 불특정하다. 앞서 1인칭 서술이 의미심장하다는 이유는 화자(피해자, 혹은 관찰자) 역시 누구라도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성폭력에 노출된 사회.
귀신이나 악마 혹은 죽은 것보다 살아있는 사람을 더 무서워해야 하는 세상. 
가족이든 연인이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강제와 폭력.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로 옮겨가는 중에서도 힘의 피라미드 가장 아래에 존재하는 이들.
혈연 안에서 벌어져 더욱 보호받지 못하는 근친상간 피해자.
여성의 욕망을 부도덕으로 치부하고 부정하는 세태.
애증의 또다른 이름, 가족. 


어른이 되지 못한 엄마를 대신해 어른이 되어버린 장녀는 엄마도 지키지 못한 동생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의식에 오열한다. 어른의 부재 속에서 방치된 아이들은 어른의 세계를 흉내내며 자란다. 외롭게, 조난자처럼.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채 어른이 되거나 어른이 되지 못한 부모를 대신해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야만 한다.   


성적, 물리적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내리고, 살기 위해 잘못한 일도 없이 두 손을 비비며 잘못했다는 말만 반복했던 시간들, 그 시간 안에서 느껴야했던 무력감. 갈등을 제공한 자는 갈등 안에 존재하지 않고, 정작 피해자들끼리 자신이 더 큰 피해자임을 주장하며 최악의 상황에 이른다. 그리셀다 아주머니가 만든 알록달록 예쁘고 환상적인 케이크와는 딴판인 현실의 세상. 


체중과 노화의 잣대는 유독 여성에게 엄격하다. 여성의 다이어트 욕망(최근에는 남성들의 몸매 가꾸기까지)이 순전히 한 개인의 취향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외모지상주의가 마치 전근대적인 사고라도 되는듯 말하지만 사회 구조는 여전히 너도나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 날씬하게, 더 근육질로, 더 아름답게, 더 젊게,를 부채질한다. 


ㅡ 


특히 두 편의 서술자 관점이 눈에 띈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들ㅡ막달라 마리아, 마르타ㅡ을 통해 현재 공동체내에서, 그리고 사회적으로 여성의 위치를 현실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의 관점에서 바라본 예수와 그의 수난을 쓴 『수난 』, 집안에 남성이 사라지고 여성만 남게 되자 상중임에도 두려움보다는 해방감을 느끼지만 여전히 폭력의 두려움에서 자유롭지 못한 마르타의 모습을 그린 『상중喪中』.


『새끼들』에서 '나'를 밀폐된 공간으로 끌어들어 처음 성性 행위를 지시한 사람은 '이상한 오빠'다.  『블라인드』에서 매일같이 블라인드를 열고 닫는 일을 책임지는 사람은 '소년의 티를 막 벗고 있는 남자아이'다. '나'가 경매(폭행과 살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수치를 감수하고 '미친년' 흉내를 내는 것이 전부이고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투계』 에서). 생리를 시작한 여자 아이가 살아가면서 정말 무서워해야 하는 것은 '살아있는 것들'이다(『괴물』 에서).



간혹, 인생에는 불행한 순간이 눈앞에 와도 내가 어쩌지 못하는 상황들이 발생할 때가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그래도 그 순간에 드는, 그리고 어쩌면 죽을 때까지 안고 가게 될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투계장 같은 세상에서 우리 주위에 있는 괴물의 실체가 무엇인지, 소설은 고발한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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